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감으면서 코에서 많은 피를 쏟으셨다”
중국 북경 감옥에서 숨진 이육사 시인의 마지막 참혹한 모습

매운 계절의 채찍에 갈겨/마침내 북방으로 휩쓸려 오다.//하늘도 그만 지쳐 끝난 고원/서릿발 칼날진 그 위에 서다.//어디다 무릎 꿇어야 하나/한 발 재겨 디딜 곳조차 없다.//이러매 눈 감아 생각해 볼밖에/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 -이육사의 시 ‘절정’ 전문

대륜문학 막바지 교정을 보는 중이다.10월 발간을 앞두고 있는 대륜문학 17호의 첫 번째 특집으로 꾸며지는 ‘대륜인의 맥을 찾아서_나의 아버지 이육사’ 편은 여직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이육사 시인의 인간적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뿐만 아니라 대구문학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의미로운 작업이다.
대륜문학 막바지 교정을 보는 중이다.10월 발간을 앞두고 있는 대륜문학 17호의 첫 번째 특집으로 꾸며지는 ‘대륜인의 맥을 찾아서_나의 아버지 이육사’ 편은 여직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이육사 시인의 인간적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뿐만 아니라 대구문학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의미로운 작업이다./ⓒ박상봉

대륜문학 막바지 교정을 보는 중이다. 필자가 대륜문학 편집위원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대단히 보람되고 감동스런 일을 맡게 됐다는 자부심이 들었다.

10월에 발간을 앞두고 있는 대륜문학 17호는 정말 놀라운 문학잡지로 탄생될 것 같다. 첫 번째 특집으로 꾸며지는 ‘대륜인의 맥을 찾아서_나의 아버지 이육사’ 편은 여직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이육사 시인의 인간적 면모를 살필 수 있는 좋은 기회일 뿐만 아니라 대구문학의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는 의미로운 작업이라고 본다.

대륜문학 특집으로 실릴 이육사 동문 편 집필을 위해 김두한 시인은 안동시 도산면 원천리 이육사 문학관으로 찾아갔다. 이육사 문학관 내 육우당(六友堂)에 계시는 특별한 한 분을 만나기 위해서다.

이육사 6형제의 우의를 기리는 뜻에서 당호를 육우당으로 지었다는 이곳에는 이육사 시인의 유일한 혈육인 이옥비(李沃非)여사가 기거하고 있다. 김두한 시인은 이옥비 여사와 함께 나란히 앉아 아버지에 대한 기억과 소소한 일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옥비 여사는 1942년 2월생이다. 아버지가 백일을 고심하여 ‘옥비(沃非)’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는데 ‘기름지지 않다’는 뜻을 담고 있는 이름의 의미는 ‘간디처럼 욕심 없는 사람이 되라’는 아버지 자신이 살고 싶은 삶을 딸의 이름으로 남겨주신 것이라고 한다.

옥비 여사가 만 두 돌 되던 해 1944년 1월 16일 아버지는 중국 북경 감옥에서 순국한다. 이육사 시인이 일본 총영사관 감옥으로 이송될 때 청량리역에서 푸른 수의를 입고 포승줄에 묶인 채 용수를 쓴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옥비 여사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대구 교남고등보통학교(지금의 대륜고등학교)를 다닌 이육사 시인은 일제 강점기에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서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추고 일찍부터 각종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의 불꽃을 피웠다.
대구 교남고등보통학교(지금의 대륜고등학교)를 다닌 이육사 시인은 일제 강점기에 시인이자 독립운동가로서 강렬한 민족의식을 갖추고 일찍부터 각종 독립운동단체에 가담하여 항일투쟁의 불꽃을 피웠다.

“청량리역에서 뵌 것이 마지막 모습으로 떠오릅니다. 그때 아버지께서는 용수를 쓰시고 포승줄에 묶여 계셨습니다.”

아버지 이육사 시인에 대한 옥비 여사의 구술을 들어보자.

“자세히 말씀드리면, 1944년 1월 16일 아버지께서 북경 일본 총영사관 감옥에서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저는 영천 화북면 오동 외갓집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여섯 살이 되면서 대구시 북성로에 자리를 잡았다가 초등학교 이학년 때 삼덕동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 근처엔 대구 형무소가 있었습니다. 큰집을 가려면 반드시 형무소 앞을 지나쳐야만 했었습니다. 어느 날 그곳을 지나다가 포승줄에 묶인 용수를 쓴 죄수를 보게 되었습니다. 정말 저에게는 충격적인 모습이었습니다. 아버지께서 일본 헌병들에게 붙잡혀 가던 모습과 너무나 흡사했습니다. 제가 세 살 때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본 그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그 날 어머니는 경황이 없어 저를 데려가지 못했습니다. 근처에 사시는 조부뻘 되시는 집안 할아버지가 저를 안고 청량리역에서 아버지를 만나게 해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린 날은 온종일 슬퍼서 우울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집에 와서는 어머니에게 그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일찍 철이 들었던 까닭인지 어머니께 말씀 드리면 마음 아파하실 것 같아서……하지만 다행히도 어머니는 칠십팔 세까지 제 옆에 계시다가 돌아가셨지요.”

