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 人物論(26) 협객들의 삶과 죽음의 뜻

[뉴스프리존] 협객은 풍부한 이상과 생명에 대한 진지한 안목을 가진 사람들이다.

춘추전국시대의 협객(俠客)은 낭만적인 기질을 지닌 인간군상이였다.
도덕과 윤리가 땅에 떨어져 인심이 흉흉한 세태 속에서도 그들은 전통적 이상을 가슴속에 간직하고 손에 든 검으로 현실을 구제하려했고, 현실 속에서 살면서도 현실을 초월하려 했다.

'형가(荊軻, ?~기원전 227년)'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암살하려 했던 인물/ⓒ출처:[史記列傳(사기열전)] 권86 刺客列傳(자객열전)편
'형가(荊軻, ?~기원전 227년)'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를 암살하려 했던 인물/ⓒ출처:[史記列傳(사기열전)] 권86 刺客列傳(자객열전)편

형가(荊軻)는 위나라 사람이었으나 나중에 연(燕)나라로 이주했다. 그는 독서와 검술을 좋아하여 제후국들을 돌아다니며 검술에 관해 유세했지만 지기를 만나지 못하다가 연나라로 가서야 비로소 고점리(高漸離)라는 사람을 만나 지기가 되었다. 고점리는 축(築)이라는 악기를 잘 다루었다. 두 사람은 저잣거리에서 만나 함께 술잔을 기울였고 술이 얼큰해지면 고점리가 축을 두드리고 형가가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다가 노래가 끝나면 둘이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 아무도 형가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연나라의 전광(田光)이란 처사가 그를 알아보고 극진히 대우했다. 전광은 형가가 원대한 포부를 가슴에 품은 인물임을 알아본 것이었다.

당시 연나라 태자 단(丹)은 진왕과 몹시 사이가 좋지 않았다. 진에 인질로 있던 단이 연으로 도망쳐오자 진은 이를 구실로 연의 서쪽을 공격하여 수많은 성지를 빼앗고 연을 직접적으로 위협하기 시작했다.

태자 단은 보복하고 싶었지만, 국력이 약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때 진의 대장 번어기(樊於期)가 범죄를 저지르고 연으로 도망쳤다. 진왕 영정은 즉시 번어기의 일가족을 몰살하고 그를 잡기 위해 현상금을 내걸었다. 태자 단이 번어기를 받아들여 후하게 대우하자 태부(太傅)인 국무(鞫武)는 이를 위험하게 여겼다. 진이 이를 구실로 즉시 공격해올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이에 국무는 번어기를 흉노에게 보낼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단은 궁지에 몰려 찾아온 사람을 위태롭게 할 수 없다면서 계속 그를 보호해 주었고, 번어기는 크게 감동했다. 태자의 이런 태도를 본 국무가 말했다.

“전광이라는 장사가 있는데 학문이 넓고 생각도 아주 깊은 인물입니다. 그에게 묘책을 부탁해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태자 단은 연장자인 전광에게 예를 갖춰 깍듯이 대했고, 전광은 태자의 상황 설명을 다 듣고 나서 말했다.

“태자께서는 제가 젊었을 때의 명성만 들으셨지 제가 이미 늙어서 아무짝에도 쓸모없게 됐다는 얘긴 못 들으신 모양이군요! 이일을 형가에게 맡기시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태자 단은 전광을 배웅하면서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늘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국가의 기밀이니 절대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마십시오.”

전광은 방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떡였다. 전광은 형가를 만나 저간의 사정을 말하고 나서 한마디 덧붙였다.

“듣건대 뛰어난 사람은 일을 시킬 때 사람을 의심하지 않는다고 하던데 태자 단은 제게 ‘절대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말라’고 합니다. 이는 저를 의심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누군가에게 일을 시키면서 그를 의심하는 것은 절개와 의협심이 부족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태자 단을 만나시거든 제가 이미 죽었기 때문에 말이 샐 염려는 하지 않아도 된다고 전해주십시오.”

이렇게 말하고 나서 그는 스스로 목을 베어 자살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형가에게 자극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형가는 즉시 태자 단을 찾아가 전광의 죽음을 알렸고 단은 통곡하며 슬퍼했다. 두 사람은 상의에 상의를 거듭한 끝에 연이 진의 공격을 막아내는 일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유일한 계략은 진왕을 죽여 연을 보전하는 것뿐이었다. 그리하여 형가는 태자 단에게 진왕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태자 단은 형가를 후하게 대우하면서 매일 그를 찾아가 재물과 미녀를 제공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났는데도 형가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자 단이 물었다.

