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든브릿지증권 노조 투쟁 12년, 다시 시작이다

소설가이자 대학교수였던 마광수 씨가 5일 오후 서울 동부이촌동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시신은 가족이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경찰은 마 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사인을 조사 중이다.

2005년 7월 브릿지증권의 강당은 불안과 긴장, 그리고 기대가 교차하는 공간이었다. 자리를 함께한 100여 명의 임직원 외에도 10여 개 지점에서 근무하는 전국의 직원들의 관심이 쏠려 있었다. 노동조합이 전체 조합원을 모아 회사의 운명을 좌우하는 결정을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5년여 기간 동안 회사를 소유하며 4차례의 유상 감자와 구조 조정으로 약탈을 일삼던 해외 사모펀드 투기자본 BIH(Bridge Investment Holdings)가 한국을 철수하면서 제시한 골든브릿지로의 매각과 청산 두 가지 옵션 중 하나를 선택하는 조합원 총회였다. 투기자본 BIH가 약탈 경영하는 동안 4500여억 원에 달하는 자기자본은 1000억 원대로 줄었고, 850여 명의 직원은 130여 명으로 줄었고, 42개의 지점은 10개로 주는 등 회사는 망가진 상태였다. 노동조합은 신생의 소규모 자본인 골든브릿지와 손잡고 희미하게나마 미래를 열어갈 것인지, 더 많은 보상을 받고 청산에 동의하고 각자 살길을 찾아 흩어질 것인지 투표로 결정해야 했다.

나는 감사팀 과장으로서 총회에 참석하였다. 양측으로 나눠진 견해는 토론을 거치며 정리되기는커녕 더욱 팽팽해져만 갔다. 투기자본의 약탈에 망가진 회사에 정이 떨어진 데다 검증되지 않은 신생 소규모 자본에 미래를 거느니 목돈을 쥐고 새 출발하려는 사람들과 신입으로 들어와 투기자본의 갖은 만행에 맞서며 지켜온 회사에서 마지막 희망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대립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나는 용기를 내어 투표 전 마지막 발언에 나섰다. 지금도 발언 당시의 긴장과 떨림을 몸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나는 노동운동가 출신 이상준 회장이 이끄는 골든브릿지와 골든브릿지가 단기간에 이룩한 사업적 성공에 매력을 느끼고 있었다. 작지만 노동운동가 출신이라는 도덕성과 역량을 갖춘 자본이라는 생각에 더해, 추락하기만 하던 우리 회사가 직원들의 경영 정상화에 대한 열망을 바탕으로 재기할 수 있는 최적의 파트너라고 생각했다. 내 생각을 강당에 모인 사람들에게 혼신의 힘을 다해 전달했다. 투표 결과 근소한 차이로 청산 안건이 폐기되고 골든브릿지로의 인수가 결정되었다. 희비가 교차하였고, 청산을 원했던 직원들의 일부는 이후 명예퇴직으로 회사를 떠났다.

당시 골든브릿지 이상준 회장은 노사 공동 경영을 제안하고 약정서를 노동조합과 작성하였다. 내용은 흠잡을 데 없이 이상적이었다. 약정서의 전문은 "소유 지배 구조의 개선, 사업 영역 확대, 직원들의 복지 증진 및 고용 유지를 통한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하여 본 약정서를 체결하고 상호 성실히 이행할 것을 확약한다"로 시작하였고, 브릿지증권이 금융 기관으로서의 공적, 역할 및 기업의 사회적 책임 강화, 직원의 민주적 경영 참가를 통해 한국 사회의 새로운 기업 모델이 될 것이며, 우리사주제(ESOP, Employee Stock Ownership Plan)를 통해 직원들의 민주적이고 포괄적인 경영 참가 제도를 운영할 것을 약속하였다. 구체적 경영 참가 방식은 우리사주조합이 추천한 이사와 사외 이사 각 1인씩을 선임하고, 노사 동수로 구성된 공동경영위원회(ESOP위원회)를 통해 중요 경영 현안을 공동으로 결정하는 것이었다.

