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9일~30일 갤러리나우 전시

힌색과 열린 둥그스럼 초월론적 경험론 환기시켜...감수성 촉발

기 소르망 “한국인만의 미적,기술적 결정체...그저 멍하니 바라보게 만든다”

강익중 구본창 김용진 석철주 신철 오만철 이용순 전병현 최영욱 등 9인 참여

강익중 달항아리

[뉴스프리존=편완식 미술전문기자] 세계적인 석학이자 문화비평가인 프랑스의 기 소르망은 " 백자 달항아리는 어떤 문명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한국만의 미적,기술적 결정체로, 한국의 브랜드 이미지를 정하라고 한다면 난 달 항아리를 심벌로 삼을 것“이라고 극찬했다. 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머릿속에 아무런 잡념이 떠오르지 않아,그저 멍하니 계속 바라보게 된다고 그는 덧붙였다.

구본창 OSK 02, C-Print, 190x151cm, 2005
구본창 OSK 02, C-Print, 190x151cm, 2005

갤러리 나우에서 열리는 ‘우리는 왜 달항아리에 매료되는가’전(6월9일~30일)에 참여하는 강익중, 구본창. 김용진, 석철주, 신철, 오만철, 이용순 전병현, 최영욱 등 9인도 이같이  달항아리의 기호에 끌림을 당한 대표적 작가들이다. 도자 달항아리 작가부터 캔버스에 달항아리를 그리는 작가, 철심과 도자부조, 한지부조로 달항아리를 형상화 하는 작가, 사진으로 달항아리의 내적에너지를 이끌어내는 등 다양한 매체, 다양한 표현 양식들을 보여주는 전시다.

김용진 기운 가득한 그릇
김용진 기운 가득한 그릇,캔버스 위에 철심 
석철주 달항아리,자작나무판재,아크릴릭
석철주 달항아리,자작나무판재,아크릴릭

자연스레 전시구성도 재미가 있다. 실제의 달항아리와 다양하게 이미지를 형상화 한 작품들이 나란히 걸리게 된다. 마치 개념미술가 조셉 코수스의 ‘하나인 세 개의 의자’를 연상시킨다. 의자를 찍은 사진, 실제 의자, 사전적 정의의 의자를 나란히 전시한 작품이다. 인간의 인식 능력인 지각(실제 의자), 상상(사진의 이미지), 사유(의자에 대한 정의)를 한 화면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진과 사물, 문자가 어떻게 하나의 의자라는 개념을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의자라고 부르는 물체와 그 물체를 재현한 모사, 그리고 그 물체를 의자라고 부르면서 정의하는 그 과정을 본질적으로 개념적이란 말로 던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개념을 작품의 오브제로 삼아서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는 방법 그 자체를 하나의 시각적 구성으로 보여주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의자’가 왜 의자가 되는 지를 손쉽게 보여준다. 갤러리 나우 전시도 ‘달항아리’란 무엇인가 질문을 던지고 있는 것이다. 개념미술이 우리들에게 던져주고 있는 화두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달항아리가 왜 이 달항아리인지를 전시를 통해서 보여주고 확인시켜주려는 시도다.

신철 방산백자,진주백토
신철 방산백자,진주백토
이용순 달항아리
이용순 달항아리

이 지점에서 우리는 들뢰즈의 시뮬라크르를 소환하게 된다. 플라톤은 이데아를 가장 참된 것으로 간주하고 현실은 이데아의 복제이며, 시뮬라크르는 복제의 복제로 가장 가치 없는 것으로 봤다. 하지만 들뢰즈는 애초에 이데아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원본과 시뮬라크르 간의 대조 자체가 무의미하다고 본다. 시뮬라크르는 시뮬라크르 그 자체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들뢰즈에게 시뮬라크르는 더 이상 본질-외관 또는 원본-복사본의 구분 자체가 아니다. 원본과 복사본, 모델과 재생산을 동시에 부정하는 긍정적 잠재력을 숨기고 있다. 적어도 시뮬라크르 세계에서는 그 어느 것도 원본이 될 수 없으며 그 어느 것도 복사본이 될 수 없다. 원본으로부터 복제되어 나온 또 다른 원본이라는 주장이다. 원본을 모방한 복제, 나아가 복제가 아닌 원본이 된 복제가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로 쥐를 모방한 미키마우스를 들 수 있다. 미키마우스는 더 이상 쥐에 종속되지 않고 하나의 독립된 원본이 됐다. 캐릭터 산업, 애니메이션 등에서 실제로 존재하는 원본이 된 것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달항아리도 다르지 않다. 골동이나 문화재 속에서 있던 그 달항아리가 컨템포러리 아티스트을 통해서 이 달항아리로 빗어지고, 변형되며, 사진으로나 회화로 새롭게 형태를 갖추면서 드러난다.

