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권 전 원불교문인협회장, 칼럼니스트

조화의 선

추석 연휴를 잘 보내셨는지요? 저 역시 원불교여의도교당에서 조상을 위한 합동향례도 올리고 연휴동안 적지 않은 분들이 <덕산재(德山齋)>를 찾아 차담(茶談)과 도담(道談), 주담(酒談) 까지 즐겼습니다. 그런데 그런 모임에선 유독 성품이 강한 분이 있기 마련이지요. 꼭 정치얘기만 나오면 강하게 자기주장을 하여 주위 사람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합니다.

상용(商容)은 노자(老子)의 스승으로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가 세상을 뜨려 하자 노자가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상용이 말합니다. “혀가 있느냐?” “네 있습니다.” “이(齒)는?” “하나도 없습니다.” 상용이 묻습니다. “알겠느냐?” 노자가 대답합니다. “강한 것은 없어지고 부드러운 것은 남는다는 말씀이시군요.”라고 말하자 상용은 이제 됐다는 듯 돌아누웠습니다. 노자의 유약겸하(柔弱謙下) 즉, 부드러움과 낮춤의 철학이 여기서 나온 것이라 합니다.

강한 것은 남을 부수지만 결국은 스스로가 먼저 깨지고 맙니다. 부드러움이라야 오래 가는 것이지요. 어떤 충격도 부드러움 앞에서 무력해집니다. 강과 강이 부딪히면 결국 둘 다 상하고 맙니다. 고인 물은 금방 썩습니다. 물은 흘러야 썩지 않는 법이지요. 세상에 물만큼 부드러운 것이 없습니다. 자연의 모든 법칙은 순환 속에 영원함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부드러운 역할을 해야 되는 것은 어떤 부분일까요? 바로 자신이 타고난 인성(人性)과 성품(性品)입니다. 누구라도 가지고 있는 성격의 모난 점은 그것이 어떤 개성이든 간에 강한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개성이 강한 사람이 고집과 독선으로 뭉친 강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다툼을 일으키고 평화를 깨뜨리게 하는 암적인 존재들이 많이 나옵니다.

그래서 타고난 성품의 장단점을 조절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자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그렇다고 강한 성격을 가졌다 해도 모두다 독불장군처럼 사는 것은 아닙니다. 스스로가 개선해 보려는 수도(修道)를 전혀 안한 탓이지요. 젊은 시절의 제 모습이 ‘부러질지언정 휘어지지는 않는 성품’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랜 세월 수행(修行)을 통해 오늘의 제 모습으로 가꾸어 진 것입니다.

이렇게 한쪽으로 치우쳐진 성품을 부드러운 기운으로 조절하는 것, 그것이 노자가 말한 조화(調和)의 선(善)이 아닐까요? 공자(孔子 : BC 551~BC 479)가 노자(老子 : 생몰미상)를 만나러 갔습니다. 겸양의 미덕을 주창(主唱)하신 노자와 공자는 거의 동시대의 인물이었던 모양입니다. 다만 사마천(司馬遷)의《사기(史記)》에 ‘늙은 노자를 젊은 공자가 51세 때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그 노자는 춘추시대의 사상가이자 도가(道家)의 창시자였습니다. 도교에서는 노자를 노군(老君) 또는 태상노군(太上老君)으로 신성화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인 인의(仁義)와 도덕에 구애되지 않고 만물의 근원인 도(道)를 좇아서 살 것을 역설하고,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존중한 분입니다.

공자는 위의(威儀)를 바로하고 노자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께서는 인격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인격은 비인격적일 때 인격을 운위(云謂)하는 법이라오” 공자가 다시 묻습니다. “선생께서는 윤리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윤리란 비윤리적일 때 윤리를 말하는 법이요”

공자의 가르침이 학생들에게 이리 가라 저리 가라하고 줄을 바로 세우려고 애를 쓰는 것이라면, 노자는 가만 두어도 걸을 때 되면 걷고, 밥 먹을 때 되면 밥 먹으니 간섭 말고 놓아주라는 것과 같지 않은가요? 공자에게는 인격이나 윤리가 중요하지만, 노자는 그것을 뛰어넘습니다. 선(善)과 악(惡)은 공존합니다. 이분법으로 나누지 말라는 것이지요.

노자는 <무임(無任)>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서른 개의 수레바퀴 살이 한 개의 수레바퀴 통으로 모아져 있는데, 그 중간 아무 것도 없는 곳에 굴대가 끼워져 수레는 쓰일 수가 있게 된다. 진흙을 반죽하여 그릇을 만들 때, 그 중간에 아무 것도 없음으로써 그릇은 쓰임새가 생기게 된다. 문과 창을 내어 집을 만들 때, 그 중간에 아무 것도 없음으로서 집은 쓰임새가 있게 된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이롭게 쓰이게 되는 것은, 없는 것의 쓰임이 있기 때문인 것이다.”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표는 지난 대선 때부터 거침없이 막말을 쏟아냈습니다. 대표적인 ‘막말 정치인’으로 낙인이 찍혀 있지요. 그뿐만 아닙니다. 나이를 가리지 않고 마치 하대하는 듯 반 말투로 말을 함부로 해 그를 만나는 사람마다 불쾌해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난 대선에서 홍대표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크게 패한 것은 보수의 기질을 홍 대표가 오판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보수는 입이 가볍거나 행동이 경솔해서는 안 됩니다. 그게 바로 보수의 모습이지요. 그 속에서 위엄을 뿜는 것이 보수 아닌가요? 그래서 보수가 무서운 것입니다.

그런데 홍대표의 막말은 보수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보수의 명예를 떨어뜨립니다. 막말이나 반말은 점잖은 보수층으로 하여금 큰 실망감을 줍니다. ‘유약겸하(柔弱謙下)!’ 부드럽고 유연하며 겸손하게 낮추는 것이 강한 것을 이깁니다. “좀 더 품격 있는 언어를 사용하고 상대방 가슴에 못 박는 얘기는 가능하면 삼가면 얼마나 좋을까요?

윈스턴 처칠이 이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당신처럼 존경받는 인격을 갖추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비결 같은 것은 없습니다. 상대방을 미소 짓게 하려면, 먼저 미소를 지으세요. 관심을 끌고 싶으면, 그들에게 먼저 관심을 보이세요. 칭찬을 듣고 싶으면, 먼저 칭찬하세요. 사람들은 당신이 그들을 대접하는 대로 당신을 대접합니다. 간단합니다. 비결 같은 건 없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요.”

홍준표 대표뿐만이 아닙니다. 무릇 남의 위에 서고자 하는 이는 누구나 ‘조화의 선’ ‘유약겸하’의 교훈을 가슴에 새겨야 합니다. 강하면 부러집니다. 교만(驕慢)이 많으면 사람을 잃고, 겉치레(外飾)가 많으면 진실을 잃어버립니다. 사람을 잃으면 세상을 버림과 같고, 진실을 잃으면 자기를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나를 낮추고 겸양의 미덕을 실천해가는 사람이 되어야합니다. 그러면 만인의 존경을 받고 세상에 우뚝 서게 되지 않을 까요!

단기 4350년, 불기 2561년, 서기 2017년, 원기 102년 10월 10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 본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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