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덕산 김덕권칼럼니스트

색깔론

지금 우리 사회는 색깔론이 만연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모임에서 한 인사가 문재인 대통령을 종 북 좌파로 지칭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우리 손으로 뽑은 이 나라의 대통령이 정말 종 북 좌파라고 칭하는 것이 과연 온당한 처사일까요?

색깔론이란 어떤 개인이나 집단이 지니고 있는 사상에 대한 정치적 시비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801~1819)은 20대 초에 접했던 천주교로 인해 일생동안 천신만고의 괴로움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천주학쟁이’라는 색깔론이 덧씌워졌기 때문입니다. 일만 터지면 정약용은 ‘천주학쟁이’ 라는 색깔론으로 비방과 탄압을 면할 길이 없었습니다. 다산이 조금이라도 형편이 피거나 벼슬이 올라가면 반대파들의 마음이 불편해집니다. 그러면 천주학쟁이라는 주홍글씨가 튀어나오는 것이지요.

근거 없는 ‘색깔론’은 오늘 날에도 그 위력이 보통이 아닙니다.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색깔론’도 지긋지긋한데 언제까지나 ‘색깔론’으로 사람들을 매장시키려는지요? 참으로 웃기는 세상입니다. 김정일을 욕하지 않고 박정희를 욕하면 좌파로 매도당합니다. 적폐를 청산하고 정치를 개혁하려는 여당을 욕하지 않고, 반대를 위한 반대만 하는 자유한국당을 욕하면 용공으로 몰려버립니다.

나라가 강해지고 발전하려면 국민들이 화합하고 단결하는 것이 급선무 아닌가요? 그래야 사회에 활력도 생기고 나라가 발전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반도는 남북이 갈라진 것도 모자라 이번에는 진보와 보수로 분열되어 색깔론까지 판치는 이해 못할 세상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참으로 야박한 세상입니다. 있는 자가 없는 자를 도와주고 강한 자는 약한 자를 보호하자고 해도 의심스런 눈초리로 보는 세상입니다. 자비가 넘치고 인정이 가득한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자고 해도 좌파가 아닌가하는 색안경을 쓰고 보는 야박한 세상에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그뿐인가요? 이미 많이 가진 자가 더욱 많이 가지려하고, 거기다가 권력까지 움켜쥐려는 슬픈 현상을 우리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회 각 분야에 썩지 않은 곳이 별로 없습니다. 부패가 판치고 부정이 춤추는 이 나라의 모든 적폐는 없어져야 하고 새 정부가 출범하는 지금 개혁을 완수해야 합니다.

사랑해야할 국민을 좌파친북으로, 존경받아야 할 이 나라의 대통령을 종 북 빨갱이로 모는 나쁜 습성은 이제 사라져야 할 때가 되었습니다. 막말로 그 인격을 의심케 하는 여당의 대표가 도리어 대통령을 종 북이라고 큰소리치는 이 현실은 정말 가슴이 아픕니다. 자기들에게 동조하지 않으면 무조건 종 북 좌 빨로 몰아버리는 이 미친 세상에선 정의도 민주도 양심도 인권도 자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한 번 묻고 싶습니다. 진정 이 나라의 대통령이 빨갱이면 좋겠는지요? 서로 힘을 합해도 이 어려운 난관을 극복하기도 어려운데, 서로 헐뜯고 남을 욕하고 남에게 책임을 전가해야 하는 세상은 이제 그쳐야 합니다. 한쪽으로 치우치면 그것이 아무리 좋은 주의 주장이라도 정의는 아닙니다.

우리 [덕화만발] 가족에게는 <덕화만발 4대강령>이 있습니다. 이 4대강령을 지키는 것은 덕화만발 가족의 의무이고 사명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中道) 중용(中庸) 중화(中和)를 부르짖기 때문입니다.

<덕화만발 4대강령>

 1. 덕화만발은 사회의 공기(公器)이다.

2. 덕화만발은 가족 모두가 주인이다.

3. 덕화만발의 주인은 다음 네 가지의 강령을 지킨다.

-. 우리는 맑고, 밝고, 훈훈한 낙원세상을 지향한다.

-. 우리는 편협한 종교, 이념, 정치를 배격하고 중도를 지향한다.

-. 우리는 서로 돕고 이끄는 상생상화의 정신을 지향한다.

-. 우리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으로 활동한다.

‘무소유’가 자신이 소유한 것을 하나씩 버리는 것이라면, ‘중도’는 자신이 지니고 있는 견해들을 하나씩 버리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괴로움과 불행과 갈등은 자아(自我)에 대한 집착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자신의 생각이나 관념이나 견해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면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자연과 내’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원래 ‘중도’란 붓다가 처음 말한 용어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가장 잘못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는 용어가 이 중도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중도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변증법적 유물론도 아니고 이분법적 견해 사이의 그 중간도 아닙니다.

‘나와 너’, ‘선과 악’, ‘옳고 그름’, ‘진보와 보수’, ‘있음과 없음’과 같은 이분법적 견해 사이에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중도는 이런 이분법적 사고를 초월하는 것이고, 극단적인 견해들을 버리는 것이지요. 중도는 이해심, 자유 그리고 평화에 이르는 길입니다. 중도를 알면 세상이 달라 보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용의 요체는 도통(道通)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도를 터득하고 이를 실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에게나 인간적 욕심과 도덕적 본성이 함께 내재되어 있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인간적 욕심이 없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도덕적 본성과 인간적 욕망을 다스리는 이치가 중용입니다.

또 중화는 실천적 측면에서 희로애락(喜怒哀樂)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를 중이라고 하며, 일어나는 모든 일이 절도에 맞는 것을 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극단에 치우쳐 상대방에게 색깔론을 덧씌우는 행위는 그것이 제아무리 좋다고 해도 결코 정의는 아닙니다. 우리 편을 가르는 색깔론 보다는 중도 중용 중화의 길을 함께 가면 얼마나 좋을 까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9월 28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 본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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