어머니가 늘 입버릇처럼 아버지에 대한 기억들을 많이 들려주었다고 한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해 자주 이야길 하면 서운한 마음도 들었다는데 “어머니가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 할 때마다 훌륭한 아버지면 무엇 해, 계시지도 않는 분인데……”라는 생각이 들어 토라졌고, 학교에서도 선생님과 아이들이 “네 아버지는 훌륭한 분이시고, 유명해서 좋겠다”고 하면, 마음 한 구석에선 “나무꾼이라도 내 아버지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 속으로 씁쓸히 웃었다고 한다.

또 어머니는 “너의 아버지는 원체 성품이 반듯하셔서 너의 할머님이 둘째가 들어오면 옷깃이 여며진다고 늘 말씀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미지에 대해 무섭고 강하신 분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는데 어머니는 오히려 “너의 아버지는 깔끔한 성품이라서 바지를 늘 자리 밑에 깔고 주무시는 분”이라고 설명해주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흰 칼라를 하고 다니셨는데, 여유분을 가방에 넣고 다니실 정도였으며 “형제간에 우애는 경상도에서 으뜸이다.”라고도 하고 “형제분들이 서로 칭찬하면서 학문적으로도 오늘은 네가 장원이라고 극찬하시고, 서로 충고도 하면서 격려를 아끼지 않는 동지 같은 우애를 나누셨다”고 아버지 살아생전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다고 한다.

육사 원록의 삼형제 원일ㆍ원조ㆍ원창 등 삼촌들은 서울에서 내려오면 어린 옥비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면서 눈물을 흘렸다는데 옥비 여사의 아버지 육사와 “아버지의 형제들은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재치와 지혜가 뛰어났으며, 효를 우선으로 행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옥비 여사의 삼촌들은 서울에서 내려오면 어린 옥비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면서 눈물을 흘렸다. 육사와 형제들은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재치와 지혜가 뛰어났으며, 효를 우선으로 행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옥비 여사는 어머니 말고도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다는데 삼촌들과 종조부로부터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 자랐다고 한다. 

특히 원일ㆍ원조ㆍ원창 삼형제 삼촌 분들이 번갈아 서울에서 내려오시면 어린 옥비를 끌어안고 얼굴을 비비면서 눈물을 흘리셨다는데 “너의 아버지 형제들은 어릴 때부터 총명했고, 재치와 지혜가 뛰어났으며, 효를 우선으로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얘기해주었다고 한다.

중학교 2학년 때 만난 아버지 동지였던 이정기 선생은 “너의 아버지는 사격의 명수이고, 말을 타고 달릴 때도 백발백중하는 명사수였고, 변장술도 신출귀몰했다.”고 말씀해주셨다고 한다. 나중에 아버지와 절친하게 지냈던 신석초 선생을 만났을 때도 “너의 아버지는 장안에 신사였고, 자존심이 대쪽 같은 분”이라고 말씀하시며, 그 예를 실제로 들려주셨다는데, “하루는 청량리 쪽에서 아버지와 약속하여 친구 분들이 모이셨을 때 아버지께서 석초, 나는 먼저 가겠네.”라고 하셨단다. 그래서 “왜 먼저 가는가? 우리가 다음 장소로 같이 가려고 하지 않았는가?”라고 했더니, “선약이 있어 먼저 가겠네.”라고 하더란다.

신석초 선생이 전철을 타고 가다가 창밖을 보니 동대문쯤에서 아버지가 걸어가고 있더란다. “육사는 차표 한 장 살 돈 없어도 그 말을 못하고 걸어갈 만큼 자존심이 강한 분이다.”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회고한다.

예전에 아버지의 시신을 거둬주셨던 이병희 선생을 만났을 때도 “선생님 저의 아버지 성품이 어떠셨어요?”라고 물으면, “너무나 따사로운 분이셨다.”라고 말씀해주셨다고 한다. 임종 후 마지막 아버지의 모습을 말씀해주실 때는 “네 아버지는 조국의 해방을 보시지 못해서 그러신지 눈을 감지 못했다.”면서 이병희 선생이 아버지의 눈을 쓸어내리시면서 “육사! 조국은 우리가 맡을 테니 이제 고이 가십시오.”라고 했더니, “눈을 감으면서 코에서 많은 피를 쏟으셨다”고 회고하며 옥비 여사는 눈시울을 적셨다.

이 장면을 읽을 때 나는 육사 선생의 마지막 참혹한 모습이 떠올라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참 동안 눈물 흘리며 흐느껴 울다 보니 마치 옥비 여사와 이병희 선생을 부둥켜 안고 엉엉 소리내어 울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울고 또 울었다. 도무지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다.

더 이상 교정을 볼 수 없었다.

 

까마득한 날에

하늘이 처음 열리고

어디 닭 우는 소리 들렸으랴.

모든 산맥들이

바다를 연모(戀慕)해 휘달릴 때도

차마 이 곳을 범(犯)하던 못하였으리라.

끊임없는 광음(光陰)을

부지런한 계절이 피어선 지고

큰 강물이 비로소 길을 열었다.

지금 눈 내리고

매화 향기 홀로 아득하니

내 여기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려라.

다시 천고(千古)의 뒤에

백마 타고 오는 초인(超人)이 있어

이 광야에서 목놓아 부르게 하리라

- 이육사의 시 ‘광야’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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