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숙의『외딴방』과 박노해의「가리봉 시장」, 그리고 구로공단 이야기

예전에 내가 한국산업단지공단 다닐 때 일터였던 서울 구로동의 랜드마크 키콕스벤처센터

오랫만에 구로공단에 왔다.

예전에 내가 한국산업단지공단 다닐 때 일터였던 키콕스벤처센터(이하 키콕스) 건물은 본사가 대구로 이전하는 바람에 서울지사가 쓰고 있다.

키콕스 건물 앞에는 2개의 조형물이 있다. 하나는 횃불을 높이 치켜든 초록빛 여인상이고 다른 하나는 ‘꿈·기술·미래 신산업의 터전’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서울디지털국가산업단지 기념 표지석이다. 얼핏 보면 단순한 조형물로 여기고 눈여겨보지 않을 수 있겠지만 가만 살펴보면 두 조형물의 의미가 예사롭지 않아 지나는 사람의 발걸음을 머물게 한다.

키콕스 건물 앞에 있는 횃불을 높이 치켜든 초록빛 여인상(왼쪽)과 ‘꿈·기술·미래 신산업의 터전’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서울디지털국가산업단지 기념비(오른쪽) 앞에서 필자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키콕스 건물 앞에 있는 횃불을 높이 치켜든 초록빛 여인상(왼쪽)과 ‘꿈·기술·미래 신산업의 터전’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서울디지털국가산업단지 기념비(오른쪽) 앞에서 필자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한국산업단지공단이 위치한 키콕스 앞에 서 있는 ‘수출의 여인상’은 1974년 8월 12일 한국수출산업공단(현 한국산업단지공단)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제작한 것으로 한손에는 수출의 불꽃을 상징하는 횃불을, 다른 한손에는 봉제를 상징하는 실타래가 감긴 지구본을 들고 있다.

키콕스 앞 화단에 남겨진 여인상의 디딤돌과 키콕스 신축으로 방치됐던 ‘수출의 여인상’은 2014년 보수공사를 거쳐 센터 앞 공원에 다시 세워졌다. 당시 구로공단의 주역이면서 산업화, 수출역군으로 국가 경제발전을 위해 땀흘려 일한 여성근로자들의 공적을 기리고자 세계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진취적이고 도전적인 근로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이 여인상의 정식명칭은 바로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근로여인상’이다.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근로여인상 한손에는 수출의 불꽃을 상징하는 횃불을, 다른 한손에는 봉제를 상징하는 실타래가 감긴 지구본을 들고 있다.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 근로여인상 한손에는 수출의 불꽃을 상징하는 횃불을, 다른 한손에는 봉제를 상징하는 실타래가 감긴 지구본을 들고 있다.

구로공단’으로 불리던 ‘한국수출산업공업단지’에는 1967년 조성된 1단지 구역 구로동 일대에 섬유 공장들이 주로 들어서고, 1972년과 1976년에 조성된 2,3단지인 가리봉동과 가산동 일대에는 봉제와 전자제품 공장들이 각각 입주했다. 그 당시에는 여성노동자 수가 60%를 넘었다. 공단의 주역이고 수출의 역군이었으나, 사람들은 여성노동자들을 ‘여공’ 또는 ‘공순이’라고 비하해 불렀다.

​여성노동자들은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열악한 작업환경과 벌집촌의 낙후된 주거환경 속에서 희생적인 삶을 살았다. 그러면서 야간학교에 다니며 주경야독하고,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간 억척스런 여성들로 우리나라가 농업 중심의 후진국에서 선진 공업국가로 급성장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구로공단은 소설가 신경숙이 열여섯 어린 나이에 오빠들 뒷바라지를 위해 정읍에서 올라와 여공으로 일했던 곳이기도 하다. 신 작가는 낮에는 동남전기에서 일당 700원을 받고 스테레오 부품을 조립하고, 밤에는 산업체 특별학교인 영등포여고에서 공부하며, 이른바 ‘벌집’으로 불리던 단칸 셋방에서 오빠들 틈에 웅크리고 선잠을 잤다. 열여섯 살부터 스무 살까지 자신이 겪은 구로공단의 삶을 신경숙 작가는 소설『외딴방』에 고스란히 재현해놓았다.

