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신체제는 ‘불법’국가, 제1차 피해는 제8대 국회와 유신반대 여야의원들
유신청산 위해 집중피해기관 국회가 ‘유신무효’와 ‘불법성’ 결의·선언해야

[뉴스프리존= 윤재식 기자] 제72주년 제헌절을 보름 앞둔 지난 목요일 7월 2일 오후 2시부터 6시까지 4시간에 걸쳐 국회의원회관 제1세미나실에서 ‘유신청산민주연대’와 설훈, 이학영, 우원식, 노웅래, 김영호 국회의원실이 공동으로 ‘사라진 국회, 10월 유신과 민주주의 말살’주제로 유신독재청산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이날 심포지엄을 공동주최한 유신청산민주연대는 물론 국회의원 5인은 거의 대부분 유신체제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직간접적으로 고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국가로부터 그 피해에 대한 정당한 보상과 배상을 받지 못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예컨대, 노웅래 의원은 10월 유신으로 제8대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한 고(故) 노승환 의원이 선친이다. 김영호 의원(서대문구 을, 재선) 역시 같은 이유로 의원직을 박탈당한 고 김상현 의원이 선친이다.

인사말을 통해 각각 발언한 5인 국회의원 가운데 김영호 의원은 “10월 유신 당시 선친께서 잡혀가던 장면, 재판받던 장면, 면회하던 장면 등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하나도 잊지 않고 생생하게 기억난다.”고 증언했다. 또, “당시 선친은 8대 국회 내무위 소속이었고, 저는 아버님 포승줄을 붙잡고 ‘이랴! 이랴! 감옥으로 어서 가자!’고 장난치던 나이어린 6세 철부지 아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이에 덧붙여 그는 “그것이 평생 지워지지 않는 트라우마와 한이 되어 그토록 당시 장면들을 생생하게 기억하게 된 것 같다.”고 고백했다. 특히, 김영호 의원은 “감정적 거부감 등으로 아직도 제1야당 소속 위원들과 식사도 한번 하지 못했다.”면서 “이제는 재선의원으로서 심리적 외상(外傷)에서 벗어나 선친이 추구했던 대화정치, 포용정치 등을 배우고 따라가야 할 때라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을 실행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개인적 고뇌를 밝혀 약 50여명에 달하는 참석자들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이날 심포지엄은 1972년 정기국회 당시 국정감사 중에 있던 제8대 국회를 대통령 박정희가 아무런 법적 권한도 없이 위헌적이고도 불법적으로 해산시켜버린 이른바 ‘10·17 대통령 특별선언’에 초점이 맞춰졌다. 박정희가 다음날 아무런 법적 권한도 없이 일방적으로 전국에 걸쳐 비상계엄을 선포했고, 정당 등 정치활동을 중지시켰기 때문이다. 또, 이러한 상황에서 국회를 대신하여 대통령이 주재하는 ‘비상국무회의’가 입법권을 탈취하고 유신헌법을 발의하여 찬반토론 없이 11월 21일 국민투표를 실시하여 가결시켰다.

박정희는 12월 27일 유신헌법을 공포했고, 당일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경선 없이 재적 2,359명 중 찬성 2,357표, 무효 2표로 제8대 대통령이 되었다. 그 후 1979년 10월 26일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 의해 피살될 때까지 이른바 ‘유신체제’가 정치인은 물론 학생, 청년, 종교인, 언론인, 노동운동가, 그리고 일반시민 등 수많은 저항자와 피해자를 만들어 냈다.

