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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10.26,.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주목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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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교실, 10.26,. 안중근의 동양평화론 주목받아
  • 김현태 기자
  • 승인 2017.10.26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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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뒤편에 위치한 시구문. 일제는 사형집행 후 그 사실을 은폐해야 할 경우 외부로 몰래 시신을 반출하기 위해 비밀통로를 만들었다. 해방직전 일제는 이를 은폐하기 위해 폭파했으나, 1992년에 복원됐다.

10, 26은 국경일로

2017년 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여 의거한 108주년이 되는 날이다. 또 2017년 3월 26일은 여순 감옥에서 안 의사가 순국한 지 107주년이 되는 날이기도 하다. 덧붙여 10월 26일은 어떤 인물의 죽음과 관련 있는, 한국현대사에서 매우 의미심장한 날이다. "이날 죽은 '그 사람'과 그의 죽음이 우리 역사에 대해 갖는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상반된 견해들로 최근 우리 사회는 '두 쪽'이 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 서로 다른 관점을 가진 두 집단은 도저히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한 국민 한 민족'이라고 볼 수조차 없을 만큼 상반된 가치관을 지닌 '두 국민'이다.

그의 죽음에 대해 한쪽에서는 10월26일의 가을 하늘을 울린 총성이 결과적으로 백성의 자유를 증진시켰다고 본다. 압제자인 그의 죽음이 곧바로 자유와 해방으로 이어지지 못한 채 또 다른 압제자들의 통치로 이어졌지만, 이후의 역사전개에 있어서 하나의 전환점이 되기는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일군의 사람들은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를 사살한 인물은 역사의 발전에 하등의 긍정적 의미도 없는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다고 비난한다.

그의 죽음보다 더 논란이 되는 것은 생전 행적이다. 한편에서 볼 때 그는 백성들에게 억압의 굴레를 씌운 압제자였다. 그가 이 나라에 만든 억압적 정치체제와, 공공연하게 일상적으로 행해진 인권유린 등은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정의롭되 억울한 이들의 피'로 물들였다.

이에 대해 반대쪽에서는 그가 "조국을 근대화했다"고 말한다. 혹자는 '민족성'을, 혹자는 '역사적 특수성'을 들먹이기도 하지만, 이들의 주장은 궁극적으로 "그 어떤 특수한 요인 때문에 한국인들은 강압적 수단이 아니고서는 스스로 근대화와 발전을 이룰 수 없었을 것"이라는 공통된 전제에 기초한다. 이들은 간혹 '국민적 시선'을 의식한 나머지 자가당착적이게도 '조선의 자율적 발전가능성'을 부정하는 일본 우익의 역사인식에 분개하는 척 하곤 하여 자신들의 '이념적 정체성'을 혼동시키기도 했지만, 최근에는 대담해져서 그런 일도 거의 없어졌다.

그러나 이토록 '경제'와 '발전'을 중시하는 그들도 한가지를 잊고 있다. 시장경제의 투명성은 '룰'을 준수하여 예측가능한 사회를 만듦으로써 확립된다는 것이다. 권력을 동원하여 인권과 재산을 유린하고 그것이 '시효'로서 영속되고 정당화될 때, 사회에는 "이기면 충신, 지면 역적"이라는 몰윤리적 냉소주의만이 남기 때문이다.

▲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하여 투쟁했다. 2천만 민중아, 분투하여 쉬지 말라!” 1926년 12월 28일 나석주 의사가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고 자결하기 전 남긴 유언이다. 나석주 의사의 의거 터인 외환은행 본점건물 화단에는 기념비가 남아있다.

과거사 논쟁의 한복판에서 서울대는 10ㆍ26을 둘러싼 두 개의 진영 가운데 어느쪽에 기울어 있을까? 혹, 10월26일이 무슨 날인지 모르는 이들을 위해 사족을 덧붙이자면, 이 날은 1909년 하얼빈의 기차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조선을 식민화한 이토오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이다. 공교롭게도 70년 뒤 같은 날 박정희 전대통령도 여성 연예인을 불러 술을 마시다 중앙정보부장에게 사살되었다.

흐터진 민족운동가

해방 이후 월북, 이승만 정권 비판 경력 등으로 인해 역사 속에 묻혀졌던 독립운동가들의 전기가 발간됐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가 ‘한국의 독립운동가들’ 시리즈 중 네 권을 발간했다. 『대륙에 남긴 꿈, 김원봉의 항일 역정과 삶』(한상도 지음), 『대한제국군에서 한국광복군까지, 황학수의 독립운동』(한시준 지음), 『근대화의 선각자, 최광옥의 삶과 위대한 유산』(이명화 지음), 『중도의 길을 걸은 신민족주의자, 안재홍의 생각과 삶』(김인식 지음)이 그것이다. 

김원봉은 일제강점기 중국대륙을 무대로 활동한 항일 독립운동가 다. 약관의 나이로 의열단을 이끌었고, 중국거주 조선 동포를 모은 조선의용대의 총대장으로 중국 항일전선에 참여했다. 황학수는 대한제국의 군인, 광복군 등으로 평생을 무장독립운동에 헌신한 인물이다. 그는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만주에서 독립군을 조직해 대일항전을 전개했고, 임시정부에서 한국광복군을 창설한 뒤 서안에 설치된 총사령부의 총책임자로 활동했다. 한상도 교수(건국대 사학과)는 “김원봉은 독립운동뿐 아니라 해방 이후 국가를 건설해나가는 과도기에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했으나 그동안 월북 경력 때문에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 서대문형무소 사형장 앞에 건립당시 심어진 ‘통곡의 미루나무’.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사형수들이 마지막으로 이 나무를 붙잡고 독립을 이루지 못한 원통함으로 통곡했다고 한다.

김원봉과 황학수가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꿈꿨다면 최광옥과 안재홍은 계몽운동을 통해 민족국가를 이루고자 했다. 최광옥은 19세 때 독립협회에 참여해 계몽운동을 시작했으며 최초의 국문법교재인 『대한문전』을 집필했고, 안창호와 함께 항일비밀결사 ‘신민회’를 결성했다. 그러나 33세의 나이로 요절해 지금까지 대중에게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다. 안재홍은 “민족통합을 최우선 과제로 내세우며 ‘진정한 중도의 길’을 보여줬다”고 평가받는 인물이다. 민족개량주의를 반대했던 그는 ‘비타협민족주의’를 기조로 내건 물산장려운동을 주장했다. 이후에는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며 조선기자대회부의장으로 언론운동에 투신했으며 신간회 결성에도 참여했다. 안재홍의 경우 해방 이후 이승만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현대사에 제대로 기록되지 못했다. 김인식 교수(중앙대 사학과)는 “대부분의 정치가가 이념 대립에만 몰두해 있을 때, 민족의 생활을 고양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안재홍의 중도사상은 오늘날 재평가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독립운동사의 대중화를 위해 앞으로 10년 동안 독립운동가 100명의 전기를 통해 식민지 항일 운동사를 정리할 계획이다. 이명화 책임연구원(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은 “일제의 탄압으로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자료가 소실된 경우가 많다”며 “이번 열전 발간이 잊혀진 독립운동사를 재구성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사진: 서울대저널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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