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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린, 군기라는 이름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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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린, 군기라는 이름하에
[연재]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7회 下
  • 김종익
  • 승인 2020.05.20 12: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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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벌어지고 있는 ‘정의연’을 향한 악의적 흠집내기에 분노를 금할 수 없습니다. 이 자료들이 ‘메신저를 공격해 메시지를 무력화하고자 하는 자’들의 의도를 무력화하는 무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 역자 주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7 下
유린, 군기라는 이름하에

사토 쥰佐藤純
1965년생. 아사히신문 기자.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 태평양연구센터 객원 연구원.
이 글은 2016~2018년 아사히신문 휴직 중의 조사를 바탕으로 썼다.

“역사는 남는다.”

한반도 출신 전 위안부, 송신도宋神道 씨가, 열여섯이었던 1938년 무렵에 처음 끌려간 곳이, 우창 위안소였다.

전후, 일본에서 산 송 씨가 일본 정부를 상대로 제기했던 재판의 도쿄지방법원 판결에 따르면, 송 씨는, “전쟁터로 가서 일하면 돈을 벌 수 있다”는 따위의 유혹을 받고, 군인의 섹스 상대를 하게 된다는 것을 모르고 끌려간 우창에서, 억지로 군의관에게 성병 검사를 받게 하고, 군인의 섹스 상대를 시켰다. 도망치려고 해도, 위안소 담당자에 잡혀 다시 끌려와 폭행을 당하고, 군인의 섹스 상대를 강제로 시켰다. 많은 날에는 수십 명. 사소한 일로 폭력을 휘두르는 자도 있었다. 반복해 두들겨 맞아 오른쪽 귀가 들을 수 없게 되고, 칼에 베여서 옆구리에 칼로 베인 상처가 남았다. 한커우, 웨저우岳州 등의 위안소를 전전하게 되었으며,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인의 섹스 상대를 하게 했다.          

2000년 11월, 도쿄고등법원은 1심의 사실 인정을 전제로, “항소인(송 씨) 등 종군 위안부의 설치, 운영에 대해서는, 당시의 일본을 구속한 강제노동조약, 추업醜業조약에 대한 위반 행위가 있는 경우도 있었다고 인정되며, 각각의 조약 위반에 따른 국제법상의 국가 책임이 발생한다”고 인정한 다음, “일본국은, 국제적 불법행위를 한 위안소 경영자, 거기에 가담했다고 보이는 구일본군 관계자에 대한 처벌과 시정 조치, 피해자 구제 조치 등을 명하는 등의 처분을 할 의무가 발생된다” 고 파고들었다.

위안소 운영 방법에 대해, “당시의 공창 제도를 고려해도, 상당성을 현저하게 결여했다”, 나아가 “강제적 간음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는 사례도 있었다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기술했다. 전쟁이 끝나고 55년이 지난 후의 판단이지만, 그 척도는 전시 중의 룰이다.

고등법원은 조약 해석과 민법의 제척 기간 등을 이유로 송 씨 쪽의 주장을 물리쳤지만, 일본군이 군기를 내걸고 점령한 우한 등에서 반복해 펼쳐진 비인도적인 행위를 분명히 인정하는 판결이었다. 송 씨는 판결 후 기자 회견에서, “저 역사는 남는다”고 말했다.주14) 최고재판소가 2002년 3월에 송 씨의 상고를 기각해 송 씨의 패소가 확정되었다. 2017년 12월, 송 씨는 아흔다섯 살로 세상을 떠났다.

공범자

우한 위안소에 대해서는, 야마다 세이키치山田淸吉의 『우한병참武漢兵站』(1978년), 나가사와 겐이치長澤健一의 『한커우위안소漢口慰安所』(1983년)에, 군인 입장에서 본 위안소 상황이 적나라하게 기록되어 있는 사실이 널리 알려져 있다. 야마다는 1943년 4월 무렵 한커우병참 사령부의 위안 계장이 되고, 나가사와는 1940년 9월에 한커우병참 사령부 소속 군의관으로 부임해, 함께 패전까지 우한에 있었다. 야마다 등이 관여한 위안소는, 뭔가 사정으로 ‘지방 관헌’에게 맡기지 않고, 마지막까지 군이 직접 관리했던 것 같다. 일본에서 진출한 9곳과 조선인 11곳이 있고, 위안부가 각각 130명, 150명 있었다고 한다.

