정부는 문화예술계 검열 의혹 해명하고 지원 시스템의 구조적 개선 모색해야,.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자율성 회복 위해 노력해야

[뉴스프리존=김현태기자] 지난 9년간 공영방송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심하게 훼손돼왔다. MBC, KBS를 비롯해 YTN 등 방송사 노조들은 제 역할을 할 수 없었고, 정부의 간섭과 통제를 강하게 받는 정치적 영향력 하에 방송사들은 부당노동행위를 자행하고 무책임한 방송 구성으로 공영방송의 책임을 회피했다. 그런데 9년 전 노조활동 때문에 부당하게 해고됐던 노종면 기자 등 3명의 기자가 복직하게 됐고, MBC와 KBS 노조가 유례없는 공동 파업을 결의, 진행하면서 공영방송 정상화를 위한 움직임의 신호탄이 올랐다.

그러나 특히 MBC본부는 '국정원 블랙리스트' 발표 이후 자체 조사를 실시, 각 부문의 피해사례를 수집할 수 있었다. 김연국 본부장은 이번 조사 결과 △뉴스·시사교양뿐 아니라 드라마·예능·라디오까지 세밀한 개입과 간섭 시도가 확인됐고 △MBC 블랙리스트가 존재하며 △'세월호' '촛불' 같은 금기어가 있었고 △불이익을 당한 연예인 소속사는 세무조사도 받았다고 설명했다. 이 중 MBC 내부에서 작동됐던 자체 블랙리스트의 존재에 특히 관심이 쏠렸다. MBC본부는 이날 기자회견과 노보 특보를 통해 오상진, 최현정, 박혜진, 김소영(현재 모두 퇴사) 지난 2012년 170일 파업에 참여했던 아나운서들이 최우선으로 배제됐다고 밝혔다. 전방위적으로 사퇴요구를 받고 있는 김장겸 사장의 경우 이명박·박근혜 정부 기간 동안 MBC를 망가뜨린 주역이라고 평가받는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에 대한 보도 은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축소를 위한 물타기 보도를 이어왔고, 정권에 비판적인 기자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관리해 왔다.

지난달 퇴사한 김소영 아나운서의 경우 퇴사 석 달 전 개편을 맞은 한 예능의 MC로 낙점됐으나 "위에서, 부사장이, 아나운서국장이 싫어해서 안 된다"는 이유로 섭외되지 못했다. 또, SNS에 자신의 견해를 드러냈다는 이유로 고정 배역이 있었던 드라마 '아름다운 당신'에서 하차하기도 했다. 방송인이자 연기자로 활동 중인 오상진은 2015년 초 "임원들이 엄청 싫어한다"는 이유로 '진짜사나이2'에 캐스팅이 취소됐다. 오상진이 캐스팅돼 촬영 중이었던 드라마 '원녀일기' 때, 간부들은 촬영 중단과 연기자 교체를 요구했다. '정치적 의도가 없었다'는 제작진 해명 끝에 겨우 방송될 수 있었다.지난해 4·13 총선준비기획단은 2015년 말 기획한 '유시민-전원책 토론 프로그램'을 김장겸 당시 보도본부장에게 보고했으나 그는 둘을 거절하고 정규재 씨를 추천했다.

'진짜사나이 여군 특집'에 출연했던 최현정 아나운서도 임원들의 한소리 이후 프로그램에 더 나오지 못했다. 지난해 'DMC 페스티벌' 당시 상영할 한류 관련 영상물에 박혜진 아나운서의 뉴스 앵커 시절 모습이 들어가자 백종문 부사장이 "쟤가 저기 왜 나오냐"고 해, 제작진은 영상을 재편집해야 했다. 방송사 사장에게 인사권과 예산권이 주어지기 때문에, 방송사 조직은 사장의 성향에 큰 영향을 받는다. 실제로 지난 9년간 PD들의 제작 자율성은 심각하게 훼손당했으며 세월호와 위안부, 국정농단의 중요한 이슈들은 제대로 다뤄지지 못했다. 사장을 중심으로 한 사상 검열과 방송제작 과정에의 부당개입 증언들이 속속들이 나오고 있다. 따라서 방송사 사장이 갖는 권한이 큰만큼 선임과정의 투명성과 함께 방송사의 독립성을 보장할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돼야 한다.

