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묘지 논란 백선엽, 친일·반민족행적 반성했나?
자서전서 만주군 간도특설대 활동 인정했지만 명확한 반성은 없어

올해로 만 100세를 맞은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최근 건강이 좋지 않다는 사실이 알려진 가운데, 그가 사망할 경우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것이 적절한지를 두고 논란이 일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 전력 때문이다.

한국전쟁 초기 전세를 역전하는 계기가 된 '낙동강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끈 무훈 등으로 2차례 태극무공훈장을 받은 백 전 장군은 사망 후 국립묘지법 5조에 따라 국립서울현충원이나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자격을 갖춘 상태다.

이외에 '평양전투'와 '중공군 춘계공세 저지' 등 한국전쟁 중 '구국의 영웅'으로 칭송받을 만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바 있다.

이에 따라 보훈처는 백 전 장군이 사망하면 여분의 장군묘역 자리가 없는 서울현충원 대신 대전현충원에 묘역을 조성한다는 입장이다.

논란은 최근 여권 일각에서 국립현충원에 안장된 친일 반민족 행위자를 다른 곳으로 이장하는 내용의 국립묘지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불거졌다. 이 내용대로 법 개정이 이뤄지면 전쟁영웅으로 추앙받는 백 전 장군과 같은 인물도 국립묘지에 더는 안장될 수 없게 될 수 있다.

'구국의 영웅'과 '친일·반민족 행위자'라는 두 수식어가 병존하는 백 전 장군을 국립묘지에 안장하는 데 대해 찬반 양론이 맞서면서 그의 친일행적도 재조명받고 있다.
그는 2차대전 당시 조선인 독립군 토벌로 악명 높은 만주군 육군 휘하 '간도특설대'에서 1943년부터 1945년까지 장교로 복무한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백 전 장군은 1943년 2월 간도특설대의 일원으로서 압록강, 두만강 상류 일대에서 중국 항일 게릴라 토벌에 종사했다. 당시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항일 게릴라에는 중국인, 만주인과 함께 조선인도 포함돼 있었다.

백 전 장군은 1944년 봄, 팔로군(八路軍·1937∼1945년 일본군에 맞선 중국공산당의 주력부대 중 하나) 토벌 작전에 참가해 정보수집에서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여단장 상을 받기도 했다.
그는 자신이 간도특설대에 몸담았던 시절에는 독립군과 싸운 적 없다고 했지만 간도특설대 자체는 '조선인 독립군은 조선인으로 잡아야 한다'는 일제 방침에 따라 조직된 특수부대였다.

특히 간도특설대는 백 전 장군이 몸담기 전인 1939년 천보산 전투에서 '동북항일연군'과 교전을 벌인 후 포로로 잡힌 독립군을 고문·살해한 부대로 알려져 있다.

친일·반민족 행위를 조사·연구하는 시민단체인 민족문제연구소가 2009년 출간한 친일인명사전의 백 전 장군 관련 기술은 다음과 같다.

"만주국이 초급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중앙육군훈련처에 1940년 3월 입학해서 1942년 12월 졸업하고, 1943년 4월 만주국군 소위로 임관했다. 자무쓰 부대를 거쳐 간도특설대에서 근무했다. 1943년 12월 러허성(熱河省·지금의 허베이·랴오닝성 및 네이멍구자치구의 경계지점에 위치했던 옛 중국 행정구역)에서 간도특설대 소속으로 팔로군 공격작전에 참가했다. 일제 패망 당시 만주국군 중위였다."
이어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을 발표하면서 '간도특설대에서 항일세력을 탄압'했다는 이유로 백 전 장군을 포함했다.

당시 백 전 장군은 "직접 독립군 토벌에는 참여하지 않았다"며 이의를 제기했지만, 위원회는 근거 자료가 없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처럼 '구국영웅'과 '친일·반민족행위자'라는 명암이 존재하는 백 전 장군의 국립묘지 안장 논란이 불거진 상황에서 또 하나 주목할 부분은 그가 과거의 친일 행적에 대해 자서전에서 어떻게 기술했는지와, 사죄 및 반성을 표명했는지 여부다.

백 전 장군은 국내에서 출간한 두 권의 자서전에서 간도특설대 복무 사실을 서술했지만, 이를 명확히 반성하거나 사죄하는 내용은 담지 않았다.

그는 1990년 국내서 출간한 자서전 '군과 나'에서 간도특설대에서 3년 동안 복무하다 소련군에 진압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책에는 "봉천 만주군관학교를 마치고 1942년 봄 임관하여 자므스부대에서 1년간 복무한 후 간도 특설부대 한인부대로 전출, 3년을 근무하던 중 해방을 맞았다"고 적었다.

또 1992년 국내서 출간한 자서전 '실록 지리산'에는 만주군 시절 익혔던 바를 지리산 빨치산 토벌전에 활용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책에는 "일제 말기 만군에 잠시 몸을 담았던 시절 나는 '죽이지 말라, 태우지 말라, 능욕하지 말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그때 이후 나는 게릴라 토벌은 민심을 얻어야만 성공한다는 점을 항상 마음속에 새기고 있었다"고 적었다.

간도특설대 복무 사실을 간단히 언급한 정도에 그쳤던 국내 출간 자서전과 달리 일본에서 출간한 책에선 간도특설대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기록했다. 1983년 일본에서 출간한 '대(對) 게릴라전-미국은 왜 졌는가'라는 책에선 간도특설대 활동이 반민족 행위였음을 시인하는 뉘앙스와 함께 합리화 시도로 여겨질 수 있는 기술도 담았다.

민족문제연구소에 따르면 백 전 장군은 이 책의 한 장인 '간도특설대의 비밀' 본문에서 "장래를 위한 군사적 지식을 습득하는 것이라고 자각하고, 유일한 한국인 무장집단에 근무하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고 썼다.

그러면서 "소규모이면서도 군기가 잡혀 있는 부대였기에 게릴라를 상대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던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우리들이 추격했던 게릴라 중에는 많은 조선인이 섞여 있었다. 주의주장이 다르다고 해도 한국인이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었던 한국인을 토벌한 것이기 때문에 이이제이(以夷制夷)를 내세운 일본의 책략에 완전히 빠져든 형국이었다"고 썼다.

이어 "그러나 우리가 전력을 다해 토벌했기 때문에 한국의 독립이 늦어졌던 것도 아닐 것이고, 우리가 배반하고 오히려 게릴라가 되어 싸웠더라면 독립이 빨라졌다라고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적었다.

백 전 장군은 "그렇다 하더라도 동포에게 총을 겨눈 것은 사실이었고, 비판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며 "주의주장이야 어찌되었건 간에 민중을 위해 한시라도 빨리 평화로운 생활을 하도록 해주는 것이 칼을 쥐고 있는 자의 사명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고 서술했다.

한편, '직접 독립군과 싸운 적은 없다'는 백 전 장군 주장과 관련, 일단 간도특설대는 1941년 동북항일연군이 사실상 궤멸한 뒤로는 독립군과 이렇다 할 전투를 치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1943년 12월 중국 러허성으로 부대가 이동해 주로 중국 팔로군과 전투를 치렀던 것으로 알려진다.

단, 백 전 장군 복무시절인 1944년 7월과 9월, 11월 간도특설대가 무고한 조선인 등을 살해하거나 식량을 강탈했다는 등의 기록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중국조선민족발자취 총서'에 소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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