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쉼터 대구 염매시장 곡주사, 그리고 80년대 민중문학의 야전사령관 채광석 시인 이야기

[뉴스프리존, 대구=박상봉 기자]1980년대 초 어느 봄쯤에 / 당시 민중문학의 야전사령관으로 불리던 / 비평가 채광석이 곡주사에 왔다 / 배창환 첫 시집 ‘잠든 그대’ 해설을 위해 // 2층 방에서 엉망으로 취해 / 나와 48동갑인 전태일은 / 대구가 낳은 위대한 스승이라느니 / 그런 대구에서 전두환 독재가 나왔느니 / 태일아, 태일아 엉엉 울다가 그만 / 계단에서 굴러 떨어져 정신을 잃었다 // 그처럼 정신을 잃고 살던 시절 / 술에 취해도 두 눈만은 맑던 청년들에게 / 술과 밥을 외상으로 마구 퍼주던 / 앞치마 두른 안주인은 / 관세음의 화현보살이었던가 // 대구 남산동 출신 48년생 / 전태일이 살아있다면 올해 예순 여섯 / 그 전태일의 고향 후배들에게 / 마구 밥과 술을 퍼주던 / 정옥순 이모님은 살아서 여든! / 이마 푸른 사람들 여기저기서 꽃이 핀다 //-김용락 시인의 시 '곡주사에서' 전문

곡주사는 대구 염매시장 안에 있는 막걸리집이다. 70년대 말에서 80년대 초. 운동권 학생과 문학청년들의 모임 장소로 유명한 곳이다.

김용락 시인의 시 '곡주사에서'는 여러 해 전에 곡주사 이모 정옥순 여사님 팔순을 맞아 옛날 단골 손님들이 다시 모여 잔치를 열어주었는데 그때 낭송된 축시이다.

이 시에 등장하는 당시 민중문학의 야전사령관으로 불리던 채광석 시인이 1980년대 초 어느 봄날에 배창환 시인의 첫 시집 '잠든 그대' 해설을 위해 대구에 온 날이다. 그날 나는 배창환, 김용락 시인 등과 함께 곡주사에서 그를 만났다.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곁을 훌쩍 떠나간 80년대 민중 문학의 야전사령관 채광석 시인. / ⓒ=박상봉 기자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곁을 훌쩍 떠나간 80년대 민중 문학의 야전사령관 채광석 시인. / ⓒ박상봉 기자

그날 모두가 코가 삐뚫어지도록 마셨다. 채광석 시인은 너무 취해서 저고리를 거꾸로 입고 있을 정도로 인사불성 상태인지라 걱정이 되어 동대구역까지 그를 부축하며 배웅한 기억이 난다.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1987년 6월 항쟁 직후 그는 여성단체연합 주최 민요한마당 공연관람 후 귀가 도중 서울 마포구 아현동 아현초등학교 부근 차도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운명을 달리했다. 서른 아홉살 생일을 맞은 다음날이었다.

채광석 시인의 돌연한 죽음은 문단 안팎에서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7월 14일, ‘민족시인 고 채광석 민주문화인장'이 엄수돼 고인의 유해가 팔당 공원묘지에 안장되었다.

당시 민중문학의 야전사령관으로 시인으로 비평가로 유명세를 떨치던 그는 문학과 민주화운동 투사로 불같은 열정의 소유자였다.

1948년 충남 태안 출생으로 대전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영어교육학과를 나왔다.

1983년 2월, 김정환시인의 장편연작시 '황색예수1'(실천문학사)에 해설 '김정환의 예수'를 쓰고, 3월에 창작과비평사에서 발행한 '한국문학의 현단계 2'(백낙청·염무웅 편)에 문학평론 '부끄러움과 힘의 부재'를 신인작품으로 발표하여 본격적으로 문학평론 활동을 시작하였다.

아울러 5월에 조태일 시인이 발행하던 시(詩)전문무크 '시인' 제1집 ‘움직이는 시’에 '빈대가 전한 기쁜 소식'외 4편으로 시작활동을 개시함으로써 한국문단에 혜성처럼 등장하였다.

1984년 9월에는 박노해 시인의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기획, 출간하여 이른바 민중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

1986년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문화예술분과위원장에 선임되었다. 이 무렵 풀빛출판사에서 후배 평론가 김명인과 함께 상임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풀빛 시선 등을 기획하여 김지하, 양성우, 김준태, 신경림, 문병란 시집 등을 펴냈다.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곁을 훌쩍 떠나간 아쉬운 그의 뒷모습은 그날 동대구역을 떠나던 뒷모습과 오버랩 되면서 그 후로도 오랜 동안 내 머릿속에 남아 떠나지 않았다.

