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대구문학 르네상스를 일군 문화공간, 다시 코로나 뉴노멀 시대 선두 주자로 달린다, 시인다방 이야기(3)

‘시인다방’은 문학에 대한 향수를 달래고 지역 문화공간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점에서 궁핍하고 암울했던 당시의 문학청년들과 문인들 사이에 정신적 출구역할을 하였다. / ⓒ 박상봉
시인다방은 문학에 대한 향수를 달래고 지역 문화공간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점에서 궁핍하고 암울했던 당시의 문학청년들과 문인들 사이에 정신적 출구역할을 하였다./ⓒ박상봉

은하, 아세아, 왕비, 유경, 심지 등으로 이어지던 대구 문학청년들의 단골다방이 198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문을 닫거나 시끄러운 음악다방 형태로 변해버려 당시 대구에는 문학과 예술을 좋아하는 젊은이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서로를 고무할만한 장소가 없었다.

‘시인다방’은 문학에 대한 향수를 달래고 지역 문화공간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점에서 궁핍하고 암울했던 당시의 문학청년들과 문인들 사이에 정신적 출구 역할을 하였다. 나중에 어느 지역 언론사에서 쓴 ‘대구다방 역사 50년사’에는 “시인다방이 80년대 대구문학의 르네상스를 일군 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시인다방은 시낭송회와 연극공연, 미술, 음악 이벤트를 수시로 기획하여 꽤나 매력있는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아가면서 단골도 늘어났다. 소설가 장정일, 이인화가 문청시절 시인다방에 거의 매일 출근하다시피 나와서 문학토론도 하고 때로는 서빙을 맡기도 했다.

문인수ㆍ이하석ㆍ이태수ㆍ이성복ㆍ장옥관ㆍ엄원태ㆍ송재학ㆍ김용락ㆍ배창환ㆍ서지월ㆍ김세웅ㆍ김선굉ㆍ서정윤ㆍ하청호ㆍ김재진ㆍ손진은….대구문단의 주옥같은 이름들이 모두 그 당시 단골손님이었고, ‘시인과 독자의 만남’ 행사를 통해 시인다방에서 독자들을 만나고 소통하였다.

시의 생활화와 바른 문화 운동 펼치기를 표방하고 있는 문화공간 시인이 2박3일간 안동군 풍산면 하회마을 강가에서 펼친 제1회 여름시인학교를 조명한 1986년 8월 6일자 매일신문 기사. 당시 매일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일하던 이태수 시인이 기사를 제법 크게 썼다.
시의 생활화와 바른 문화 운동 펼치기를 표방하고 있는 문화공간 시인이 2박3일간 안동군 풍산면 하회마을 강가에서 펼친 제1회 여름시인학교를 조명한 1986년 8월 6일자 매일신문 기사. 당시 매일신문사 문화부 기자로 일하던 이태수 시인이 기사를 제법 크게 썼다./ⓒ박상봉

80년대 대구문학의 르네상스를 일군 나의 시인다방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1985년 5월부터 1988년 연말까지 3년 남짓 이어지다가 집안 사정 때문에 시인다방 시인의 식구 회장을 맡고 있던 박인수에게 인계하고 나는 서울로 이주하였다.

서울에 올라간 나는 문인수 시인이 주간으로 있는 영화잡지사에 기자로 취직해 다니게 되었으나 노사분규에 휩쓸려 서울생활 1년도 채우지 못하고 패배자가 되어 1989년 여름 대구로 다시 내려왔다. 나는 박인수에게 넘긴 시인다방을 재인수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성사되지 않아 공평동에 카페 ‘그리운 시인’을 다시 차렸다.

대구 시내 문화동과 공평동, 한 언저리에 2개의 시인다방이 생겼다. 박인수는 곧바로 허남기에게 문화동 시인다방을 넘겼고, 이어 계명대 철학과 출신 김은희 씨가 전통찻집 스타일로 시인다방 명맥을 유지해갔다.

‘그리운 시인’이라는 이름으로 대구초등학교 앞에 새롭게 문을 연 공평동 시인다방은 예전처럼 ‘시인과 독자의 만남’ 프로그램을 꾸준히 이어갔다. 서지월 시인의 첫 시집 『강물과 빨래줄』 출판기념회를 필두로 ‘안도현 시인과 독자의 만남’ 행사에 이어 문형렬 시인의 첫 시집 『꿈에 보는 폭설』 출판기념회 겸 시인과 독자의 만남 행사 등 60여 차례 문학행사를 이어나갔다.

