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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人物論(13), 外柔內剛의 柔道 皇帝 '유수 (劉秀)'-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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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人物論(13), 外柔內剛의 柔道 皇帝 '유수 (劉秀)'-下
유연함으로 강경함을 제압 천하를 다스리다
  • 이정랑 (논설위원, 중국고전 평론)
  • 승인 2020.06.03 16: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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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일을 이루기 위해서 작은 원한은 잊어야 했다.

후한의 시조 광무제 유수(劉秀.-BC 6~57, 재위 25~27)/출처:네이버 백과사전
후한의 시조 광무제 유수(劉秀.-BC 6~57, 재위 25~27)/출처:네이버 백과사전

유수는 부드러움이 강경함을 제압할 수 있고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길 수 있다고 판단하여 넉넉하고 부드러운 ‘덕정(德政)’으로 군심(軍心)을 사로잡았고, 형벌로써 권위를 세우는 일을 최대한 피했다. 이 점은 기의군 장수들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동마 기의군이 투항했을 때 유수는 그 우두머리를 제후로 봉했으나 유수의 한 군 장수들은 그들에 대해 마음을 놓지 못했다. 현지의 민중인 이들이 살육이나 약탈을 당할 경우, 다시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동마 기의군의 병사들 또한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나라 군대의 신임을 얻지 못할 경우, 목숨을 부지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런 상황에서 유수는 한조 장수들을 각자의 군영으로 돌려보낸 다음 혼자서 말을 타고 동마 군영으로 가서 그들과 함께 군사 훈련을 도왔다. 자신들을 진심으로 대하는 초왕(肖王.-유수를 가리킴)의 태도에 감동한 동마의 군사들은 유수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다짐했다. 유수는 군사 훈련을 마친 다음, 이들을 필요한 군영에 배치했고, 이들은 자신들에 대한 신임에 만족하여 유수를 ‘동마제(銅馬帝)’라 칭했다.

왕랑이 멸망한 후, 병사들은 왕랑의 처소에서 유수를 비난하는 수많은 사람을 발견했다. 이를 철저하게 조사할 경우 수많은 사람이 도주와 모반이 일어날 가능성이 매우 켰다. 유수는 이 서찰들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당장 태워버리라고 지시함으로써 자신에게 반대하는 세력을 안심시킨 다음, 이들의 마음을 돌려 충성을 다하는 지지 세력으로 변화시켰다.
서기 25년, 유수의 세력은 매우 강해졌고, 때마침 관중으로부터 자신을 황제로 인정하는 적복부(赤伏符)를 전달받았다. 그리하여 유수는 모든 장수의 추대와 축하를 받으며 황제의 자리에 올랐고 연호를 건무(建武)라 했다. 황제가 되자마자 기존의 농민 기의군과 천하를 다투게 된 그는 유연함으로 천하를 다스리겠다는 사상을 철저하게 관철, 그 결과 빠른 속도로 승리의 행진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가 낙양을 가볍게 손에 넣을 수 있었던 것이 바로 유도 사상의 전형적인 성공 사례이다. 당시 낙양 성지는 이철(李鐵)과 주유(朱鮪)가 군사 30만을 보유하여 견고하게 지키고 있었다. 유수는 먼저 이간질을 하여 주유로 하여 이철을 살해하게 한 다음 사신을 보내 주유의 투항을 권유했다. 그러나 유수의 형을 살해하는 음모에 가담했던 주유는 보복을 두려워하여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유수는 큰일을 이루려면 작은 원한은 잊어야 한다는 자신의 견해를 밝히면서 순순히 투항할 경우 과거의 죄를 따지지 않고 현재의 작위도 그대로 보전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주유가 투항하자 그는 약속을 지켜 주유를 후하게 예우했다.

“그대들은 과거에 무도한 행위를 서슴지 않았고 가는 곳마다 노인과 부녀자들을 살육했으며 민가와 마을을 초토로 만들었소. 하지만 그대들에게도 세 가지 훌륭한 일이 있었소. 첫째, 마을을 파괴하며 각지를 휩쓸고 다니면서도 자신의 처자식들을 저버리지 않았고 둘째, 유씨 종실을 군주로 모셨으며 셋째, 다른 세력들은 스스로 군주를 세웠다가 위급한 상황에 이르면 제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군주의 목을 베고 투항해왔지만, 그대들은 유분자의 목을 베지 않고 내게 넘겨주었소.”

