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7회 上

위안부가 있었던 시대 – 7회 上
유린, 군기라는 이름하에

사토 쥰佐藤純
1965년생. 아사히신문 기자. 오사카경제법과대학 아시아 태평양연구센터 객원 연구원.
이 글은 2016~2018년 아사히신문 휴직 중의 조사를 바탕으로 썼다.

나는 중일전쟁에 종군했던 육군 군의관이 남겼다고 보이는 자료를 2015년에 고서점에서 입수했다. 그 가운데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은 일본군의 위안소·위안부에 관한 기술이 있었다.

군의관 이름은 미노베 료마美濃部龍馬. 러일전쟁이 시작된 1904년에 태어나 1930년에 군의관이 되어, 만주사변부터 태평양전쟁까지 종군했다. 군의관 중좌[중령]로 종전을 맞이했다. 다음 해 병역 해제로 귀향해 향리인 아오모리현에서 개업했다.

일련의 자료를 ‘미노베 자료’라고 부르기로 한다. 실로 철한 11권의 책으로 모두 357건의 문서가 철해져 있는 외에, 편철된 책이 한 권, 철해져 있지 않은 문서가 한 건 있다. 연월일이 있는 자료는 1933년부터 1943년까지의 자료였다. 실로 철한 책의 표지에 미노베의 도장이 찍혀 있는 책과 미노베 이름으로 나간 문서, 미노베가 수령인인 문서, 미노베가 소속된 부대의 문서가 있는데, 전장戰場이나 국내 근무지에서 미노베가 소지하고 있었던 자료들로 보인다. 타자로 찍은 것을 인쇄한 문서, 손으로 쓴 것을 인쇄한 문서 등이 혼재되어 있다.

문서 가운데 미노베의 동향이나 군 간부의 이름·직무, 부대 명칭이나 동향은, 『陸軍軍醫學校同窓會誌』 제1·3호에 있는 미노베의 경력이나 군의 공식 자료 등과 모순되지 않아, ‘미노베 자료’는 전체가 진짜라고 판단할 수 있다. 작성 시기와 내용이 확인되지 않는 자료도 포함되어 있다.

‘미노베 자료’ 가운데 제22사단 자료는 실로 철한 세 권이다. 22사단은 1938년에 설치되어, 쓰치하시 이치지土橋一次[1886~1954년]가 초대 사단장으로 취임했다. 미노베는 이 사단의 군의부에 배속되었다.

일본군이 1937년 12월에 중국 수도 난징을 공략하자,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는 우한武漢으로, 나아가 오지인 충칭重慶으로 수도를 옮겨 철저한 항전을 계속했다. 일본군은, 끝이 보이지 않는 전쟁에 결말을 지을 계기를 잡기 위해, 우한을 목표로 삼는다. 22사단은 이런 가운데 중국 중부 지역에 투입된다.

중국 중부 지역에 ‘특수 위안부인慰安婦人’ 2,000명

22사단 사령부는 1938년 7월에 도치기현栃木県 우쓰노미야시宇都宮市에서 출발 준비를 시작했다. 사단 군의 부장인 이노우에 후미오井上文夫는 각 부대의 군의관들을 소집해 행한 연설에서, 전장의 군인에게 성병이 다발하는 것에 대해, “황군의 혁혁한 전공 이면에는 또한 기피해야 할 성병 환자가 발생하고 있어, 그 때문에 전력 손실을 초래해 후방 국민의 열성에 대해 심히 부끄러운 바가 있다”고 경종을 울리고, 이제부터 향하는 중국 중부 지역 상황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화류병 예방법으로는, 중국 중부 지방 파견군 관할 구역에 있는 특수위안부인特殊慰安婦人은 5월 말 현재 일본·조선·중국인을 합해 약 2천 명에 달하고, 각 지역마다 병참 또는 야전 사단에서 매독 검사를 실시하며, 경영자로 하여금 조합을 조직하게 하여, 이 조합에 의해 매독 감염 부인은 일정한 장소에 격리 수용해 치료하도록 지도하고 있으나, 제대로 실시되지 않다는 것, 조합 조직이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 등이 있으며, 매독 검사 성적成績 이용이 완전하지 않을 우려가 있을 뿐만 아니라 주1) (생략)

‘특수위안부인’은 군 위안부를 가리키는 것이 문맥상 분명하다. 같은 해 10월 말 현재로 중국 중부 지역의 조선인 위안부를 약 1,000명으로 본 조선총독부의 기록을 바로 앞 연재에서 봤는데, 그 5개월 전 정보로 일본인, 조선인, 중국인의 합계가 약 2천 명이라는 숫자를 들고 있는 점, 이 여성들이 중국 중부 지역 파견군 관할 지역에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점이 주목된다. 더욱이 군이 여성들의 성병 검사를 하고, 업자에게 조합을 만들게 해 통제하는 방침을 취하고 있는 점, 그렇지만, 그런 것들이 반드시 잘 진행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정보는, 위안소와 성병 대책 준비에 활용하기 위해, 파견군으로부터 직접 또는 간접으로 22사단에 전달된 것으로 보인다.

