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돌아온 연어, 시의 생활화 메시지 '국시' 동인으로 필자와 함께 활동한 안도현 시인 이야기

[뉴스프리존=박상봉 기자]지난 주말 개인적인 볼 일로 안동 가는 길에 고향인 예천으로 내려와 정착해 살고 있는 안도현 시인의 집에 들렀다.

경북 예천 고향으로 내려와 정착해 살고 있는 안도현(뒷줄) 시인의 집에 들러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 첫째 이동엽 시인과 필자(왼쪽)/ ⓒ=박상봉 기자
 예천으로 내려와 정착해 살고 있는 안도현(뒷줄) 시인의 집에 들러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앞줄 오른쪽은 이동엽 시인. / ⓒ=박상봉 기자

나랑 안도현은 박기영 장정일 권태현과 80년대 초중반에  '국시' 동인활동을 같이 했다. 그는 나중에  '시힘' 동인으로 옮겨갔지만, 박기영과 내가 '국시' 동인을 결성하고 통신문학동인지라는 독특한 방식의 매체를 발행하며, 시의 생활화 운동을 펼칠 때  '국시'의 창업공신으로 참여해 힘을 보탰다.

매달 정기적으로 발행된 통신문학지 '국시'는 전국의 시인들과 문학동호인들에게 발송됐다. 기성과 신인 구별없이 우수한 신작시를 수록해 문예지가 부족했던 당시에 발표지면을 제공하는 시전문 매체로 한몫을 하였으며, 통신으로 독자를 찾아가는 새로운 시운동으로 주목 받았다.

어느 해 가을, 청도도립도서관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다. 

이날 안도현 시인은 초청강사로 와서  ‘연어는 왜 거슬러 오르는가’라는 주제로 강연을 했다. 평소에 우리가 어렵고 멀게만 느꼈던 시를 감상하는 방법과 시창작법에 대한 다채로운 이야기를 안도현 시인 특유의 편안함과 위트로 재미있게 들려주었던 기억이 난다. 강연이 끝난 후 사인회와 기념사진 촬영이 이어졌고, 물밀듯 밀려드는 안도현 시인에 대한 독자들의 뜨거운 사랑을 실감할 수 있었다.

안도현 시인이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를 발표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연탄시인’으로 불리며 유명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연탄은 한 덩이 재가 될 때까지 스스로를 태워서 추운 겨울날 방안을 훈훈하게 데워주고 따뜻한 밥과 국물과 맛있는 생선을 만들어주는 고마운 존재다. 

한가하게 텃밭을 가꾸고 있는 안도현 시인은 연탄과 같은 마음을 가진 매우 따뜻한 사람이다. 또 스스로는 차가운 재로 남아 골목길에 함부로 버려지고 사람들의 발길에 채여 부서지기도 하는 연탄 같은 시련기를 겪어온 시인이기도 하다. 
한가하게 텃밭을 가꾸고 있는 안도현 시인은 연탄과 같은 마음을 가진 매우 따뜻한 사람이다. 또 스스로는 차가운 재로 남아 골목길에 함부로 버려지고 사람들의 발길에 채여 부서지기도 하는 연탄 같은 시련기를 겪어온 시인이다. / ⓒ박상봉 기자

우리 어릴 적만 해도 연탄은 대부분 가정에서 서민들과 애환을 같이 해왔으나 지금은 아파트가 새로운 주거형태가 되면서 도시가스나 석유보일러, 또는 전자제품으로 음식을 만들고 난방을 하므로 연탄을 쓰는 가정이 거의 없어졌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연탄만 사라진 것이 아니라 연탄처럼 따스한 마음을 가진 사람도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편리성만 추구하는 사회 분위기 탓인지 요즘은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심으로 가득 찬 사람들이 너무 많다. 연탄을 즐겨 쓰던 그 시절처럼 남을 생각하고 나눌 줄 아는 그 마음은 다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안도현 시인은 '너에게 묻는다'라는 시에서 이런 질문을 던진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나는 이 시를 보고 깜짝 놀랐다. 언젠가 장정일 박기영 등과 함께 염매시장 곡주사에서 진탕 술을 마시고 동성로를 걷다가 장정일이 연탄재를 발로 냅다 걷어차는 것을 보고,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고 소리쳤던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안도현이 그날 내가 던진 한마디에 착상이 떠올라서 이 시를 썼는지는 모르는 일이다. 

어쨋든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는 명령문 한 구절만 가지고는 시가 될 수 없다. 