특히 팸플릿 형태의 소책자 「괴로운 시인」을 발행해 대구 문단에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운 시인의 괴로운 꿈꾸기’ 선언으로 시작된 이 매체는 필자의 발의로 장정일 류철균(이인화 본명) 구광본이 편집동인으로 참여했다. 시인다방에서 ‘시인과 독자의 만남’ 을 50회 이상 진행하였는데 그 성과의 바탕 위에서 「괴로운 시인」이라는 통신문학지 형태의 팜플렛 매체를 매달 1회 발행하였다.

1990년 1월 창간한 팸플릿 형태의 소책자「괴로운 시인」은  대구 문단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운 시인의 괴로운 꿈꾸기’ 선언으로 시작된 이 매체는 나의 발의로 장정일 류철균(이인화 본명) 구광본이 편집동인으로 참여했다.
1990년 1월 1일자로 창간한 팸플릿 형태의 소책자 「괴로운 시인」은 대구 문단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리운 시인의 괴로운 꿈꾸기’ 선언으로 시작된 이 매체는 나의 발의로 장정일 류철균(이인화 본명) 구광본이 편집동인으로 참여했다./ⓒ박상봉

디자인과 편집형태 등은 서울에서 박덕규 시인한테 얻어온 시운동 팸플릿을 많이 참고했다. 내용은 매호 류철균의 평론과 장정일의 「시인을 찾아서」를 기고하고 새로운 시집을 낸 시인에 대해 토론형태로 조명하는 난도 마련해 알차게 꾸며졌다.

필자는 편집장으로 이 매체를 주도했는데 20세기의 마지막 10년을 정리하고 새로운 세기를 여는 문학매체로 발전시키겠다는 큰 포부를 갖고 1990년 1월1일자로 「괴로운 시인」을 창간하였다.

80년대 시는 놀라울 만큼 활력에 찬 역동적 공간을 이루었다. 일단의 평자들에 의해 '시의 시대'로 명명될 정도로 80년대는 시의 양적 팽창과 아울러 질적인 면에서도 괄목할만한 성과를 보여주었다. 그 속에서 많은 새로운 시인들이 등장하였고 주목할 만한 시들이 발표되었다. 이에 대한 평가는 매우 긍적적이다. 그러나 80년대라는 사회적 상황과 관련된 특수한 현상이라는 지적이 있기도 하였다. 한 시대의 문학을 반드시 당대의 사회적 상황과 대응시켜 이해해야 한다고는 할 수 없으나 삶을 분석하고 종합하는 과정 속에서 문학의 양식적 특성이 드러나는 것이라고 볼 때에 80년대의 시가 제반 상황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반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날카로운 비판과 깨어있는 의식으로부터 올바른 방파제 구실을 수행하지 못했던 점은 여전히 극복되어야 할 과제로 남겨지게 되었다. 이것은 90년대가 짊어져야 할 몫이다. 그중 한 몫을 감히 끌어안으며 좌충우돌했던 80년대를 접고 꿈의 90년대를 막 펼치는 지금 '괴로운 시인의 괴로운 꿈꾸기를 시작한다. -「괴로운 시인」 창간호 머릿글 전문

창간호 머릿글은 자못 의욕에 부풀어서 문학운동을 무슨 독립운동 하듯 잔뜩 목소리 높여 출발을 선언하였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좀 생뚱스럽기도 하다.

이 팜플렛은 어렵게 문을 연 ‘그리운 시인’이 여러가지 사정으로 문을 닫는 바람에 오래 가지는 못했다. 대신에 괴로운 시인의 편집형태와 내용은 나중에 구미의 수요문학교실과 장옥관 엄원태 송재학이 주도한 목요시학회 등에 꾸준히 활용하였다.

새삼스럽게 개인사적인 오래된 옛날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궁금할 법도 한데 ‘시인다방’이 단순한 다방을 넘어서 문화공간으로 기능한 부분에 대해 언급하고 싶어서이다.

옛날부터 다방의 경영자는 문인이나 화가와 같은 예술가가 많았다. 그 때문에 다방이란 단순히 차를 마시는 곳이 아니라 ‘문화를 함께 파는 장소’로 기능을 하며 주로 문인과 예술가를 위시한 문화인들이 모여드는 중심공간이 될 수 있었다.