“지금 진의 장군 왕전이 이수를 건너려고 하는데, 그렇게 되면 저도 형경을 오래 받들지 못할 것 같소.”

형가가 말을 받았다.

“그렇지 않아도 제가 말하려고 했습니다. 제가 빈손으로 돌아가면 진왕이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번어기의 목과 연에서 가장 비옥한 독항의 지도를 가지고 가서 진왕에게 헌상한다면 틀림없이 절 믿을 것입니다. 그러면 저는 적절한 기회를 잡아 진왕을 죽이겠습니다.”

태자 단은 번어기를 죽이는 것이 의롭지 못한 일이라 생각하여 그의 말을 따르기를 거부했다. 그러자 형가는 직접 번어기를 찾아가 말했다.

“진왕이 당신 가족을 몰살하고 황금 천 냥과 만 호의 식읍을 현상금으로 내걸고 당신을 찾고 있소. 내게 당신의 원수를 갚을 방법이 하나 있는데, 다름 아니라 당신의 목을 이용하여 진왕의 신임을 산 다음 그를 죽이는 것이오.”

번어기는 형가의 말에 동의하고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을 베어 자결했다.

태자 단은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와 그의 시신을 안고 통곡했다. 하는 수 없이 태자 단은 그의 목을, 함에 담고 독항의 지도를 준비하여 형가에게 건넸다. 그리하여 형가는 태자 단에게 금 백 양으로 조나라 사람 서부인(徐夫人)이 만든 천하에서 가장 날카로운 비수를 사들이게 하고 장인(匠人)을 시켜 비수에 독약을 묻힌 다음 이를 직접 사람에게 시험해보았다. 또 그는 진무양(秦舞陽)을 조수로 고용했다. 진무양은 연나라의 용사로 열세 살 때 이미 사람을 죽인 경험이 있어 사람들은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이제 모든 준비가, 갖추어진 셈이었다.

형가는 진으로 들어가는데 필요한 동행인이 먼 곳에 거주하고 있어 잠시 출발을 미루고 있었다. 태자 단은 형가의 마음이 변한 것으로 판단하고 그에게 물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형경께서는 진으로 가실 의향이 없으십니까? 그렇다면 진무양을 먼저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이 말에 형가는 버럭 화를 내며 말했다.

“뭘 그리 재촉하시오! 나는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오. 게다가 내가 비수를 꽂아야 할 사람은 예측하기 어려운 강적인 진왕이라 필요한 사람을 한 명 더 데리고 가기 위해 잠시 시일을 미루고 있는 것뿐이오. 태자께서 너무 늦었다고 생각하신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떠나도록 하겠소이다.”

태자의 빈객(賓客)들, 그리고 이 일에 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이 모두 흰옷을 입고 이수 강가로 나가 그를 전송했다. 제사와 전송이 끝나고 형가가 발길을 떼기 시작하자 고점리는 축을 두드렸고 형가는 이에 맞춰 노래를 불렀다. 고결하고 비장한 음악 소리에 전송하러 나온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뿌렸다. 형가의 노래는 점점 높아져 갔고 마침내 노래가 끝나자 고점리의 축 소리도 잦아들었다.

진으로 간 형가는 비수를 지도에 말아 궁중으로 들어갔다. 번어기의 목을 바치고 진왕의 신임을 얻은 그는 진왕이 지도를 살펴보는 틈을 이용하여 진왕의 옷소매를 움켜쥐고 비수를 들이댔다. 그러나 진왕은 재빨리 몸을 일으켜 기둥 뒤로 도망친 다음 검을 뽑아 형가의 허벅지를 내리쳤다. 진왕을 붙집을 수 없게 된 형가는 진왕의 등을 향해 비수를 던졌지만 그 비수도 구리 기둥에 부딪혀 떨어지고 말았다. 몸에 여덟 군데나 상처를 입은 형가는 일이 성사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기둥에 몸을 기댄 채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진왕을 죽이지 못한 것은 진왕을 기습하여 죽이는 데 전념하지 못하고 태자 단에게 보답하려는 마음만 앞섰기 때문이다!”

