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만장한 인생 여정, 시(詩)의 불씨 꺼트리지 않은 한국시단의 풍운아 박기영 시인

2016년 9월 2일 경북 구미시 형곡동 카페공간 갤러리에서 박기영 시인의 두번째 시집 '맹산식당 옻순비빔밥' 출판기념회 및 수요문학포럼이 열렸다. 왼쪽부터 이하석, 박기영, 안도현 시인과 이춘호 영남일보 기자가 패널톤론에 열중하고 있다./ⓒ박상봉
2016년 9월 2일 경북 구미시 형곡동 카페공간 갤러리에서 박기영 시인의 두번째 시집 '맹산식당 옻순비빔밥' 출판기념회 및 수요문학포럼이 열렸다. 왼쪽부터 이하석, 박기영, 안도현 시인과 이춘호 영남일보 기자가 패널톤론에 열중하고 있다./ⓒ박상봉

식당 문 열고 들어가면 / 서툰 솜씨로 차림표 위에 써놓은 글씨가 / 무르팍 꼬고 앉아, 들어오는 사람 / 아니꼬운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 “옻오르는 놈은 들어오지 마시오.” // 그 아래 난닝구 차림의 주인은 / 연신 줄담배 피우며 / 억센  이북 사투리로 간나 같은 / 남쪽 것들 들먹였다. // “사내새끼들이 지대로 된 비빔밥을 먹어야지.” // 옻순 올라와 봄 들여다 놓는 사월 / 지대로 된 사내새끼 되기 위해 / 들기름과 된장으로 버무려놓은 비빔밥을 먹는다. / 항문이 근지러워 온밤 뒤척일 / 대구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을 먹는다. // 옻오르는 놈은 사람 취급도 않던 노인은 / 어느새 영정 속에 앉아 / 뜨거운 옻닭 국물 훌쩍이며, 이마 땀방울 닦아내는 / 아들 지켜보고 웃고 // 칠십년대 분단된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무서운 / 욕을 터뜨리던 음성만 / 옻순비빔밥 노란 밥알에 뒤섞여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 “옻올랐다고 지랄하는 놈은 김일성이보다 더 나쁜 놈이여.”// ―박기영 시인의 '맹산식당 옻순비빔밥' 전문

요즘 먹방이 유행이다. 먹방은 ‘먹는 방송’의 줄임말로 드라마나 예능 등 공중파와 케이블 채널은 물론 인터넷 매체까지 음식과 요리를 다루는 프로가 넘쳐난다.

심지어 페이스북에도 식당이나 음식 이야기를 포스팅하면 조회수가 더 많이 올라갈 정도다. 먹방이 대세라서 그런지 음식을 소재로 쓴 시편들을 묶어낸 입맛 다시게 하는 특별한 시집이 문단의 주목을 끌었다.

박기영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맹산식당 옻순비빔밥'(모악, 2016)은 대부분이 음식에 대한 시들이어서 대충 목차만 훑어봐도 이 시집의 차림판이 한껏 맛깔스럽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박기영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맹산식당 옻순비빔밥'. 대부분 음식에 대한 시들이어서 대충 목차만 훑어봐도 이 시집의 차림판이 한껏 맛깔스럽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박상봉
박기영 시인의 두 번째 시집 '맹산식당 옻순비빔밥'. 대부분 음식에 대한 시들이어서 대충 목차만 훑어봐도 이 시집의 차림판이 한껏 맛깔스럽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박상봉

특히 낯선 북한음식과 옻요리가 주로 등장해 더 독특하다.

특유의 이북 사투리와 거침없는 언어로 토속적인 음식 속 개인사와 실향민으로 살아온 이산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기억을 시로 되살려냈다.