박노해 시인은 ‘가리봉시장’에서 구로공단 여공들의 삶에 대해 “하루 14시간 / 손발이 퉁퉁 붓도록 / 유명 브랜드 비싼 옷을 만들어도 / 고급 오디오 조립을 해도 / 우리 몫은 없어”라고 노래했다. 또 “돈이 생기면 제일 먼저 가리봉시장을 찾아 / 친한 친구랑 떡볶이 500원어치, 김밥 한 접시 / 기분 나면 살짜기 생맥주 한 잔이면 / 스테이크 잡수시는 사장님 배만큼 든든하고 / 천오백 원짜리 티샤쓰 색깔만 고우면 / 친구들은 환한 내 얼굴이 귀티 난다고 한다”라며 당시 가리봉시장 분위기와 고단한 여공의 삶을 살아야 했던 대한민국 누이들의 애환을 실감나게 전해주고 있다.

1990년대 들어 산업구조가 변화하면서 구로공단은 2000년 12월 서울디지털산업단지(G밸리)로 개명되었으며, 지식정보산업 중심의 첨단 디지털 산업의 메카로 변화하였다.

지난 50년의 눈부신 성장의 이면에 희생과 헌신으로 대변되는 구로공단 여성노동자들의 삶의 애환은 이제는 기업가정신, 패기, 창의적 아이디어로 무장한 미래세대 G밸리의 ‘신(新) 수출의 여인’들이 ‘제2의 한강의 기적’을 이끌어갈 주인공으로서 바통을 이어받은 의미와 염원이 여인상에 상징적으로 담겨있다.

‘꿈·기술·미래 신산업의 터전’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서울디지털국가산업단지 선포기념석 뒷면에는 20년 전에 필자가 쓴 시(詩)가 새겨져 있다.
‘꿈·기술·미래 신산업의 터전’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서울디지털국가산업단지 선포기념석 뒷면에는 20년 전 필자가 쓴 시(詩)가 새겨져 있다.

여인상이 과거의 상징물이라면 ‘꿈·기술·미래 신산업의 터전’이라는 글귀가 새겨진 서울디지털국가산업단지 선포기념 표지석은 미래의 상징물이다. 이 기념석 뒷면에는 이런 비문이 새겨져 있다.

‘여기, 겨레의 슬기와 땀방울 하나로 모아 / 수출산업의 터전을 닦고 /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한국의 영원한 경제의 성지…. / 1964년 한국 최초의 산업단지를 탄생시킨 구로 옛터에 / 국가 백년대계의 웅대한 뜻을 품고 / 새 천 년을 맞아 전통산업과 지식정보산업이 / 창조적으로 결합하는 서울디지털산업단지를 / 새로이 세우다 ’

이 비문은 20년 전에 필자가 쓴 시(詩)다. 서울디지털산업단지 선포 기념으로 세우는 표지석 뒷면에 새길 문구가 필요하다고 해서 한달음에 써서 제공한 것이다.

이런 기념석을 시비(詩碑)라고 할 수는 없다. 시비에도 기념비적인 성격이 있기는 하지만 명망 높은 시인의 업적을 기리거나 그 시인을 추모하는 성격이 강한 비석이라야 진정한 시비라고 할 수 있기에 국어사전에 나오는 뜻 그대로 ‘시를 새긴 비석’이라고 다 시비라고 우길 수 없는 노릇이다.

아쉽게도 내가 제공한 비문에는 글씨 쓴 이의 이름은 있는데, 글을 쓴 내 이름은 없다. 국가적인 큰일에 말단 직원으로 근무하는 무명시인의 이름을 새겨 넣는다는 것이 행사를 주관하는 입장에서는 껄끄럽게 생각되었을 수도 있었으리라. 그렇다고 해서 아쉬움 때문에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돈도 밥도 안 되는 시를 쓰면서, 시에 운명을 걸고 시에 순정을 바쳐온 내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구로공단, 그리고 그곳에 가면 입구부터 만나는 두 상징물 속에 내 소중한 꿈이 은밀히 새겨져 있음을 이야기하고 싶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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