22사단은 1938년 8월에 상하이로 건너가, 항저우 등의 경비를 담당했다. 군의부장 이노우에는 부하 군의관이나 위생병들에게, 특수 위안소 취급 내규가 따로 제시되리라는 전망을 한 후에, 경비대장이 허가한 특수 위안소에서는 주 1회 이상 성병 검사를 하고, 성병으로 판명된 여성을 병사 곁에 얼씬거리지 못하게 할 것, 새로 영업하려고 하는 여성에게 허가를 주기 전에 검사할 것, 적극적 예방법을 강구할 것, 상습적으로 매춘을 하는 병사를 파악해 둘 것을 지시했다. 주2)

위안부를 하는 여성의 중국 도항을 군과 기타 정부 기관이 조직적으로 통제하려고 한 것을 바로 앞 연재에서 봤는데, 거기에 더해 중국에 도착한 여성들을 군이 한 명 한 명 검사해 허가 여부를 결정한다는 이노우에의 지시를 보면, 위안부는 이중 삼중의 통제 아래 놓여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성을 속이거나, 직업을 위장하거나 하여 데리고 온다는, 바로 앞의 연재에서 본 범죄적 수법이 22사단 관리 지역에서 행해졌는지 여부는, ‘미노베 자료’에서는 알 수 없다.

장기전을 겨냥하며

‘미노베 자료’ 가운데, 「항저우 특수 위안부 업무에 관한 내규杭州特殊慰安婦業務ニ関スル內規」라고 제목을 단 문서가 있다. 1938년 9월 6일자로 22사단 사령부 이름으로 되어 있는데, 연필로 쓴 자필 글씨이고, 문구 수정이나 추기가 되어 있는 점에서, 검토 단계의 문서라고 여겨진다. ‘22사특수위안제2호二二師特慰第二號’라는 문서 번호가 부여되어 있고, 배하配下 부대로 출발하는 구체적 예정에 바탕해 작성된 문서일 가능성이 있다.

주목되는 것은 제1조다. ‘특수위안업무特殊慰安業務’의 근거 규정으로, 이 내규와 다음의 세 개 문서를 들고 있다.

 ○ 중지中支(중국 중부지역)특위特慰 제15호 「중지中支 파견군 특수위안업무에 관한 내규」
 ○ 중지특위 제16호 「중지 파견군 직할 관구管區 내 특수위안업무에 관한 내규」
 ○ 22사 특위 제1호 「제22사단 경비지구 내 특수위안업무에 관한 내규」

22사단 제1호의 내규만이 아니라, 중지 파견군이 이 시점까지 위안소·위안부에 관해 16건이나 되는 문서를 내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 문서들이 실재하고,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면, 위안소 제도가 확립, 정착되는 시기의 중국 중부지역 파견군의 역할을 구체적으로 밝히는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될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미노베 자료’에는 16건의 파견군 문서가 없다. 22사단 특위特慰 제1호 문서도 없다. 나는 파견군에 딸려 있던 몇 개 부대의 기록과 대조해 보았지만, 지금으로서는 찾을 수 없다. 1938년 10월 무렵, 중국 중부지역 파견군 배하에는 적어도 13개의 사단과 2개의 여단이 있으며, 이들 사단과 여단 아래 더 많은 부대가 있었다. 계속 찾을 만한 가치가 있을 듯하다.

항저우 내규에는,
“항저우 특수 위안소는 이미 보통 영업으로 이관한 항저우 위안소조합에 속한 다음의 위안소로 한다”(2조),  
“영업소 폐지 또는 신설 및 특수부인의 증감 등에 관해서는, 영사관에서 이들이 통보받는 것으로 한다”(14조)와 같은 조문이 있다. 위안소 운영과 통제 형태가 변화해 가는 것을 시사한다.

중국 중부지역 파견군은 당면 목표였던 우한을 1938년 10월 하순에 함락했다. 11월 8일에 파견군 군의부장 사사이 히데히로笹井秀恕가 낸 「우한 공략전攻略戰 후의 위생 근무에 관한 건 지시」가, ‘미노베 자료’ 안에 있다. 22사단은 우한 공략전에 직접 참가하지는 않지만, 파견군이 배하의 모든 부대에 지시를 낸 것이라고 하면, 나름 타당하다. 

사사이는 말한다.
“위안소에 관해서는, 지방 관헌으로 하여금 감독하게 하는 것은 군의 방침이지만, 현재의 과도기에서는, 당분간 이들에 대한 관리는 병참 사령부의 업무로 하도록 지도하고 있다.”