오랜만에 찾은 곡주사는 삼성금융플라자라는 거대한 빌딩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예전에 없던 간판을 높이 세워놓았다.

사실 예전에도 곡주사를 찾아가기는 쉽지 않았다. 복잡한 염매시장 골목을 돌고 돌아 구석진 곳에 숨어 있었기 때문인데, 압박과 폭력이 난무하던 시절 영혼에 상처 입은 청년들이 숨어들기에는 아주 적당한 장소였다.

민주화의 격동기였던 그 시절, 대구의 운동권 학생들은 곡주사에 모여 막걸리를 들이키며 시국을 논하고 독재에 대한 비판과 울분을 토했다.

민주화운동을 하던 대학생뿐 아니라 배고픈 시절, 외상도 쉽게 주어 갈 곳 없는 문학청년들에게 편안한 장소였다. 나와 박기영 안도현 장정일 등이 함께 한 시동인지 '국시'를 전혀 다른 방식인 게릴라식 통신문학운동으로 시작하자고 은밀하게 공모한 장소도 바로 이곳, 곡주사였다.

지난 2004년 10월. 박기영 김용락 시인과 함께 70~80년대 문학청년기를 보낸 문인 100명을 모아 그 시절을 돌아보는 ‘대구 시다리기 대회’를 열었던 적이 있다.

그 때 대구시 중구 덕산동 YMCA 3층 강당에서 김용락 시인의 사회로 진행된 ‘Y에서 만납시다’란 오프닝 행사를 마치고 나서 문학청년시절에 자주 어울리던 YMCA 뒤편 곡주사로 자리를 옮겨 밤새는 줄 모르고 추억에 젖어 이야기꽃을 피웠었다.

자정이 넘도록 자리를 함께 한 안도현 시인은 그날 “문학청년 시절 현상문예공모에서 상금을 타기라도 하면 염매시장으로 우르르 몰려와서 문학 이야기로 날밤을 새웠다”고 곡주사와 얽힌 문청시절의 추억을 회고했다.

암울한 시대 울분에 찬 학생들의 광장 역할을 톡톡히 해낸 식당으로 자리잡은 곡주사는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채광석 시인은 우리 곁을 떠나고 없다. / ⓒ=박상봉 기자
암울한 시대 울분에 찬 학생들의 광장 역할을 톡톡히 해낸 식당으로 자리잡은 곡주사는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채광석 시인은 우리 곁을 떠나고 없다. / ⓒ=박상봉 기자

옛날에는 ‘곡주사 할매집’이었는데 지금은 ‘곡주사 조은맛집’이다. 원래는 ‘성주식당’이었다가 ‘곡주사’로 이름을 바꾼 사연이 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어떤 대학생이 ‘통곡(哭)하고 (유신을) 저주(呪)하는 선비(士)라는 뜻’으로 ‘곡주사(哭呪士)’라는 이름을 종이로 써 붙여놓았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식당 상호로 불리게 되었다고 전한다.

옛날이 그리워질 때면 배고프고 험난했던 그 시절의 추억을 안주 삼아 막걸리 한 잔 하기에 딱 좋은 장소가 곡주사다. 암울한 시대 울분에 찬 학생들의 광장 역할을 톡톡히 해낸 식당으로 자리잡은 곡주사는 지금도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으나, 채광석 시인은 우리 곁을 떠나고 없다.

어제(12일)이 33주기인데 박원순 전 서울시장 추모 분위기 때문에 채광석 시인에 대한 관심이 예년 같지 않다. 세월도 많이 흐르고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잊혀져가며, 비로소 ‘한 마리 몸 가벼운 새’가 되어 이승과 저승을 자유롭게 날아다니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너는 한 마리 몸 가벼운 새 / 겹겹이 둘러친 창살을 넘나들며 / 목조의 가사(假舍) 방마다 그득 곯아떨어진 자들 / 하나 둘 일깨워 내 족속 씨말리는 / 형형한 눈들 섬광과 섬광 부딪쳐 / 공주감옥 벽이란 벽 밤마다 타오르고 / 몸 가벼운 새떼 밤새도록 난다 / 파랑 파랑 새들은 난다 / 한 마리 두 마리 열 마리 천 마리 // -고 채광석 시인의 시 '자유'전문

안면도 자연휴양림에 채광석 시인의 시비가 있다. 시비 앞면에 ‘기름진 고독의 밭에 불씨를 묻으리라’고 노래한 그의 대표시「기다림」전문이 새겨져 있다. / ⓒ=박상봉 기자
안면도 자연휴양림에 채광석 시인의 시비가 있다. 시비 앞면에 ‘기름진 고독의 밭에 불씨를 묻으리라’고 노래한 그의 대표시 '기다림' 전문이 새겨져 있다. / ⓒ박상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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