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민숙 평창동 가나아트포럼스페이스 초대전

내면을 드라마처럼 화폭에 펼쳐내...팬덤 형성

 

[뉴스프리존=편완식 기자] 장민숙 작가의 시작은 풍경화였다. 그림 같은 집들이 나무들 사이에 파스텔톤 색체로 펼쳐져 있었다. 줌으로 당긴듯하게 그려진 집들은 투박하지만 곱고 아련하다. 작가는 밖은 고요한데 속이 시끄러운 그림을 그린다. 그림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현장이나 무대처럼 보이는 것이다. 어떤 그림에서는 동네의 집들이 서로 대화를 주고 받고 있는 듯이 보이며, 또 어떤 그림은 감정을 격정으로 표현하고 있는 듯하다.

특히 2018~2019년 색면 추상처럼 그린 그림에서는 각 면들이 마치 보고 있는 여느 드라마 주인공의 감정이나 성격으로 다가온다. 보면 볼수록 놀라운 작업과정이다. 풍경에서 추상으로 이어지는 연결이나 이행이 이토록 순차적이면서 자연스런 작가는 한국에선 좀처럼 보기 어렵다. 심리학을 전공한 작가답게 ‘내면의 자아’를 처절하게 부여잡은 작업의 결과물이다.

창작은 두 개념이 만나는데서 시작되게 마련이다. 집이라는 공간과 자아를 담는 공간이 은유적으로 만나면서 연결이되고 제3의 새로운 것이 만들어지게 된다. 마치 코로나 사태에서 검사와 서비스라는 개념이 만나서 새로운 드라이브스루가 탄생한것과 같다. 작가는 바위절벽이 바닷물에 수많은 세월동안 깍여 풍경을 이루듯 자신을 조탁해 나름의 풍경을 만들어 가는 작가다. 29일부터 6월 11일까지 평창동 가나아트 포럼스페이스에서 열리는 장민숙 초대전은 이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자리다.

라깡은 “예술가는 그림에서 ‘응시로서’ 자신을 보이며, 자신을 그림으로 만드는 존재”라고 했다. 현대미술은 특정한 형식 보다는 생산자의 주체성을 더욱 중요시 여긴다. 자아의 정체성은 이미지의 반복을 통하여 모방적 재현을 넘어서게 해준다. 장민숙 작가의 작업이 그렇다.

작가의 작업노트는 이를 엿보게 해준다. ‘바위 절벽이 수많은 세월속 바닷물에 깍여 나가야만 비로서 풍경을 이루듯/ 색색의 그 많던 집들은 다 지워지고...//나의 그림 속,/그 수 많은 집들은/ 그만큼이나 많았던 내 안의 나였다.//혼자 있을 때, /누군가와 함께일 때 ,/역할에 따라, /시간과 장소에 따라 / 다른나를 만나게되는 나는 당황스러웠다./그래서 나는 내가 늘 힘들었고 부끄러웠고 한껏 주눅이 들었다가 들떴다가 엉뚱하고 무모하고...//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바라보는 나는 언제나 달랐다./그래서 사람들을 만나고 오는 날은 너무 기진맥진 했고, 불쑥 나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대해선 오랫동안 후회하거나 자책했다./각각의 견고한 벽을 가진 집들의 골목골목을/ 나는 참 오래도록 방황하고 헤매었다.//낡고 오래된 집의 벽에는/그 안에서 살아가면서 겪는 행복과 불행, 사랑과 고통으로 견딘 시간의 집적,질긴 삶의 냄새가 고스란히 베여있는 것 같다./나의 그림 속 집들은 /그 많은 기억들을, 상처를, 기쁨을 다 기록한 자화상이다./나를 부끄러워 한 만큼 내 그림들을 부끄러워 했다.//그 ‘많은 나’중에서 나를 찾기 위해서 물리적 격리, 의도적 소외가 절실했다./그건 어쩌면 살고자하는 본능적 요구였다./결국, 그림은 핑계거리인지도 모른다.//끊임없이 버리는 기나긴 과정,/비약과 후퇴의 반복,/내 이상의 것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그 오랜 집중의 시간들이 내가 아닌 나를 조금씩 지워나가게 만들었다./참으로 감사한 치유의 과정이었다.//그 견고한 벽들을 허물고 /오래 머물 수 있는 나의 공간을 /나는 스스로 만들었다./중요한 것은 오로지 작품을 만드는 과정, 그 순간을 살며 느끼는 것이다.‘

김웅기 평론가는 장민숙 작가의 작품을 ’풍경을 풍경으로 해체하는 추상‘으로 설명했다. 집들이 점차 사람처럼 보이면서, 창문과 현관으로 집안의 불빛과 집 외벽의 질감과 색으로 집의 성격이 느껴져, 작품을 보면서 웃기도 하고, 조금 우울해 지기도 하며, 약간 슬퍼지기도 했다고 평했다. 김 평론가는 이어 “ 보면 볼수록 점점 더 좋아져서 놀랄 정도였다. 풍경에서 추상으로 이어지는 연결이나 이행이 자연스러워서뿐만 아니라 풍경이나 추상이 다 특정 계기를 통해서 만들어진 지각양태라는 것을 이렇게 순수하게 순차적으로 구현했다는 것은 놀랍다”고 덧붙였다.

풍경을 극단적으로 밀고 나가면 풍경을 풍경으로 발견하고 결정한 ’내적 인간‘의 지각양태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장민숙의 풍경은 그것을 우아하게 보여준다. 띄엄띄엄 나무 사이로 예쁘게 자리 잡은 집들이 점점 중첩되면서 서로 이질화되고, 배경은 점차 붕괴되어 간다. 비슷하게 보이던 집들을 서로 모아서 포개고 겹치면서 다르게 보이기 시작하고 이전에 보이지 않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배경과 형상 사이에 존재하던 강력한 경계가 사라지면서 이분법적 구도가 탈피된다. 새로운 추상의 탄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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