지금도 북카페나 시집도서관, 갤러리 형태의 차와 문화를 함께 나누는 장소가 곳곳에 많이 있다. 이와 같은 장소는 문화와 지성의 산실로 새로운 사상의 창출과 창조적인 문화의 전파에 나름대로 역할을 하고 있는 곳이다. 아쉬운 것은 요즘 세태가 자극적인 유흥에만 길들어 가고 고전적인 문화공간에 대한 관심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경영난을 호소하는 곳이 적지 않은데 정부 차원이나 민간에서 보다 세심한 관심을 가져주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민족이 쇠퇴하는 것은 문화가 쇠퇴하기 때문이다. 문화가 쇠퇴하면 도덕적으로 타락하게 된다는 교훈을 다시 새겨보아야 할 때이다.

필자는 ‘30년전 시인다방’을 부활시켰다. 문형렬 시인의 첫 시집 『꿈에 보는 폭설』출판기념회 행사가 공평동 시인다방에서 열린 것이 1990년 3월16일이니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일이다.

올해 초 때마침 문형렬 시인의 첫 시집 『꿈에 보는 폭설』이 30년만에 재출간 됐다. 어쩌면 이것이 운명이 아닌가 생각되어 ‘시인과 독자의 만남’을 부활시켰다. 지난 5월 20일 청라언덕 한쪽 모퉁이에 자리한 영화카페 김중기의 ‘필름통’에서 가진 문형렬 시인의 ‘꿈에 보는 폭설, 우리의 30년’이라는 제목으로 가진 출판기념회가 바로 ‘30년전 시인다방’이 부활의 눈을 뜬 날이다.

문형렬 시인의 첫 시집『꿈에 보는 폭설』이 30년만에 재출간 됐다. 어쩌면 이것이 운명이 아닌가 생각되어 ‘시인과 독자의 만남’을 부활시켰다. 지난 5월 20일 청라언덕 한쪽 모퉁이에 자리한 영화카페 김중기의 ‘필름통’에서 가진 문형렬 시인의 ‘꿈에 보는 폭설, 우리의 30년’이라는 제목으로 가진 출판기념회가 바로 ‘30년전 시인다방’이 부활의 눈을 뜬 날이다.
문형렬 시인의 첫 시집『꿈에 보는 폭설』이 30년만에 재출간 됐다. 어쩌면 이것이 운명이 아닌가 생각되어 ‘시인과 독자의 만남’을 부활시켰다. 지난 5월 20일 청라언덕 한쪽 모퉁이에 자리한 영화카페 김중기의 ‘필름통’에서 가진 문형렬 시인의 ‘꿈에 보는 폭설, 우리의 30년’이라는 제목으로 가진 출판기념회가 바로 ‘30년전 시인다방’이 부활의 눈을 뜬 날이다./ⓒ박상봉

나는 30년 전, 추억 속의 ‘시인다방’을 다시 소환해 현 시대에 맞는 방식으로 운영하려고 한다. 새로운 ‘시인다방’의 이름은 ‘30년전 시인다방’이다. 이 다방은 공간은 없으나 어디에나 존재한다. 인공지능 + 빅데이터 + 사물인터넷이 만들어가는 4차산업혁명의 시대적 흐름에 따라 모든 것을 아우르고, 언제 어디에나 존재하는 새로운 형태의 미래형 문학다방이다.

‘30년전 시인다방’은 문형렬 시인의 시집 ‘꿈에 보는 폭설’ 재출간 기념회에 이어 6월 5일 최영 시인의 첫 시집 ‘바람의 귀’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이날 행사에는 최영 시인을 좋아하는 지인들과 대구지역의 시인들, 그리고 시인다방과 인연이 깊었던 사람들 60여명이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지난 2일에는 경북 구미시 금오산 뒷길에 있는 커피베이 갤러리로 장소를 옮겨 권미강 김대호 김연화. 이들 세 사람의 첫 시집 출판기념 행사를 가졌는데 새롭게 부활한 ‘30년전 시인다방’이 진행한 세 번째 문학행사였다.

32년 역사를 가진 구미문학의 터줏대감 ‘수요문학회’가 주관하고 1980년대 대구문학의 르네상스를 일군 ‘30년전 시인다방’이 주최한 이날의 구미지역 문학행사는 코로나 감염 확산세 때문에 소수 인원만 참가해 조용하게 치러졌다. 줌(ZOOM)을 이용한 화상 시낭송회와 패널토론은 과거 시인다방이 그랬던 것처럼 코로나19로 인한 팬데믹(pandemic) 시대에 뉴노멀 이정표를 세우는 일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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