니치렌주의日蓮主義[일본 불교에서 日蓮의 묘법연화경妙法蓮華經(법화경) 지상주의의 이념을, 國柱會 창설자 다나카 치가쿠田中智學(1861~1939년. 종교가. 국가주의를 받아들인 재가 불가 운동을 시작해, 국주회를 창시)와 顕本法華宗(日蓮宗 우열파의 일파) 전 관장 혼다 닛쇼本多日生를 중심으로 메이지 시기에 근대주의적으로 체계화된 불교 사상]를 신봉하는 병참 사령관 호리에 사다오堀江貞雄는, 온정가로 위안부 여성들이 처한 사정에 동정하는 한편, 군인의 성욕에 대처할 필요성도 부정하지 않고 고민하던 끝에, 위안소를 존속하게 한 다음, 업자에 의한 착취를 없애 하루 빨리 여성들에게 발을 빼게 하는 길을 모색했다고 한다. 야마다는 명을 받고 위안소 경영 개선에 나서, 여성들이 아무리 일해도 빚의 잔액이 줄지 않게 조작하는 업자들의 부정 경리를 못하게 하려고 했지만, “실태는 좀처럼 파악할 수 없었다”고 한계가 있었던 점을 인정한다.

나가사와는, 일본 현지의 공창제에서 명목상 인정되고 있던 폐업의 자유가, 위안부의 경우에는 없었던 점, 빈곤 가정 여성들이 자유를 빼앗긴 상태에서 군인 상대를 강요당하는 점, 여성에 대한 체벌이 있었던 점, 여성의 인원수를 확보하기 위해 성병 치료를 조절했던 점을 밝힌다. 한커우에 오기 전 오사카에서 유곽을 경영한 업자는, 일본 현지의 경찰과 유착해, 달아난 창기를 데려다 준 체험담을 나가사와에게 자랑하면서, 한커우에서는 군 상층부와 통하는 것을 암시하며, 여성들의 성병 검사 등에 즈음해 재량껏 봐달라고 농담 삼아 압박했다고 한다.

두 사람의 기술과 송신도 씨의 판결에서 알 수 있는 것은, 범죄와 기만에 찬 일본 현지와 식민지의 매매춘 구조가 전쟁터로 유입되어, 보다 심각한 인권 침해를 야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가사와는, 위안소를 이용한 병사들을 옹호하며, “질책을 받아야 할 대상은, 군인들을 이런 상황으로 몰아넣은 전쟁일 것이다”라고 기술하며, 책임의 소재를 명확하게 하지 않는다. 군의관과 위안 계장이라는 입장 차이는 있지만, 야마다가 “성전이라는 이름에 숨어서, 악랄한 포주의 착취에 눈을 감고, 인신매매를 거든 공범이 아닌가라고 묻는다면, 필자는 달게 그 비난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대조적이다.

류저우柳州·구이린桂林 작전에 반강제

아시아·태평양 전쟁기의 일본 군인들의 섹스 사정을 정리한 『전쟁과 성(兵隊と女)』라는 책이 있다. 南都長生이라고 이름을 붙인 필자의 자가 출판으로 보이는 수기이다. 판권장版權張[출판 책의 맨 끝 장에 인쇄 및 발행 날짜, 저작자ㆍ발행자의 주소와 성명 따위를 인쇄하고 인지를 붙인 종이]이 없어 기술 내용으로 보면 1965년 무렵에 발행되었다고 생각된다. 南都長生 이름으로 출판된 책은 달리 발견되지 않고, 쓰인 내용을 단서로 필자를 찾은 결과, 전 육군 군의관 나가오 고이치長尾五一이라고 판명했다.