약정서의 내용도 이상적이었지만, 약정의 당사자인 이상준 회장은 엄혹했던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현장에서 활동한 노동운동가였고, 우리 노조가 속한 사무금융연맹의 전신인 보험노련의 홍보국장 출신이기도 하였기에, 불이행에 대한 의심의 여지는 추호도 없었다. 이러한 약속을 통해 이상준 회장은 상장 금융회사인 브릿지증권(이후 골든브릿지투자증권으로 사명 변경함)을 인수할 수 있었고, 인수와 동시에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금융그룹의 총수가 될 수 있었다.

나는 골든브릿지로 인수되고 1년여가 지나서 노사 공동 경영의 안착을 목표로 노동조합 수석 부지부장에 출마하였다. 그러나 노사 공동 경영 약정은 오래가지 않고 이상준 회장에 의해 형식화되다가 결국 깨졌다. 이상준 회장은 독선적 경영을 강행하는 한편, 골든브릿지투자증권의 자금을 부실 계열사 지원을 위해 빼돌리기도 하였고, 노동조합은 끊임없이 중단을 요구하고 비판하였다. 나는 2011년 지부장이 되었고, 이상준 회장은 2011년 노조 파괴 전문으로 악명 높은 창조컨설팅과 비밀리에 계약을 맺어 노사 공동 경영의 당사자인 노동조합 파괴에 나섰다. 노동조합이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단체 협약 전면 개악 안(案)을 요구하고 노동조합이 이를 거부하자 단체 협약을 해지하는 한편, 조합원들의 노조 탈퇴를 강요하고 원격지로 발령 내는 등 창조컨설팅의 노조 파괴 시나리오를 그대로 집행하였다.

결국 나는 2012년 4월 조합원 총회를 열어 조합원들에게 파업을 제안하였고, 조합원들은 90%가 훨씬 넘는 찬성으로 파업을 결의하여, 같은 해 4월 23일 운명의 전면 총파업 투쟁에 돌입하였다. 파업은 처절한 투쟁으로 586일간 이어졌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파업 투쟁으로 기록됐다. 파업 중에 이상준 회장과 남궁정 사장은 자본시장법 위반과 부당 노동 행위의 노조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유죄 판결을 받기도 하였고, 무노동무임금으로 극심한 경제적 고통을 받던 조합원들을 대상으로 사측이 단행한 두 차례의 희망퇴직으로 92명이 시작한 파업은 56명으로 종료되었다. 동료를 배신할 수 없다며 노조 탈퇴 후 업무 복귀는 할 수 없었던 조합원들의 눈물겨운 선택이 희망퇴직이었다.

파업은 노동조합을 지켜 냈다는 상처뿐인 승리였고, 상당한 근로 조건의 후퇴와 쌍방 간의 고소고발, 손해배상 청구 취소로 마무리됐다. 파업 이후 3년여가 지난 지금까지 노동조합과 조합원에 대한 탄압과 부당 전보, 부당 노동 행위, 모욕과 인권 유린은 그치지 않고 있고, 조합원들은 눈물겹게 버티며 투쟁하고 있다. 나는 또다시 단체 협약 해지에 맞서 1인 파업을 진행 중이고, 이상준 회장은 BIH가 회사를 망치며 단행했던 5차례의 유상 감자를 그대로 흉내 내 파업 중에 300억 원, 3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300억 원의 유상 감자로 회삿돈을 빼내려 하고 있다.

나는 또다시 투쟁을 준비 중이다. 참으로 긴 시간 동안 골든브릿지 이상준 회장에 맞서, 헤어날 수 없는 늪에 빠진 숙명처럼 싸운다. 끝이 보이지 않아 그만 멈추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하지만 양심이라는 것이, 조합원 동지에 대한 책임이라는 것이 글자 그대로 송곳처럼 찌른다. 오랜 시간 싸워 오면서 질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질 수 있다는 이유로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은 마음속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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