이 날 심포지엄 제1부에서 동국대 철학과 홍윤기 교수는 그 당시 저항자이자 피해자로서 ‘10·17 대통령 특별선언’이 나오기까지 과정과 그 성격 등을 증언형식으로 구성하여 발제했다. 홍교수는 “특별선언 당일까지 유효했던 제3공화국 헌법(제7호 헌법)에는 국회해산 규정 자체가 없었고, 헌법 일부조항 정지규정도 없었다. 비상국무회의가 유신헌법을 발의한 것도 제3공화국 헌법에서 규정한 헌법개정절차(국회 재적의원 3분의 1 이상 또는 국회의원 선거권자 50만인 이상의 발의, 30일 이상 공고)를 위반한 것”이라고 지적했다. 따라서 “유신체제는 객관적 사실에 비추어 또 법리상 엄연히 폭력적 ‘불법국가’임에 틀림없다.”고 단언했다.

홍윤기 교수에 따르면, “전쟁이 벌어져 피난까지 갔던 6·25때도 국회는 해산되지 않았다. 1972년 당시 국회를 해산해야 할 비상사태란 전혀 없었다.”고 강조했다. 또, “유신국회로 통칭되지만 그나마 명색으로는 국회 이름을 달고 9대 국회가 구성되는 1973년 2월 27일까지 4개월 10일 동안 ‘국회공백’ 또는 ‘국회 없는 국가’라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홍 교수는 “유신체제 피해자의 구제나 배상 얘기가 나오면 역대 국회는 자기들은 유신과 무관한 것처럼 처신하면서 피해자들을 민원인처럼 처리하는 유체이탈화법을 구사해 왔다”고 비판했다. 특히, “권한도 없는 조직폭력배 두목에게 직장을 폐쇄당하고 부당해고를 당하고도 그 당시에는 물론 그 이후에도 ‘합법적으로 선출된 8대 국회를 복원하라!’고 항의한 국회의원은 단 한 명이 없었다.”고 질타했다.

요컨대, 홍교수는 “유신체제는 폭력적 불법국가였고, 제1차 피해자는 당시 제8대 국회, 이중에서도 특히 유신에 반대하여 고문까지 당하고 투옥되기도 했던 여야국회의원들”이라고 주장했다. 또,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집중피해기관인 국회를 대표하여 21대 국회의원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유신무효를 결의해야만 유신청산과 국가폭력종식이 가능하고, 그 기반 위에서 참된 민주화가 가능하다.”고 역설했다.

제2부 ‘의정말살과 헌정파괴의 헌법적 의미’에서 박정희 독재에 대해 가장 세밀하게 기록한 전 동아일보 기자 출신이자 전 서울 디지털대 총장이었던 김재홍 유신청산민주연대 상임공동대표는 제1발제자로서 10·17 선언 이후 자행된 군부 동원과 정치폭력과정을 ‘군대폭동’으로 단정하고 유신을 ‘내란’으로 규정했다. 즉, “독재자 박정희가 유신 첫날인 10월 17일 국회를 위헌적으로 해산하고 군대를 풀고 현직 의원 20명을 잡아들여 국가기관에서 집단적 고문을 가하는 등 국가폭력을 자행하여 사실상 ‘폭동’, 아니 ‘난동’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김 상임공동대표에 따르면, “그것은 박정희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 후보였던 김대중에게 바짝 추격당하고, 자신이 임명한 내무장관 오치성 해임건의안에 집권세력 안에서도 동조자가 생기자 선거와 정당정치를 완전하게 무시하기로 결심하고 아예 ‘정치 자체가 없는 1인 통치’를 의도했기 때문이다. 즉, 박정희에게 위기란 민족이나 국가의 위기가 아니라 ‘자기 1인의 통치위기’였던 셈”이라고 역설했다.

제2발제자인 헌법학자 서강대 임지봉 교수는 “개정과정과 주요내용을 법리적으로 검토할 때 유신헌법은 절차적으로는 물론 내용적으로도 국민주권원리, 권력분립원리, 법치주의원리. 입헌주의, 민주공화국 국가형태 등을 모두 위배하여 불법성과 원인무효를 특징으로 하고 있다. 즉,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와 상충되는 ‘반(反)민주적 헌법’이자 ‘반(反)헌법적 규범’이다. 그 암울한 반복을 막고 그 잔재를 없애려면, (가칭) ‘유신청산특별법’과 같은 국회입법을 통해 불법성과 무효임을 확인하는 것이 가장 현실적이고도 효과적”이라고 강조하면서 “2차 대전 후 독일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반(反)헌법적이고 폭력적인 나치헌법을 청산’했다.”고 예시했다.