만주사변 중인 1933년 3월 8일, 러허熱河성 장산곡長山谷이라는 장소에서, 박격포 공격으로 얼굴에 부상을 당했다는 『전쟁과 성』의 기술이, 육군성 『만주사변육군위생사 제3권』에 있는 나가오의 부상 상황과 일치하는 점, 『전쟁과 영양戰爭と榮養』이라는 제목의 책을 냈다는 南都長生의 기술이, 나가오가 『전쟁과 영양』(1955년 초판, 1994년 재판)을 저작한 사실과 부합하는 점 등이 근거이다. 『전쟁과 성』에 기록된 부대의 동향과 지명, 상황도, 공적인 기록과 『전쟁과 영양』에 보이는 나가오의 경력에 비추어 모순이 없다. 『전쟁과 성』은 세밀한 부분에 분명한 오류가 있지만, 서문에서 “실록을 중심으로”라고 적혀 있는 대로, 골격은 사실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나가오는 1931년 도쿄대학을 나와 군의관이 되며, 만주사변에 출동한 제8사단 보병 제32연대에 배속되어, 중국 대륙으로 건너갔다. 이후 전쟁터와 일본에서 군무를 거듭하며, 패전 당시는 군의관 중좌[중령]로 보인다.

전쟁 말기인 1944년, 중국 대륙을 거점으로 한 미군의 일본 본토 공습을 저지하기 위해, 일본군은 대륙타통작전大陸打通作戦[1944년 4월 17일부터 12월 10일 걸쳐서, 일본 육군에 의해 중국 대륙에서 행해진 작전]으로 불리는 중국 대륙 종단 작전에 출정했다. 그 일환으로 제6방면군 사령관 오카무라 야스지는 11군과 23군에게 중국 남부 구이린의 공략을 명해 11월에 11군이 130킬로 남쪽의 류저우와 함께 점령했다. 

중국 파견군 총사령부 소속이라는 입장에 있었던 나가오는, 『전쟁과 성』 속에서, 병사들의 영양 실조증과 감염증 등의 치료 지도를 위해 류저우, 구이린에 들어갔을 때의 상황을 설명한다.

류저우에서는 장교들의 살벌한 기분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위안소가 급조되어 있었다. 난민 속에서 좀 더 젊은 여성을 모아, 먹을 것을 주고, 공정요금으로 매춘을 시킨 것이다. 반강제적이어서, 여성들은 치욕으로 생각하고, 한층 반일 정신이 강한 광시성에서, 먹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여성들의 허망한 반항은 응대로 나타나고, 광시어를 판독하지 못하는 우리에게는, 공중화장실에서 배설하는 것과 같이 성감을 만족시키는 데 불과했다.

『전쟁과 영양』과, 육상자위대위생학교 『大東亞戰爭陸軍衛生史 卷九』의 기술로 보면, 나가오가 류저우에 들어간 것은 1945년 봄의 일로 보인다. 전란으로 국내 난민처럼 된 젊은 중국인 여성들을 모아, 식량이나 돈과 교환으로 군인들의 섹스 상대를 시켰다는 것이다. 나가오가 여성들의 모집 쪽에 대해 ‘반강제적’이라고 표현한 것인지, 위안소 운영 형태를 그렇게 표현한 것인지, 또는 두 가지 모두인지는 알 수 없다. 반항적인 태도였다는 여성들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굴욕적인 일이었을까.

회한의 정

나가오는 『전쟁과 성』 속에서, 군인의 섹스 실태를 자신의 체험을 섞어 적나라하게 기록하며, “전장의 고통을 체험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아련한 향수와 회한의 정을 금할 수 없는 바가 있을 것이다”라고 썼다. 전후 약 20년이 경과해 이 책을 저술하고, 1992년 8월 여든네 살로 세상을 떠난 나가오에게 회한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유트뷰어 갈무리
뉴스영상 갈무리

『전쟁과 영양』 재간행에 손을 댄 인물은, 독일 문학자이자 에세이스트로 지난 해 작고한 이케우치 오사무池內紀였다. 나가오는 이케우치 어머니의 오빠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윈 이케우치는, 젊은 시절 나가오를 아버지처럼 경모해 나라奈良에 사는 나가오를 자주 방문했다. 『전쟁과 성』의 일은 몰랐지만, 南都長生이라는 필명을 본 적이 있다고 그러께 내게 증언했다. 『전쟁과 영양』에서 군에 비판적인 내용을 써서, 전 군인들로부터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전쟁과 성』은 본명으로 출판하지 않았던 것이 아닐까, 지적했다. 전쟁의 어두운 부분을 두 권에 새겨 넣은 외숙부의 흉중을, 이케우치는 “스스로 전쟁에 매듭을 짓고 싶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명감이라고 생각한다”고 추측했다.