유수는 이들에게 처자식들과 함께 낙양에 거주하도록 배려하고 집과 땅까지 하사했다. 이처럼 유수는 항상 사람들의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고 이를 격려하는 태도를 유지했다.

유수는 법제를 가볍게 하고 형벌을 완화 시키는 대신 상록을 후하게 하여 민심의 결속을 도모했다. 그는 공신들에게 주는 토지를 백 리로 제한하던 제도를 폐지하면서 나라의 멸망이 토지에 의한 것이 아님을 지적했다. 그 결과 그가 나누어준 식읍은 최고 6현에 이르기도 했다. 형벌에 있어도 불가피한 경우에만 처벌하되 형량도 최대한 가볍게 했으며 장수를 사형에 처하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등우는 이러한 유수의 덕치에 대해 “군정은 엄숙하면서도 질서정연했고, 상벌은 엄격하면서도 공정했다.”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중국 역사에는 ‘새가 떨어지면 양궁을 감추고, 토끼를 잡은 다음에는 사냥개를 삶아 먹듯이 적국이 사라지면 모사를 죽이는(飛鳥滅 良弓藏 狡免死 走狗烹 敵國滅 謀臣亡)’ 사례가 비일비재했지만 유독 후한의 개국 공신들은 하나같이 천수를 다하면서 유종의 미를 거두었던 사실을 보면 유수의 유도치세(柔道治世)는 후대의 제왕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임이 틀림없다.

유수는 유연함의 도를 극대화하여 활용한 인물이었다. 유연함의 효용에 대해서는 일찍이 『노자』에 기술된 바 있으며, 한나라의 유향이 『설원』에 기록한 한평자(韓平子)와 숙향(叔向)의 대화 또한 깊은 의미가 있다. 한평자가 숙향에게 강경함과 부드러움 중에 어느 것이 더 견고한지를 묻자 숙향이 대답했다.

“내 나이 이미 여든이라 이는 다 빠졌지만, 혀는 아직도 멀쩡하오. 노자는 일찍이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약한 것으로 가장 견고한 것을 뚫을 수 있다고 했지요.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매우 부드럽고 유약하지만 죽은 후에는 아주 단단하게 변하는 법이오. 만물 초목도 살아 있을 때는 부드럽고 연약하지만 죽은 후에는 시들기 마련이지요. 부드럽고 약한 것은 살아 있지만 강하고 단단한 것은 이미 죽은 것이오. 살아 있을 때는 망가 저도 회복이 가능하지만 죽은 후에는 한 번 망가지면 계속 망가지게 되지요. 때문에, 부드럽고 유약한 것이 강경한 것보다 훨씬 더 견고한 것이오.”

한평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다시 물었다.
“그럼 선생께서는 유도와 강도 가운데 어떤 것을 따르십니까?”

“살아 있는 내가 왜 강한 것을 따르겠소? 부드럽고 약한 것은 쉽게 부러지지도 않고 모서리에 부딪혀도 깨지지 않으니 실은 약한 것이 아니지요. 하늘의 듯은 연약함에서 강함을 얻어내는 데 있소. 때문에, 군대가 서로 겨루게 되면 유약한 쪽이 이기기 마련이고 두 사람이 이익을 다툴 때도 유약한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얻게 되지요. 『역경』에서도 ‘천상(天象)의 법칙은 자만을 줄여 겸허함을 더해주고 지상(地象)의 법칙은 자만을 겸허함으로 변화시킨다. 귀신이 자만에 재앙을 내리고 겸허함에 복을 내리는 것처럼 인간세상의 법칙도 오만을 싫어하고 겸손을 좋아한다.’라고 지적한 바 있소. 겸손하여 자만하지 않는다면 비록 부드럽고 유약하다 하더라도 천지 귀신의 도움을 얻을 수 있으니 뜻을 이루지 못할 리가 없지요.”

한평자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유수는 ‘유도’로 후한을 세워 흥성한 국가로 발전시키면서 잔인한 살육을 피하고 덕이 있는 정치를 펴 군사와 정치, 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원만한 치세를 이룩했다. 조조가 간사하고 잔인함으로 성공한 데 비해 유수는 부드러움의 도로써 천하를 얻었다. 이점으로 미루어 볼 때 유가와 도가의 학문은 결코, 진부한 공론이 아니다. 적절하게 활용하기만 한다면 다른 어떤 지략보다도 효과적인 치세와 처세의 원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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