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거사결(林居四訣)

사람들이 젊어서 죽기 살기로 뛰다가 지치면 은퇴 후, 전원생활을 하면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겠다는 꿈을 꿉니다. 그런데 그게 맘먹은 대로 돼야 말이지요. 노후에 전원생활을 하며 한가롭게 지내는 것도 전생에 큰 복을 지어야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정조 때 좌의정을 지낸 유언호(1730~1796)는 기복이 많은 삶을 살았습니다. 잘 나가다 40대에 이르러 흑산도 로 유배를 갔고, 이후 복귀해서 도승지와 대사헌 을 지낸 후에 또 다시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갔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벼슬길의 잦은 부침은 진작부터 그로 하여금 유유자적하는 전원의 삶을 꿈꾸게 했습니다.

한번은 그가 지방에 있다가 임금의 급한 부름을 받았습니다. 지체할 수 없는 어명(御命)인지라 역마를 급히 몰아 한양으로 향했지요. 그런데 그날따라 장맛비가 주룩주룩 내려 길이 온통 엉망진창 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옷이고 뭐고 행색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주막집을 지날 무렵 한 아낙네가 어린 자식을 무릎에 눕혀놓고 머릿니를 잡아주고 있었습니다.

아이는 긁어줄 때마다 시원하다고 웃고, 어미는 자식의 이가 줄어드는 것을 기뻐했지요. 둘이 천진스레 깔깔대며 즐거워하는 모습에 참다운 정이 가득해 보였습니다. 그는 진창 속에 비를 맞고 말을 달리다가 잠깐 스쳐 본 그 광경에 자신도 몰래 깊은 탄식 어린 인상을 받았지요.

그러면서 나는 지금 어디로 달려가는가? 삶의 천진한 기쁨은 어디에 있는가? 이후로 그는 부산 스럽기만한 벼슬길에 회의를 느껴 어버이 봉양을 핑계대고 사직을 했습니다. 그런 후 초야에 조용히 묻혀 지내며 옛 사람의 맑은 이야기를 가려 뽑아 <임거사결(林居四訣)>란 책자를 엮어 냈습니다.

전원에 사는 비결로 꼽은 네 가지는 ‘달(達), 지(止), 일(逸),적(適)’ 이었습니다.

첫째, 달(達)입니다.

달은 툭 터져 달관(達觀) 하는 마음인데, 견주어 계교(計巧)하는 마음을 걷어내야 달관의 마음이 열린 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주막집 아낙의 천진함과 조정대관의 영화를 비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둘째, 지(止)입니다.

지는 있어야 할 곳에 그쳐 멈추는 것입니다. 욕심은 늘 끝 간 데를 모르니 그쳐야 할 때 그칠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끝장을 보려 들면 절대 안 되는 것입니다. 한 번 멈추는 것입니다. 화가 불 같이 나도 한 번 멈추어 깊이 숨을 내 쉬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에 평화가 찾아오는 것이지요.

셋째, 일(逸)입니다.

일은 은일(隱逸), 즉 속세를 피해 숨는 것입니다. 새가 새장을 벗어나 창공을 날 듯, 훌훌 털고 일어나 숨는 것이지요. 달관하여 멈춘 뒤라야 두 손에 움켜쥐었던 것을 내려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넷째, 적(適)입니다.

적은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편안히 내맡기는 것입니다. 물아양망(物我兩忘), 즉 나와 사물을 모두 잊는 것입니다. 마음의 경계(境界)가 터져야 비로소 열려 그제 서야 깔깔대며 웃을 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바세계(娑婆世界)에 지친 사람들은 늘 전원을 꿈꾸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마저도 마음의 준비 없이는 견디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유유자적하는 생활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요? 그래서 저는 한 10여 년 전에 강남역 근처의 복잡한 아파트에 살다가 모든 것을 뿌리치고 지금의 <덕산재(德山齋)>로 이사를 했습니다. 창문만 열면 끝없이 펼쳐지는 광야가 전개 됩니다. 밤이면 보름달이 창밖으로 두둥실 떠오릅니다. 아침이면 동쪽 하늘에서 붉은 태양이 벙긋 웃습니다.

왼 쪽을 보면 북한선의 높은 봉우리가 저를 손짓해 부릅니다. 오른 쪽을 보면 한강수가 유유히 흐릅니다. 무엇보다도 공기가 좋아 천식으로 고생하던 집사람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앗습니다. 일산의 자랑인 호수공원과 일산병원이 가까이 있어 그야말로 신선놀음이 따로 없습니다.

시련과 역경 속에서 사람의 본바탕이 드러나게 됩니다. 좌절의 시간에 그대로 주저앉고 마는 사람과 그 시간을 자기 발전의 밑바탕으로 삼는 사람도 있지요. 평소의 마음공부에서 나온 삼대력의 힘이 있고 없고에 따라 이 차이를 낳는 법입니다. 모두가 하루하루 바쁜 일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면서 누구나 바쁜 일상에서의 탈출을 꿈꾸기도 하지만 그 꿈을 이루지 못합니다.

어찌하면 바쁜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달(達), 지(止), 일(逸),적(適)’ 이 네 가지 비결(祕訣)을 과감히 실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임거사결로 마음의 평화와 말년의 여유를 만끽해 보는 것이 어떨 까요!

단기 4353년, 불기 2564년, 서기 2020년, 원기 105년 7월 21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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