류저우에서 나가오에 대응한 11군 군의부 군의관 나가키 슌이치로永木俊一郞는, 전후 “류저우에서 지내는 동안, 사이판, 티니언의 패전을 알고, 드디어 우리도 류저우에서 버티는가라고 각오하고 있었다”고 회고한다.주15) 1944년 7~8월에 사이판섬, 티니언섬의 일본군 수비대가 각각 옥쇄한 사실을 알고, 전황의 불리함을 각오한 11군 병사들의 절망을 이야기한다. 그러께, 국립공문서관은 11군 임시군법회의가 1945년에 선고한 판결을 공개했다. 죄를 추궁당한 57명 가운데, 1/4인 14명이 전지戰地 강간, 전지 강간 미수 등 성폭력 사건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주16)

육군은 1942년 2월에 육군 형법을 개정하고, 전지 강간죄 규정을 마련했다. 그때까지는, 피해자 고소가 있는 경우에만, 일반 형법에 준거해 가해자인 군인에게 죄를 물었지만, 병사들에 의한 강간 다발로 시달리던 출정 부대 간부들의 요망이 잇따라 고소가 없어도 재판할 수 있도록 하고, 처벌도 무겁게 했다. 그런데도 강간이 근절되지 않았던 것이다.

폭력과 협박의 나날

류저우·구이린 작전을 둘러싸고,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도쿄재판)에, 나가나와長繩라는 일본 대위가 구이린에서 여성들을 모아 강제적으로 매춘을 시켰다고 호소하는 시민의 선서 진술서를 제출하고,주17) 판결에서 “구이린을 점령하는 동안, 일본군은 강간과 약탈 같은 모든 종류의 잔학 행위를 범했다. 공장을 설립한다는 구실로, 그들은 여공을 모집했다. 이리하여 모집된 부녀자들에게, 일본 군대를 위해 매춘을 강제했다”고 인정된 사실이 알려졌다.주18)

이 판결의 정당성을 묻는 질문주의서에 대해, 제1차 아베 신조 내각은 2007년 4월, 조약에 따라 재판을 수락했다고 하며, “국가와 국가의 관계에 있어서 이 재판에 대해 이의를 말한 입장은 아니다”고 답변서를 냈다.

구이린에서 위안부로 일본 병사들을 상대했다고 밝히고 나선 웨이샤오란韋紹蘭은 다큐멘터리 영화 『끝나지 않는 전쟁』(2008년, 감독 김동원) 속에서, 1944년 11월에 일본군에게 붙잡혀 6~7명의 여성들과 함께 위안소로 연행되어, 폭력과 협박을 받으면서 군인들을 상대했던 지옥 같은 나날을 증언한다. 가지무라 다이치로梶村太一郞·무라오카 다카미쓰村岡崇光·가스야 히로이치로糟谷廣一郞의 『‘위안부’ 강제 연행』에 수록된 가스야의 르포르타주에 따르면, 콘돔을 사용했다고 이야기한다. 파견 병사들에 의한 개인적 범죄로서의 강간이나 감금과는 확연히 양상이 다르다.

웨이샤오란은 일본 병사들에 의해 임신하게 되어, 위안소를 탈출한 후에 아들 뤄산쉐羅善學를 낳는다. 어머니에 의지해 고단한 인생을 보내는 뤄는, 영화 속에서, 일본 정부를 향해 인도주의에 기반한 행동과 사죄를 요구한다. 그의 바램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웨이샤오란은 지난 해 5월 5일 이 세상을 하직했다.

주14) 2000年一二月一日付朝日新聞朝刊
주15) 『大東亞戰爭陸軍衛生史 卷九』 95쪽
주16) 『判決原本綴 第十一軍 呂第五五0一部隊臨時軍法會議 昭和二0年度一月~七月』
주17) 『東京裁判 ― 性暴力關係資料』 205쪽
주18) 『極東國際軍事裁判速記錄 第一0卷』 77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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