“너는 /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는 그 다음 행의 기막힌 반전이 있기에 시적 감동이 크고 뛰어난 작품으로 널리 알려질 수 있었던 것이다.

남의 도움과 희생으로 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모르고 저 혼자 잘난 듯이 사는 사람들 때문에 세상살이는 점점 힘들고 삭막해져간다. 

곁에 있는 사람과 나눌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이 넘치는 세상,  ‘연탄 한 장’이 주는 따스한 지혜가 아쉬운 세상에 안도현 시인은 인정이 메말라 버린 현대인들의 각성을 촉구하는 엄혹한 교훈을 던지고 있다.

예천으로 이사오기 전 안도현 시인은 전주에서 살고 있었기에 구미와 대구에서 살아온 나와는 거리가 멀어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대구나 인근 지역으로 강연을 오더라도 독자들의 틈바구니에서 바쁘게 움직이는 그의 모습을 먼 발치에서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예천으로 집을 옮겼다는 소식을 듣고 ‘한번 가봐야지’ 하고 있다가 엊그제 주말에 안동 갈 일이 생겨 가는 길에 그의 새 거처에 들리게 된 것이다.

새 집과 시인이 잘 어우러져 사는 모습이 매우 편안해보였다. 

안도현 시인이 쓴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의 주인공 은빛연어가 고향을 떠나 대양을 떠돌다가 모천으로 돌아오듯 고향으로 돌아와 청착해 살고 있는 시인의 편안한 일상은 누구나 닮고 싶은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안도현 시인이 쓴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의 주인공 은빛연어가 고향을 떠나 대양을 떠돌다가 모천으로 돌아오듯 고향으로 돌아와 청착해 살고 있는 시인의 편안한 일상은 누구나 닮고 싶은 모습이 아닐 수 없다. / ⓒ박상봉 기자

안도현 시인이 쓴 어른을 위한 동화 ‘연어’는 주인공인 은빛연어가 고향을 떠나 대양을 떠돌다가 모천으로 돌아와 생을 마감하는 얘기다.

안도현 시인은 마치 마치 연어처럼 때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와 청착해 살고 있다. 부럽다. 시인의 편안한 일상은 누구나 닮고 싶은 모습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안도현의 빼어난 여러 시편들 중에서 개인적으로 1982년 9월25일 발행된 시의 생활화 메시지 '국시' 팜플렛 제6호에 발표한  ‘풍산국민학교’를 가장 좋아한다. 

고 계집애 덧니 난 고 계집애랑 / 나랑 살았으면 하고 생각했었다 1학년 때부터 5학년 때까지 / 목조건물 삐걱이는 풍금소리에 감겨 자주 울던 아이들 / 장래에 대통령 되고 싶어하던 그 아이들은 / 키가 자랄수록 젖은 나무그늘을 찾아다니며 앉아 놀았지만 / 교실 앞 해바라기들은 가을이 되면 저마다 하나씩의 태양을 품고 / 불타 올랐다 운동장 중간에 일본놈이 심어놓고 갔다는 / 성적표만한 낙엽들을 내뱉던 플라타너스 세 그루 / 청소시간이면 나는 자주 나뭇잎 뒷면으로 도망가 숨어 있었다 / 매일 밤마다 밀린 숙제가 잠끝까지 따라 들어오곤 하였다 / 붉은 리트머스 종이 위로 가을이 한창 물들어갈 무렵 / 내 소풍날은 김밥이 터지고 운동회날은 물통이 새고 / 그래, 그날 주먹 같은 모래주머니 마구 던져대던 폭죽 터뜨리기 / 아아 그때부터였다 청군 백군 서로 갈라져 / 지금에 이르고 감추어둔 비둘기와 오색종이 가루를 찾기 위하여 / 우리가 저 높은 곳으로 돌멩이 같은 것을 던지기 시작한 것은, / 그런데 소식도 없이 기러기 기러기는 하늘에다 길을 내고 / 겨울이 오면 아이들은 변방으로 위문편지를 쓰다가 / 책상 위에 연필 깎는 칼로 휴전선을 그었다. / 그 부끄러운 흔적 지우지 못하고 6학년이 되었을 때 / 가슴 속 따뜻한 고향을 조금씩 벗겨내며 처음으로 / 나는 도시로 가고 싶었다 그렇지만 날이 갈수록 고 계집애 / 고 계집애는 실처럼 자꾸 나를 휘감아왔다. / '풍산국민학교' 전문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