오만철 반추,백자도판
오만철 반추,백자도판
전병현 블러썸
전병현 블러썸
최영욱  karma20202-14
최영욱 karma20202-14

많은 작가들이 달항아리를 소재로 작업을 하고 있다. 왜 작가들은 그토록 달항아리의 조형성에 매료되고 있을까. 공통적인 이유는 흰색과 생김새에서 오는 감수성이다. 사실 달항아리 같은 순백자 항아리는 우리민족에게만 있어서 더욱 그러하기도 하다. 흰색은 전 세계 공통으로 하늘, 천상, 순결, 허공, 순종, 희생, 관대한 허용의 보편적 감수성을 지닌다. 느낌은 깨끗하고 자연스러우며 또 모든 색 중에 가장 순수하다. 하얀 웨딩드레스, 백의의 천사 간호사복, 수도원의 수도사복이 흰색이다. 천사도 백색 옷을 입고, 신선은 눈썹과 수염까지도 하얗다. 초월의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천상에서 오는 빛의 색을 흰색으로 가름했다. ‘희다’는 중세 국어로 해를 뜻하는 단어로부터 파생된 단어다. 흰색은 다른 색을 생생하게 살려주고 풍성하게 감싸 안기에 미술관 벽면도 하얗다.

달항아리는 백색이라도 눈빛 같은 설백(雪白), 젖빛 같은 유백(乳白), 잿빛이 도는 회백, 한지(韓紙)의 지백(紙白), 모시나 옥양목, 광목과 같은 그 미묘한 흰색의 멋을 담고 있다. 이런 색들은 조선의 유교사회에선 청렴과 절제를 상징했다. 고대 로마에서 관직에 출마하는 남자가 걸치는 흰 색의 ‘토가’도 같은 의미를 지닌다. 중세유럽 일부 성화의 흰색 후광과 성직자들의 흰옷은 고결함과 희생을 나타내고 있다. 지구촌 어디서나 백색 옷은 하늘 앞에 육체뿐만 아니라 영혼을 드러낸다는 정서를 지닌다.

흰색은 이처럼 '색상'을 넘어 시대마다 추구하는 가치의 '상징'이 됐다. 흰색의 역사는 빛으로 순수함을 담으려 했던 인간의 여정이다. 무색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 흰색이 무색을 대신하면서 비움, 공허를 기표하기도 했다. 달항아리는 기물이라는 점에서 비움과 공허의 미덕은 존재자체의 의미이기도 하다. 흰색으로 그 존재의미를 더 극대화시키고 있는 모습이다. 생김새도 원이 아니라 둥그스름하다. 완벽한 원은 폐쇄적인 닫혀진 모습이다. 원에 가까운 둥그스럼은 열려진 구조다. 소통의 단초가 되는 것이다. 인간은 규격화 된 형상보다 비정형의 모습에서 마음을 저울질 하고 생각을 시작하게 된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발동되는 지점으로 우리가 외부세계에 관여하는 기본 방식이기도 하다. 달항아리의 비정형이 인간의 감성을 자극하는 이유다. 양감을 더욱 풍부하게 부각시켜 준다. 달항아리가 내밀한 차원을 열리게 해주는 열린 구조라는 얘기다. 우리 감성의 보물창고가 열리는 것이다. 수화 김환기 작가는 “내 뜰에는 한아름 되는 백자 항아리가 놓여 있다. (…) 달밤일 때면 항아리가 흡수하는 월광으로 온통 달이 꽉 차 있는 것 같다”고 했다. 달항아리를 보고 있으면 “촉감이 통한다. (…) 사람이 어떻게 흙에다가 체온을 넣었을까”라고도 했다.

이런 자유의지와 상상력은 우리 오관에 날카로운 촉수를 만들어 준다. 최상급 영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실제적인 것을 떠나 상상적인 것에 이르러야 하는 것이다. 달항아리가 열린 감성의 창고라는 찬사를 받는 지점이다. 주둥아리가 넓어 호흡하는 느낌을 주면서 표면이 사람 피부 같기도 하다. 야스퍼스는 모든 존재는 그 자체에 있어서 둥근 듯이 보인다고 했다. 반 고흐도 삶은 아마도 둥글 것 이라고 했다. 존재의 그 둥굶은 현상학적인 명상을 통해서만 다다를 수 있는 곳이다. 빛 덩이 같은 달항아리 처럼 우리 자신을 응집시키고 외부적인 것이 없는 것으로 살아질 때 둥글 수밖에 없는 것이다. 둥그스름한 달항아리는 하늘의 달이 되고, 그 풍경 속에 큰 평정이 있다. 좋은 상징물이다. 이런 해독의 임무는 예술에 있다. 들뢰즈의 초월론적 경험론도 이런 것일 게다. 목수가 대패를 통해 나무가 방출하는 기호에 민감해질 때에만 비로소 경지에 이르게 되는 이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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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아리 #미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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