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의 아픔을 함께하며 살아온 한상렬 목사
5.18정신 계승 ‘한몸 평화’ 실천…화해, 자주통일 꿈 꿔

전북대 총학생회장을 지내기도 한 한상률 목사(70세)
전북대 총학생회장을 지내기도 한 한상렬 목사(70세)

신앙의 힘으로 시대 부름에 응답할 수 있어

청춘들,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정체성 찾길

2018년 4월, 판문점에서 남북의정상이 만나는 순간 누구보다 감격의 마음으로 지켜본 이가 있다. 2010년 무단 방북으로 같은 곳에서 국가보안법으로 체포됐던 한상렬(70세) 목사이다.

그해는 6.15남북공동선언 10주년으로 관련 행사를 북에서 개최하고자 했으나 정부에 의해 불허돼 남측에서는 오직 한상렬 목사만이 북을 방문하게 됐다. 그의 북녘방문은 광주 5.18성지에서 11일간 단식철야기도 끝에 결단한 것이었다. 당시 한 목사는 “‘만남이 통일이다’는 깨달음을 얻어, 70일 간 북녘을 순례하며 북녘 동포들과 함께 민족화해와 통일평화를 노래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판문점을 통해 귀환하던 길로 체포돼 3년간 옥중 수도원 생활을 해야 했다.

민주화와 통일 운동사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한상렬 목사. 역사의 소용돌이를 정면으로 마주한 그의 삶은 굴곡의 연속이었다. ‘쉽게 살아라’라는 주변의 이야기들에 고민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지만 민주화 과정의 굵직한 사건들을 몸소 겪어 역사적 사명을 저버릴 수 없었다.

한 목사는 수많은 민주화 운동에 이름을 올린 것은 물론 2002년 ‘미선이 효순이 사건’ 당시 범국민대책위원회 방미투쟁단장을 맡아 대외적으로 사건을 알리며 SOFA(한미주둔군지위)협정 전면 재개정 등을 요구했다.

이라크 전쟁 한국군 파병 반대, 평택 미군기지 확장 저지 운동 등도 펼쳤다. 그는 “미군을 물러나게 하는 것이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길”이라고 생각하며 자주화운동에 동참했다.

사회활동의 시작은 우리학교 재학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진학 후 사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한 목사는 대학교 3학년이던 1971년, 우리학교 총학생회장 선거에 출사표를 던져 당선됐다. ‘적극적인 학생운동으로 민주·통일 운동에 기여하고 싶다’라는 바람 때문이었다. 당시는 독재정권 시기로 활동이 쉽지 않았다. 위수령을 겪는 등의 어려움을 견디면서도 재학생들은 민주화와 통일에 대한 열망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했다.

대학 졸업 후에는 1975년에 창립된 한국기독교청년협의회의 전북지역초대 회장을 맡는 등 기독청년운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또한 앰네스티,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등에 함께하며 유신반대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그는 1979년 박정희 대통령 사후 ‘민주화의 봄이 오리라’라고 생각하며 신학 공부에 열중하리라 마음을 먹고 독일 튀빙겐 신학대학의 초청장을 받아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목사는 1980년, 5.18 민주화운동에 연루돼 6월 초 체포된다. 5. 18 민주화운동의 참상을 알리는 유인물을 제작해 유포하던 후배에게 자금을 제공한 혐의였다. 그는 보안대로 끌려가 취조 받고 광주 상무대에서 군사재판을 받았다. 한 목사는 “당시 몽둥이찜질 등 고문을 당하며 마음속에서는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용기와 ‘빨리 나가고 싶다’라는 비겁함이 충돌해 몸보다 마음이 더 힘들었다”라고 회상했다. 집행유예로 풀려난 그는 ‘잘못된 위정자들 때문에 왜 민중들이 아파야하고 스스로는 인격이 바스러져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에 휩싸였다. 한 목사는 “‘진정한 민주화는 통일이며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가 통일, 자주, 민주라는 것을 절실하게 깨달았다”라고 말했다.

그가 기독교를 접한 것은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45세에 뇌출혈로 세상을 떠났다. 한 목사는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왜 사는가’ 등 수많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우리학교 총학생회장 활동 중에 만난 은명기 목사는 그에게 큰 버팀목이 돼주었다. 은 목사는 ‘오래 사는 것보다 의미 있게 사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그를 위로했다. 은 목사의 지도를 받으며 그의 신앙심은 더욱 깊어졌다.

1980년 광주 상무대 안에서 한 목사는 은 목사와 함께 찬송을 부르는 영적인 꿈을 꿨다. 무척 생생했던 그 꿈은 교회 개척으로 해석됐고, 출소 후 뜻있는 동지들과 함께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상렬 목사는 “1981년부터 전도사 생활을 하면서 임마누엘교회를 개척했고 이후 은 목사님의 후원으로 1986년 동완산동에 전주고백교회를 열게 됐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교회가 민주화와 통일 운동의 중심에서 역할을 다해 이 땅에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앞장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한상렬 목사는 교회에서 5·18 진상이 담긴 비디오를 상영했으며 5.18 때는 망월동에서 예배를 드렸다. 지역에서는 ‘민주화운동협의회’의 의장 역할을 하며 5.18정신을 계승해나갔다.

교회 개척 후 3년이 지나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 생겼고 그가 중앙공동 의장을 맡게 됐다. 5공 청산운동 및 광주학살책임자처단, 반민주악법개폐, 조국통일촉진 등을 외쳐 ‘감옥 가는 자리’였던 전민련 의장 직책을 두고 고민이 많았다. 당시 고백교회 배창선 장로의 “민족의 십자가 지시고 민족목회를 하시라”라는 격려 덕에 한 목사는 의장 수락이라는 결심을 굳힐 수 있었다. 이후 한상렬 목사는 1년간 수배생활을 했고 강경대 열사사건 범국민대책회의 상임공동대표로 활동하다가 구속돼 1년 9개월 형을 살기도 했다. 역사적인 6.15 공동선언 이후엔 통일연대 상임대표로서 북녘땅을 40여 차례 오가는 등 통일평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2003년에는 문익환 목사의 두루마기를 사모인 박용길 장로로부터 받기도 했다.

지난해 10월에는 ‘기도하면 통일이 되고 안 하면 안 된다’, ‘통일은 너에게 달렸다!’는 꿈을 꾸고 방황과 갈등이 일어났다. 개인에게 준 소명으로 여겨 엄청난 부담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는 전주를 떠나 지리산, 강진 만덕산 늦봄 문익환학교, 계룡산 자락 등을 전전하다 꿈에 대한 해석을 새롭게 했다. 이 꿈은 나 개인이 아니라 우리 겨레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임을 알게 됐다. 우리 겨레 모두가 통일이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면 통일은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통일의 바다에 물 한 방울의 역할로서 자신의 몫을 감당하고자 했다. ‘하나 되고 하나 되고 하나 된다는 의미’로 111일간 평화기원을 작정하고 오롯이 기도에 힘썼다. 많은 활동과 사회운동은 부인 이강실 목사와 교회공동체의 기도, 그리고 응원해준 수많은 이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대 청춘들에게 한상렬 목사는 “자기 자신다운 삶을 살길 바란다”라며 “스스로에게 질문하며 끊임없이 정체성을 찾아가면 좋겠다”라고 말했다. 더불어 공동체 의식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갔으면 하는 바람을 전하며 기도했다. “한 몸이니 한 몸으로 한 몸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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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상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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