한편, 이 날 심포지엄 제1부는 긴급조치사람들 사무처장 겸 유신청산민주연대 운영위원장 이대수가 사회를 맡았고, 제2부는 방송통신대 법학과 명예교수 겸 21세기 공화주의클럽 강경선 상임대표가 사회를 맡았다. 제2부 지정토론자는 한국외국어대 사학과 반병률 교수와 긴급조치사람들 법률대책위원장 송병춘 변호사였고, 무소속 양정숙 국회의원이 끝까지 경청했다. 또, 제3부 종합토론 사회자는 대구과학기술원 대학교 이종구 석좌교수였고, 70년대 민주노동운동동지회 박순희 부회장,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박현옥 회장 등 참석자들이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하여 시간이 다소 부족했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대량학살 등 이승만이 저지른 국가폭력과 유신시대 박정희가 저지른 국가폭력은 각각 어떠한 차별성을 갖고 있을까? 심포지엄이 끝난 후 본 기자가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겸 유신청산민주연대 공동대표 송운학에게 전화로 문의했다. 그는 “전자는 분단국가를 만들기 위해 저지른 국가폭력으로서 외세에 빌붙은 위정자가 그 모든 책임을 이북에 전가하고 아직까지도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실시하지 않고 있다. 이에 비해 후자는 분단이 내재화된 상태에서 독재국가를 영구화하고자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 또는 빨갱이로 몰리면, 죽을 수 있다.’는 끔찍한 집단체험과 집단기억 등을 악용하여 저지른 국가폭력으로서 상당히 많은 진상이 규명되어 있다. 따라서 유신청산은 참된 민주화를 위한 중요한 과제임이 틀림없지만, 그것만으로는 국가폭력과 국가불법행위 등을 근절하고 완전히 자주적이고 평화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고 답했다.

그렇다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대량학살 등 이승만이 저지른 국가폭력과 유신시대 박정희가 저지른 국가폭력은 각각 어떠한 차별성을 갖고 있을까? 심포지엄이 끝난 후 본 기자가  촛불계승연대 상임대표 겸 유신청산민주연대 공동대표 송운학에게 전화로 문의했다. 그는 “전자는 분단국가를 만들기 위해 저지른 국가폭력으로서 외세에 빌붙은 위정자가 그 모든 책임을 이북에 전가하고 아직까지도 진상규명조차 제대로 실시하지 않고 있다. 이에 비해 후자는 분단이 내재화된 상태에서 독재국가를 영구화하고자 ‘빨갱이는 죽여도 된다. 또는 빨갱이로 몰리면, 죽을 수 있다.’는 끔찍한 집단체험과 집단기억 등을 악용하여 저지른 국가폭력으로서 상당히 많은 진상이 규명되어 있다. 따라서 유신청산은 참된 민주화를 위한 중요한 과제임이 틀림없지만, 그것만으로는 국가폭력과 국가불법행위 등을 근절하고 완전히 자주적이고 평화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고 답했다.

이날 심포지엄을 공동 주최한 유신청산민주연대는 ‘광주전남민주화운동동지회’, ‘민주·인권·평화를 실천하는 긴급조치 사람들’, ‘부산 민주항쟁기념 사업회’, ‘4.9평화통일재단’, ‘서울민예총’, ‘자유언론실천재단’ (동아투위, 조선투위), ‘전태일재단’, ‘70년대 민주노동운동동지회’ (청계, 동일, 원풍, YH 외 노동조합), ‘71동지회’,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인권센터’, ‘한국작가회의’ 등 70년대 유신체제에 저항했던 민주인사들이 주도적으로 만든 단체들을 중심으로 이와 무관한 촛불계승연대천만행동이 동참하는 단체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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