작금의 사태는 비단 최근의 일만이 아니라는 점에서 단지 현 경영진의 사퇴와 새로운 사장의 선임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러나 현재의 방송사 경영진을 그대로 두고 방송사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담보할 수 있는 정상화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문제는 이들을 어떻게 선임할 지에 관한 제도에 있다. 정권의 하수인이라는 비판을 받는 인물들이 선임된 배경에는 이사진 구성과 사장 투표 방식에 있다. 양대 방송사 이사회 모두 특정 정파 측 인사들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어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사장의 선임이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상황이다.

이에 위원의 2/3 이상이 동의해야만 사장으로 선임되는 특별다수제는 정권의 영향력 아래에 놓인 언론의 공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주요한 대안 중 하나로 논의돼 왔다. 지난 정권 하에서 민주당 등 야당이 발의했지만 여당이었던 새누리당의 반대로 무산된 바 있다. 이제라도 국회는 특별다수제 도입을 통해 방송의 공정성 확보 마련이 가능하도록 방송법 개정에 나서야 한다.

공영방송사의 대규모 총파업은 지난 정권 하에서 바닥을 모르고 추락했던 공영방송 정상화를 위한 불가피한 결정인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파업으로 현 경영진이 사퇴하더라도 문제가 해결되진 않는다. 제도적 변화, 즉 특별다수제의 도입 없이는 공영방송사의 독립성과 방송 편성의 자율성은 요원해질 것이다. 적폐라 할 수 있는 현 방송사 경영진들을 옹호하며 국회 보이콧을 한 자유한국당은 더 이상 몽니를 부리지 않아야 하고, 민주당 또한 자신들의 정치적 이해관계를 대변할 사장 선임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정치권은 특별다수제 등의 도입을 추진하는 데 있어 정략적으로 접근하지 말고 공영방송의 정상화를 위해 머리를 맞대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국정원 블랙리스트'는 라디오 프로그램에도 영향을 줬다. MB 정부 시절 '이외수의 언중유쾌' 폐지, '두시의 데이트' DJ 윤도현 하차, '세계는 그리고 우리는' DJ 김미화 하차, '김어준의 색다른 상담소' 폐지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한재희 라디오PD는 "김미화 씨를 퇴출시키려는 움직임은 2008년부터 나왔다. 엄기영 사장이 다른 인물을 지목하며 이 사람을 교체하면 어떻겠느냐고 했지만, 라디오본부장이 설득해 막았다. 2009년 4월에 김미화 씨와 신경민 앵커 교체 시도가 동시에 이뤄졌는데, 신 앵커만 경질됐고 2011년 이우용 라디오본부장이 오면서 본격적으로 퇴출 작업을 하게 됐다"고 밝혔다.

2011년 10월까지 '두시의 데이트' DJ를 하던 가수 윤도현은 다른 프로그램으로 옮기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하차했으며, 2013년 '두데' 복귀 수순을 밟고 있었으나 사측 반대로 취소됐다.

배우 김여진은 MBC 내부 '소셜테이너법'을 이유로, 김종배 시사평론가는 진보적 인사라는 이유로 '손석희의 시선집중' 코너에서 밀려났다. '최양락의 재미있는 라디오'에서 시사 꽁트를 맡았던 방송인 배칠수는 '경쟁력이 없다'는 이유로 2014년 4월 개편 이후 출연하지 못하게 됐다.

김제동을 MC로 내세운 캠핑 프로그램 '오마이텐트'를 연출했던 조준묵 PD는 파일럿 방송 당시 13%(TNMS 기준)라는 높은 시청률을 기록했음에도 정규편성이 되지 못한 사연을 설명했다.

조 PD는 "캠핑 문화 시작된 지 얼마 안 됐던 2009년 기획한 프로그램"이라며 "당시 안광한 편성국장은 '시류를 잘 읽은 기획', '김제동 같은 사람을 어떻게 데려왔느냐'고 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당시 김제동이 KBS '스타골든벨' MC 하차, '해피투게더' 패널 녹화 취소 등 고초를 겪고 나서부터 이상한 분위기가 감지됐다는 게 조 PD의 설명이다. 그는 간부들이 내레이터 윤도현을 문제삼다가, '오마이뉴스'가 연상된다며 제목에 트집을 잡았고, 국제시사 프로그램 'W'와 맞거래를 시도했으며, 나중에는 결국 MC 김제동이 문제라는 말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김철영 편제부위원장은 "사측은 (블랙리스트 인사들이) 출연한 적 있지 않느냐. 세월호 방송한 적 있다고 반박할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10번 출연할 정도의 기회가 있었는데 그게 1, 2번으로 줄어든다면 그게 공정한 경쟁이었을까"라고 반문했다.