진왕을 죽이려던 형가의 계획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나 이는 배신과 술수가 난무하는 당시로 서는 대단히 정의로운 행동이었고, 특히 형가가 약속을 중시하고 죽음으로써 지기에게 보답하려 한 정신은 후세인들의 칭송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한편 전제(專諸)도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자객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오나라 공자 광(光)은 오왕 요(僚)를 죽이려 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광은 오왕 제번(諸樊)의 친아들이었으나 태자로 책봉되지 못했다. 제번에게는 여제(余祭)와 이미(夷眯), 계자찰(季子札) 등 세 명의 동생이 있었는데, 그중 계자찰이 가장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 그에게 왕위를 넘겨주려는 생각에서였다. 제번이 죽은 후에 왕위는 여제에게 이어졌고 여제가 죽자 이미가 왕위를 이어받았다. 또 이미가 죽은 후에는 왕위가 계자찰에게로 이어졌지만, 계자찰은 왕이 되기 싫어 외지로 도망쳤다. 결국 오나라 사람들은 이미의 아들인 요를 오왕으로 세웠다.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이는 정리(正理)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발생한 일이었다. 계자찰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이 제번의 소망이었다면 요에게 왕위를 물려준 것은 합리적이지 못한 일이라 마땅히 제번의 아들인 광에게 왕위를 돌려주어야 했다. 이 때문에 광은 원한을 품고 오왕 요를 살해하려 한 것이다.

광은 오자서를 통해 전제를 알게 되었는데, 그가 대단히 용감하고 도의를 중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그에게 예를 다했고 특히 그의 모친을 극진히 모셨다. 상당한 시간 동안 광의 행동을 지켜본 전제는 그의 극진한 대우에 감격했다. 자기처럼 평범한 사람이 그토록 극진한 예우와 존경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그져 감격스럽고 행복할 따름이었다.

어느 날 전제는 광에게 자신을 후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게 되었고, 광은 전제를 진심으로 존경한다는 말과 함께 자신이 왕위를 잃게 된 사연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왕위를 빼앗는다면 이는 지극히 정의로운 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얘기를 다 듣고 난 전제는 자신이 오왕 요를 죽이겠다고 약속했다. 광은 깊은 감사의 뜻을 표하면서 전제의 자녀들을 자신의 자녀로 삼아 최선을 다해 양육 할 것이며, 전제가 죽게 되면 제사를 지내주겠다고 약속했다.

몇 년 후 오왕 요는 초나라를 공격했고 광은 조정이 소란스러워진 틈을 이용해서 오왕 요를 죽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요를 술에 취하게 할 요량으로 자신의 집으로 유인했고 사전에 군사를 매복시켰다. 오왕 요도 광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터라 왕궁에서 광의 집 대문까지 호위병들을 세워놓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게다가 문 앞에 대기한 사람들은 전부 오왕 요의 친척들이었다.

술이 거나해졌을 때쯤 광은 발이 아파 신발을 갈아 신어야겠다는 핑계를 댄 후 전제에게 비수를 생선 배속에 감추고 들어가 음식을 내놓는 척하면서 오왕 요를 죽이라고 지시했다. 전제는 광의 지시대로 오왕에게 생선요리를 바치는 척하다가 갑자기 비수를 꺼내 오왕을 찌르려 했다. 오왕이 피하며 쓰러지는 순간 호위병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어 전제를 죽였다. 이때 광이 매복하고 있던 군사를 지휘하여 오왕과 호위병, 그리고 그의 친척들까지 모조리 죽이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왕권을 찬탈하자마자 그는 전제의 아들을 고관에 임명했다.

또한 「전국책」에는 섭정(聶政)이란 인물에 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를 존경하고, 중용했던 엄중자(嚴仲子)의 행적을 살펴볼 수 있다.