'오소리술'  '저담기(猪膽記)'  '어육계장'  '육포탕' '곰순대'  '호박잎찜' '꿩냉면' '정구지김치' '청국장반대기' '감자수제비' '상어돔베기'……등등 독특한 소재들은 문단의 반향과 독자들의 주목을 끌어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시집 발문에서 이문재는 “아버지로부터 전수받은 북녘 고향의 맛과, 자라면서 맛봐온 이남의 음식들을 적극적이고 새롭게 수용함으로써 자연을 자신의 삶 속으로 끌어들이고 사람살이의 참맛으로 우려내고 있다"고 평가했다.

손택수 시인은 “눈보라 몰아치는 낭림산맥의 쩌렁쩌렁한 얼음 골짜기를 닮은 이 아찔한 해발의 언어란 실로 얼마 만에 만나보는 장관인가. 그 배후에 분단과 실향, 상처로 얼룩진 근대의 그늘이 있다. 시인은 비애와 상처마저도 특유의 무뚝뚝한 어법으로 감칠맛 나는 요리가 되게 한다”고 상찬(賞讚)했다.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은 박기영 시인이 지난 1991년 민음사에서 첫 시집 '숨은 사내'를 내고 홀연히 문단에서 사라졌다가 25년만에 불쑥 내어놓은 시집이라 더 주목받았다.

그는 1979년 당시 열일곱 살이던 장정일을 처음 만나 문학의 길로 인도하였고, 그가 첫 시집 '햄버거에 대한 명상'을 내고 김수영 문학상을 받을 때까지 이끌어준 스승으로도 문단에서 널리 회자되어온 인물이다.

그동안 박기영은 KBS 방송작가 및 프리랜서 연출가로 여러 프로그램의 제작에 참여했으며,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등 한동안 문학을 떠나 있었다.

그래서인지 두 번째 시집에는 시를 내려놓고 시를, 찾아다녔던 시인의 굴곡진 삶의 등고선이 진하게 그려져 있다.

“그동안의 그의 역정을 떠올리면 가히 파란만장인데, 그러한 역정 가운데서도 시의 불씨를 꺼트리지 않고 간직해온 게 신기하고도 고마울 따름”이라는 이하석 시인의 ‘발문’처럼, 시집에는 박기영 시인의 원초적 생명력과 야성(野性)이 잘 드러나 있다.

박기영 시인은 충북 옥천의 돈키호테다.

연고도 없는 곳에 들어와서 터를 잡고 마을 사람들과 함께 옻된장과 옻간장 등 토속음식을 지역 특화식품으로 자리잡게 하고 좌충우돌 뛰어다니며' 옥천을 기어히 옻특구로 만들어낸 장본인이다.

눈보라 몰아치는 낭림산맥의 쩌렁쩌렁한 얼음 골짜기를 닮은 박기영 시인은 원초적 생명력과 야성(野性) 넘쳐나는 생김새 때문인지 뭇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 사진은 왼쪽부터 시낭송가 구은주, 이복희, 박기영 시인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박상봉
눈보라 몰아치는 낭림산맥의 쩌렁쩌렁한 얼음 골짜기를 닮은 박기영 시인은 원초적 생명력과 야성(野性) 넘쳐나는 생김새 때문인지 뭇여성들에게 인기가 높다. 사진은 왼쪽부터 시낭송가 구은주, 이복희, 박기영 시인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박상봉

그가 옥천으로 숨어들어 시골 생활을 시작한 지도 올해로 벌써 16년째다.

시인이 살고 있는 집에는 250년 되었다는 옻나무와 옻샘이 있다. 박기영 시인과 옻나무. 너무 잘 어울리는 단짝이다.

이곳을 제2의 고향으로 삼은 이유는 대구시 안지랑이 입구 앞산 대덕식당 자리에 ‘맹산옻식당’을 하던 아버지에 대한 추억 때문이다. 박기영 시인은 “옻나무는 나와 아버지를 연결해 주는 고리였고, 내 청소년기를 지켜온 숱한 가능성을 지닌 나무였다”고 고백한다.

나는 문학청년 시절 그의 아버지를 여러번 뵌 적 있다.

평안남도 맹산 포수였던 아버지는 포수 출신답게 덩치가 크고 목소리도 우렁우렁했다.