‘지방’이란 군 외부라는 의미이며, 여기서 말하는 ‘지방 관헌’은 각지에 있는 일본 영사관의 경찰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점령 직후의 지역에서는 군이 주도해 위안소를 설치하고, 상황이 안정되면 영사관 경찰을 끌어들여 관리를 시킨다는 중일전쟁 시기의 군의 자세는, 그 이전의 외무성 기록이나, 앞에서 본 항저우 내규에도 드러나지만, 이해에 군의관 중장으로 승진하는 사사이의 말은, 이 시기까지의 공식 기록으로 볼 수 있는 기술記述로, 가장 고위직 군인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한까지 공격해 들어가지만, 전쟁의 출구가 예견되지 않는 가운데, 귀찮은 일을 영사관에 하청을 주어, 군의 부담을 경감시키면서, 위안소를 유지해 간다는 생각을 파악할 수 있다.

군의 명령

한커우漢口, 우창武昌, 한양漢陽으로 이루어진 우한은 난징 남서쪽 약 480킬로미터 거리에 있다. 양쯔강 중류에 있는 이 대도시를 노린 중국 중부지역 파견군 사령관 하타 슌로쿠畑俊六는 1938년 7월 14일, 오카무라 야스지岡村寧次가 지휘하는 제11군에 양쯔강 연안에 있는 한커우로 향하는 작전을, 히가시쿠니 나루히코東久邇稔彦가 사령관을 재임하는 제2군에 한커우 북쪽으로의 작전을 명했다. 히가시쿠니는 패전 직후에 수상을 맡게 되는 황족이다.

제1차 상하이 사변에서 상하이 파견군 참모부장副將으로 육군 최초의 위안소를 만든 오카무라는, 관동군 참모부장, 제2사단장 등을 거쳐 11군 사령관이 되었다. 중국 중부지역으로 부임하기 직전, 도쿄에서, “난징 공략전에서는 대폭행이 이루어졌다는 소문을 듣고, 그런 전과들이 있는 부대를 이끌고 우한 공략에 임하는 것이어서, 대를 위해 군, 풍기 유지에 노력해야겠다고 각오를 다졌다”고 한다. 주3) 그러나 우한으로 향하는 도중, 부하인 군인들에 의한 강간과 약탈이 전과 같이 빈발했다. 오카무라는 격노해 대책에 골머리를 앓으며, “제6사단처럼 위안부단團을 동행하지만, 강간죄는 근절할 수 없는 형편이다”라고 한탄했다. 주4)

오카무라를 보좌하는 11군 참모장 요시모토 데이이치吉本貞一는, 우한 남동쪽 220킬로미터 남짓한 주장九江에 있던 1938년 9월 15일, 파견군 참모장 가와베 마사카즈河邊正三에게, 현지 치안과 질서가 회복되어, “음식점, 여관, 특종特種 위안소 등의 개점 시기時機가 도래했다고 인정한다”고 하며, 닛신키센日清汽船(청나라 말기부터 중화민국 시기에 걸쳐 중국에서 선박을 운항했던 일본 기업)을 항행하도록 하고, 일본인의 영업 재개를 도모하도록 요망했다.주5) 당연히 오카무라에게도 말을 전했을 것이다. 요시모토의 요망과의 관계는 알 수 없지만, 재난징총영사관의 보고에 따르면, 11월 1일 현재, 주장에 일본인 위안소 15곳, 조선인 위안소가 9곳이 있으며, 위안부가 각각 107명, 143명 있었다.주6) 재주장영사관이 재개된 12월 1일 시점에서, 체류 일본인 557명의 대부분이 군을 상대로 장사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가운데 40%, 약 230명이 ‘특종特種 부인婦人’, 바로 위안부로, 영사관 경찰은 “군의 명령에 따라 이동해 머물 수 있는 상태”라고 기록한다. 주7) 여성들은 군의 명령을 받는 입장이었다는 것이다.

장교가 앞장서서

중국 중부지역 파견군은 이 무렵 이미 우한을 함락했다. 당초 2군과 11군은 지역을 나눠 병력을 배치하고, 1938년 12월에 2군 부대가 11군의 배하로 이동되었다. 2군 참모부 소속이었던 요시하시 가이조吉橋戒三는, 위안소 개설을 준비한 경위를 일기에 써서 남긴다.주8)