신인수 변호사는 "국정원은 이번 문건을 작성한 직원들을 국정원법상 직권남용죄(7년 이하의 징역)를 적용한다고 했다"며 "그들과 공모한 부역자들이 남아있다. 구성원들과 문화예술인들에게 방송 출연을 못하게 한 이들도 공동정범으로 처벌받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연국 본부장은 "직접 피해대상이 된 연예인들과 함께 법적 대응을 준비한다. 이명박, 원세훈뿐 아니라 MBC 내부 부역자들에게도 민형사상 책임 묻겠다"며 "다시는 이런 불행한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내부 문제도 밑바닥부터 철저히 바꾸는 계기로 삼겠다. 총파업이 그 시작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정부가 예술가의 정치적 입장을 문제 삼아 블랙리스트를 만들고, 이를 실무 기관에 하달했다는 의혹을 사는 것 자체가 문제다. 사실 국내 문화예술계는 아직 두터운 국내 시장이 형성돼 있지 않아 공공지원금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지원금 배제는 예술가가 예술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느냐와 직결된 문제다. 예술가의 정치적 입장에 따라 문화예술 지원 사업이 결정된다면, 정부는 정치적으로 ‘불온한’ 예술가들을 낙인찍고 이들을 공공 지원으로부터 원천봉쇄해 사실상 이들의 예술 활동을 고사시키고 있다는 비난을 면할 수 없다. 문화예술 진흥을 담당해야 하는 실무기구들이 정치성을 기준으로 다양성과 실험성을 지닌 작품들을 고사시킨다면 정부의 입맛에 맞는 작품들만이 문화생태계에 남게 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소위 ‘블랙리스트’ 사태가 벌어진 것은 근본적으로 현 정부의 문화예술 진흥 시스템에 구조적 문제가 있음을 반증한다. 현재 국내 공공 문화예술 지원 사업은 문체부 주도로 이뤄지며 그 산하기관에서 실무를 담당하는 기관들은 문체부와 수직적이고 긴밀하게 연결된 구조를 취한다. 심지어 산하기관 대표들을 모두 문체부가 임명하기 때문에 기관들이 정치적으로 독립된 집단으로 기능하기 어렵다. 상부에서 내려온 ‘가이드라인’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구조인 것이다. 상부 지시로 인해 심사결과를 바꿔야 하는데 조작의 근거를 마련할 수 없어 괴로워했다는 예술경영지원센터 관계자의 증언 보도가 이러한 구조적 문제를 대변한다. 문화예술 지원 시스템의 행정적 구조를 개혁하는 것이 시급하다. 영국의 경우처럼 예술위원회는 행정부로부터 예산을 지원받지만 집행 내용을 보고하는 정도의 감독만 받으며 예술지원업무의 자율성을 보장받을 필요가 있다.

국가정보원에서 작성된 'MB 블랙리스트'에 오른 문화예술인들이 이명박 전 대통령과 원세훈 전 국정원장을 상대로 소송에 들어간다.

배우 문성근씨는 13일 트위터를 통해 "정부, MB, 원세훈을 대상으로 민형사 소송을 진행할까 한다"고 밝혔다. 그는 민변의 김용민 변호사가 맡아주시기로 했다며 연락처를 남겼다.

문성근씨는 2002년 대통령 선거 당시 노무현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가입했다. 이후 이명박 정권 당시 블랙리스트로 분류돼 방송 출연에 어려움을 빚었다.

최근 국가정보원 개혁위원회는 이명박 정부 당시 '좌파 연예인 대응 TF'가 작성한 문화 예술계 블랙리스트 명단을 공개했다. 이 명단에는 이외수, 조정래, 진중권 등 문화계 6명, 문성근, 명계남, 김민선, 유준상 등 배우 8명, 이창동, 박찬욱, 봉준호 등 영화감독 52명, 김미화, 김구라, 김제동 등 방송인 8명, 윤도현, 신해철, 김장훈 등 가수 8명 등 총 82명이 포함됐다.

문화예술계 공공 지원은 한 국가의 문화적 생태계를 조성하는 중요한 사업으로 단순히 시혜적인 후원 사업만이 아니다. 만일 수많은 예술인을 대상으로 검열의 가위가 작동한다면 한국 문화예술 생태계의 다양성은 보장될 수 없으며, 한국 예술계의 미래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정부는 예술계 검열 사태의 책임자가 있다면 이를 철저히 수사하고 처벌해야 한다. 나아가 독립성과 자율성을 위협하는 현재의 문화예술 지원 사업 시스템을 개선하는 근본적인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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