한번은 문우들과 ‘맹산옻식당’으로 초대 받아 멧돼지 고기와 노루, 꿩고기 따위를 배터지게 먹는 중인데 갑자기 아버지가 나타났다. 그때 머리 뒷꼭대기에 천둥 소리가 들렸다. “종간나 새끼들 뭐이 쳐먹고들 자빠졌간?”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무서운 욕을 터뜨리던 벼락 같은 음성이 아직도 귓가를 떠나지 않는다.

박기영 시인의 시 ‘꿩냉면’을 한번 읽어보자.

“메밀마저 고향 잃고 / 비틀거리는 냉면틀 빠져나와 / 설설 끓는 아버지의 땀방울 아래로 / 떨어져 내리고 / 끈기없는 메빌발 솥바닥 닿기 전 / 회초리보다 가는 국수칼로 / 아버지는 서러운 피난살이를 끊어냈다 // 얼음살 하얗게 내린 / 붉은 갓물 든 동치미 냉면 사발에 / 손으로 빈대떡 뜯어 넣으며 / 아버지는 수십 년 전 두고 온 고향 / 들여다보고 계셨다.”

이북에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이 들여다보인다.

그가 옥천에 터를 닦고 살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봄이 되면 그곳을 찾아 옻순 먹는 일을 연례행사로 삼고 있다.

옻순을 먹지 못한 해는 좀이 쑤신다. 올 봄에는 코로나19와 이상 기온 때문에 옻순을 먹지 못해 많이 아쉽다.

박기영 시인은 1959년 충남 홍성에서 태어났다.

1982년 대구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사수의 잠'이 당선되고 우리시대의 문학 등에 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문단활동을 시작했다.

'국시'와 '시운동'  동인으로 활동했고 1985년 장정일과 2인시집 '聖·아침'(청하)을, 1991년 첫 시집 '숨은 사내'(민음사)를 펴냈다.
그 후 무려 사반세기 만에 두 번째 시집 '맹산식당 옻순비빔밥'(모악, 2016)을 내어놓았다.

1987년부터는 KBS 방송작가로 ‘6시 내고향’ 등 여러 프로그램 제작에 참여하고, 프리랜서 연출가로 활동했다.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가 2002년 귀국했다. 현재 충북 옥천에서 옻된장 등 옻과 관련된 음식과 상품을 개발하면서 시와 소설 쓰기에 몰두하고 있다.

4년 전 일이다.

박기영 시인이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을 출간했을 때 구미지역에 문학의 텃밭을 일구고 30년간 오랜 전통을 이어온 수요문학회(회장 박상봉)가 구미시 형곡동 카페공간에서 출판기념회를 마련해주었다.

‘시나락 까먹는 소리’라는 테마로 열린 이날의 문학포럼에는 류경무 시인의 진행으로 이하석, 안도현 시인 등이 박기영 시인의 ‘삶과 시, 삶 같은 시, 시 같은 삶’에 대해 조망하였고, 북한음식과 옻에 대한 만담을 펼쳤다.

4년 전 박기영 시인이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을 출간했을 때 수요문학회가 경북 구미 형곡동 카페공간에서 출판기념회를 마련해주었다. 시낭송가 구은주 씨가 안도현 시인의 '구월이 오면'을 낭송하고 있다./ⓒ박상봉
4년 전 박기영 시인이 '맹산식당 옻순비빔밥'을 출간했을 때 수요문학회가 경북 구미 형곡동 카페공간에서 출판기념회를 마련해주었다. 시낭송가 구은주 씨가 안도현 시인의 '구월이 오면'을 낭송하고 있다./ⓒ박상봉

이날 행사에는 시낭송가 구은주 씨가 안도현 시인의 '구월이 오면'을 낭송하고, 권미강, 이복희 등이 박기영 시인의 시를 한편씩 낭송하였다. 또 시인이 직접 요리하는 북한 음식을 나누는 뒷풀이 자리도 가졌다. 실로 오랜만에 가진 격의 없는 질펀한 문학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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