요시하시는 1938년 10월 29일에 한커우에 들어갔다. 11월 1일 무렵 난외에, “낭자군의 배로 한커우로 보내졌다. 그 신속함에 놀랐다”라고 있다.주9) 2군의 한커우·한양 경비 사령부에 투입된 요시하시는, 5일에 사령관 히가시쿠니로부터 “그곳은 상당히 시끄러운 곳이니까, 열심히 노력해 실수가 없도록 하라”는 말을 들었다고 적었다. 외국의 조계와 외국인의 권익이 있는 고장의 특색에 유의해 병사들의 불상사를 방지하라고 명령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위안소라는 기술記述이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38년 11월 19일. 요시하시가 시찰한 바, 아직 개설을 허가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놀고 있는 자가 있었다. 요시하시는 위안소 흙벽에 뚫려 있는 구멍을 발견하고,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고 한탄했다. 안쪽을 엿보기 위한 구멍일까, 몰래 드나들기 위한 구멍일까, 확연하지 않았다. 며칠 후 다시 조사한 바, 허가 전 위안소를 부정하게 이용한 자가 35명이나 있고, 그 가운데 15명이 대좌[대령]을 포함한 장교였던 사실이 판명되어, 요시하시는 “생각이 마비될 정도로 어안이 벙벙했다”고 기록했다. 다른 담당자가 업자들을 불러 일갈했다. 한커우 위안소는 처음부터 군이 의도한 통제가 이루어지지 않았던 듯하다.

요시하시는, 위안소 업자의 진정 공세에 봉착(11월 21일), 위안소에 관한 방침을 검토, 규정을 완성하고(22일), ‘위안소 허가증’을 배부(24일), 개업하게 했다(25일). 첫날 이용자는 300명.
“아직 장교 구락부가 없어, 상당히 어려운 문제가 있다”고 적고 있어, 장교용 위안 대책에도 고민한 것을 알 수 있다.

1938년 11월 말 현재 2군과 11군의 인원은 133,000명 남짓. 두 군의 기록에 따르면, 위안소 개업에 즈음해, “혼잡을 방지하고, 따라서 황군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 티켓 제도를 채용했다. 병사들이 위안소 밖까지 줄을 지어, 주민에게 추태를 드러내는 사태를 피하려고 한 것이다. 두 군의 군법 회의는, 12월 6일까지 약 세 달 동안 강간 24명을 합한 모두 147명의 범죄를 수리했다.

“전장을 전전하며 주둔하는 군이 그 기간이 오래되자, 범죄 경향은 증가하고, 계속 내용이 악화되고 있다”는 상황 속에서, 위안소에는 범죄를 줄일 효과도 기대되고 있었다고 보인다. 주10)

요시하시가 준비한 두 군의 위안소 개업 이틀 후, 11군 사령관 오카무라의 심복으로 군기·풍기도 담당하는 참모 이마자키 슈이치宮崎周一는 “특종 위안소는 유곽식으로 집결한다”고 기록했다. 주11) 일본 현지 유곽처럼 위안소를 일정 구획으로 집약해, 업자와 여성, 출입하는 군인들의 관리, 단속을 하기 쉽게 하는 방법을 채용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두 군의 위안소와 같은 것을 지칭하는 것인가는 분명하지 않다.

재한커우총영사관의 조사에서는, 1938년 11월 현재, 한커우와 우창의 예기, 작부, 창기 들은 합계 395명, 주12) 12월 말의 예기, 작부는 492명이었다. 주13) 이 숫자는 일본인과 조선인의 합계로 보이며, 상당수가 군 위안부였다고 생각된다. < 下 계속>

주1) 「昭和十三年七月醫官會同席上ニ於ケル軍醫部長口演要旨」, ‘美濃部資料’
주2) 「花柳病豫防ニ關スル細部ノ指示」, ‘美濃部資料’
주3) 『岡村寧次大將資料 上卷』, 290쪽
주4) 『岡村寧次大將資料 上卷』, 303쪽
주5) 「地方人の九江に於ける一般營業の促進及日淸汽船九江航行に關する件」『支受大日記(密)其五八 七三冊の內 昭和一三年十月二六日』(アジア歷史資料センター. 以下‘アジ歷’)
주6) 「九江在留邦人職業別人口統計表提出ノ件」『政府調査 ‘從軍慰安婦’關係資料集成①』 569쪽
주7) 『外務省警察史』(復刻板) 第四九卷 91쪽
주8) 『吉橋戒三日記 第二卷』(防衛省防衛硏究所戰史硏究センター所藏)
주9) 요시하시는 같은 취지의 말을,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 제출한 선서 진술서 안에서도 말한다. 「法廷證第二五五一號 : 宣誓口供書」 『聯合國最高司令部總司令部國際檢察局文書』(國會圖書館所藏)
주10) 『第二軍狀況槪要 昭和一三年一二月十日』(アジ歷)
주11) 『第一一軍漢口攻略戰に關する覺 昭和一三年一一月一八日~一四年 一月二二日(アジ歷)
주12) 「本邦人職業別表送附ノ件 『政府照査  ‘從軍慰安婦’ 關係資料集成①』 561쪽
주13) 「昭和十三年在漢口總領事館警察事務狀況」『政府照査  ‘從軍慰安婦’ 關係資料集成①』4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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