섭정은 지읍 심정리 사람으로 사람을 죽인 뒤 보복을 피해 모친과 누이를 데리고 멀리 제나라로 도망하여 가축 도살을 업으로 삼아 살아가고 있었다. 한편 한양의 엄중자는 한(韓) 애후(哀侯)를 섬기면서 재상 협루(俠累)와 원한 관계에 있다가 협루의 협박에 못 이겨 도망치는 신세가 되었다. 그는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면서 자신의 원한을 갚아줄 사람을 물색하고 있던 차에 섭정이 용감한 무사인데 성과 이름을 감추고 제나라 백성으로 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엄중자는 수소문 끝에 섭정의 집을 찾고 여러 차례 방문을 거듭했다. 때로는 술과 음식을 준비하여 섭정의 모친에게 보내주기도 했다. 하루는 황금 백 일(鎰-24냥)을 섭정의 모친에게 바치면서 장수를 기원했다. 섭정은 엄중자의 후한 관심과 배려를 이상하게 여기면서 황금 받기를 사양했다. 그러나 엄중자가 집요하게 고집하자 섭정은 완곡하게 거절하면서 말했다.

“비록 타향을 떠돌며 백정질로 먹고사는 형편이지만 조만간 노모를 잘 모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엄 선생의 호의는 더, 이상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엄중자는 다른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 섭정에게 말했다.

“제겐 갚아야 할 원한이 있어서 여러 나라를 유람하다가 이번에 제나라로 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선생께서 의협심이 대단하시다는 소문을 듣고 황금 백 일을 준비해서 선생의 노모를 봉양하여 선생과 친구가 되고자 했던 것이지 별다른 뜻은 없습니다.”

섭정이 말을 받았다.

“제가 뜻을 죽이고 온갖 치욕을 견디면서 백정으로 사는 것은 오로지 노모를 봉양하기 위한 것입니다. 노모가 살아 계시기만 한다면 이 한목숨 희생하는 것도 아깝지 않습니다.”

엄중자가 거듭 받아주기를 청했지만, 섭정은 끝내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엄중자는 손님의 예를 다한 후에 섭정의 집을 나왔다. 엄중자는 사람의 됨됨이를 알아보는 데 능한 인물이라 섭정 본인보다 모친 모시기를 열 배의 정성을 다했다. 이로써 섭정의 자존심과 허영심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었다. 그러니 의협심 강한 섭정이 어찌 이에 보답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어느덧 세월은 흘러 섭정의 모친이 세상을 떠났다. 장례가 끝나고 상복을 벗은 후에 섭정은 혼잣말로 말했다.

“에이! 나 섭정은 한낱 시정잡배로써 개나 잡아먹고 사는 처지지만 엄중자는 제후국의 경상(卿相)이라는 신분으로 천 리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와 자존심을 내던지고 나와 교우를 맺었는데, 나의 태도는 정말 가당치 못했다. 엄중자가 황금 백 일을 모친에게 보내왔을 때 사양 하면서 받지는 않았지만, 그가 이렇게 할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내 지기가 되기에 충분하다. 그처럼 좋은 사람이 원한 때문에 분노를 안고 살면서 외지에서 온 하찮은 사람에게 의지한다는데 어떻게 묵묵부답으로 모른 척할 수 있겠는가? 그때는 노모가 살아 계셔서 그의 청을 승낙하지 않았지만 이제 노모께서 세상을 떠난 마당에 지기를 위해 내 미천한 힘을 쏟지 않을 이유가 없다.”

섭정이 그때까지 엄중자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이유는 엄중자를 대신해서 원수를 갚느라고 노모를 부양하지 못하는 불효를 저지를까 걱정해서였다. 이익보다는 명분을 중시했던것이다. 섭정은 지기의 은혜에 보답하기로 마음먹고 엄중자를 찾아갔다.

“이전에 여러 차례 경의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은 노모께서 살아계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노모께서 세상을 떠나셨으니 경의 원한이어떤 것인지 말씀해 주시지요.”

엄중자는 자신의 처지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내가 갚아야 할 원수는 협루라는 자요. 그는 한왕의 숙부로서 가문의 세력이 막강하고 처소의 경비가 삼엄하여 여러 차례 자객을 보내 그를 죽이려 했으나 아직 성공하지 못했소. 만일 선생께서 나서주신다면 수레는 물론 사병을 충분히 배치해서 선생의 거사를 돕도록 하겠소.”

“한나라는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가 한 황실의 인척인 재상을 죽이는 일에 여러 사람이 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사람이 많으면 다른 생각이 생기기 쉽고 그럴 경우, 말이 새어나가 한나라 백성들이 모두 경을 원수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이는 이만저만하게 위험한 일이 아니지요!”

그리하여 섭정은 병력의 지원을 사양하고 엄중자의 처소를 나와 단신으로 한나라로 향했다. 섭정의 이러한 태도는 엄중자의 입장을 주도면밀하게 고려한 처사로서, 지기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그의 정성과 치밀한 방법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섭정은 예리한 칼 한 자루만 손에 들고서 한나라로 갔다. 한나라 재상 협루는 집안에 들어박혀 있고 주위는 완전무장한 호위병들이 지키고 있었다. 섭정은 이에 겁내지 않고 곧장 안으로 달려 들어가 협루를 찔러 죽인 다음 큰 소동을 벌였다. 섭정은 크게 소리치면서 10여 명을 죽인 후에 스스로 자신의 얼굴을 난자하고 눈알을 파낸 다음 내장을 쏟으며 자살했다.

한나라에서는 그의 시신을 길거리에 내놓고 현상금까지 걸어가며 그의 신분을 확인하려 했으나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협루를 죽인 일에 엄중자는 물론 자신의 가족들이 연루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스스로 얼굴을 난자하여 알아보지 못하게 했던 섭정의 행동은 의와 효를 동시에 갖춘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섭정뿐 아니라 그의 누이 역시 섭정 못지않게 비범한 여인이었다. 섭정의 누이 섭영(聶瑩)은 누군가 한나라 재상을 살해했는데 자객의 신분이 밝혀지지 않아 시신을 길거리에 내놓고 현상금을 걸었다는 소문을 듣고서 목을 놓아 울면서 말했다.

“어쩌면 그 자객은 내 동생 섭정일지도 몰라! 아, 엄중자가 내 동생의 사람됨을 알고 있었구나!”

그리고는 즉시 한나라로 달려가 길거리에 버려진 시신이 자신의 동생 섭정임을 확인하고는 시신을 끌어안고 비통함을 가누지 못하며 말했다. 

“이 사람은 지읍 심정리에 사는 섭정이란 사람입니다!”

저잣거리의 행인들이 말했다.

“이 사람이 바로 우리 재상을 죽인 자객으로 대왕께선 천금의 현상금을 걸고 신분을 확인하려 하고 있소. 부인은 그런 소문도 듣지 못했소? 어서 가서 이 자의 신분을 확인시키고 현상금을 타지 그러시오?”

섭영이 행인들의 말에 대답했다.

“알고 있습니다. 이 자객은 제 동생 섭정입니다. 동생이 치욕을 삼켜가면서 저잣거리를 떠돌며 살았던 것은 노모께서 살아계시고 누이인 제가 출가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노모께서 돌아가시고 저마저 출가하자 엄중자가 지기로 삼아 태산 같은 은혜를 베풀어준 것에 보답하기 위해 이런 일을 저지른 것입니다. 선비는 지기를 위해 죽는 것이니 다른 방법이 없었겠지요. 게다가 누이인 제가 아직 살아있기 때문에 이 일에 연루되는 것이 두려워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스스로 얼굴을 난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제가 어떻게 살신의 화가 두려워 동생의 명예를 매장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에 한나라 사람들은 크게 감동했다. 섭영은 슬픔을 이기지 못해 끝내 동생 섭정의 시신을 껴안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고 말았다. 진과 초, 제와 위 등 여러 제후국 사람들도 이런 소문을 듣고는 감동하여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섭정도 대단한 사람이지만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천 리 길을 달려와 동생의 이름을 빛낸 섭영도 정말 절개와 기개가 대단한 여인이다. 하지만 누이가 이럴 줄 알았다면 섭정은 엄중자의 요청에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

섭정의 이름이 빛나는 것은 그가 일개 제후국의 재상을 죽였기 때문이 아니라 지기의 은혜에 보답하면서 누구에게도 피해를, 끼치지 않으려 애썼던 의협심 때문이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자객들의 거사가 적지 않았지만, 형가와 전제, 섭정 세 사람만이 역사에 이름을 빛내고 있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의협 정신에 있다.

우리에게는 이보다 훨씬 더 자랑할 만한 의인 열사가 있다. 한국통감부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 사살의 하얼빈 의거의 안중근 의사, 항일투쟁의 새로운 활로를 열어 독립운동사에 큰 획을 그은 쾌거의 윤봉길 의사, 유신독재자 박정희를 처단한 김재규 의사의 혁혁한 공이 역사에 새겨져 있는 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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