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일원대도(一圓大道)》에 귀의한 그때부터 지금까지 스승님이 내려주신 <스승님 팔훈(팔訓)>을 조석으로 외우고 있습니다. 그 제 2훈이 ‘겸양(謙讓) 이상의 미덕은 없다’입니다. 그런데 이 겸양을 내 것으로 만들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기까지 오는데도 근 40년이 걸렸습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자칫 아는 체, 있는 체, 잘 난체 하는 마음이 고개를 쳐들지요.

우리가 살면서 목격하거나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화(禍)의 근원은 무엇일까요? 겸양의 마음이 없기 때문에 당하는 것입니다. 화를 자초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또는 다른 사람에게 겸손하지 못하고, 양보하는 마음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겸손과 양보는 곧 존경과 배려라 할 수 있습니다.

수탉 두 마리가 암탉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습니다. 둘은 한참 싸웠고 마침내 승패가 결정됐습니다. 싸움에서 진 수탉은 깊은 상처를 입고 고개를 숙였지요. 그리고 어둑한 구석으로 숨어 버렸습니다. 반면 이긴 수탉은 암탉을 차지하게 된 기쁨과 승리에 도취해 높은 담장위에 올라가 큰소리를 지르며 자랑합니다.

“꼬끼오~! 이세상은 이제 내 것이다.” 그때 그 소리를 듣고 독수리 한마리가 어디선가 날아와 눈 깜짝할 사이에 담장 위의 수탉을 낚아채 가버렸습니다. 결국, 싸움에서 진 수탉이 슬그머니 암탉을 모두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일이 잘 풀린다고 절대로 자만하면 안 됩니다.

높은 자리에 오를수록 조심해야하고, 또한 겸손해야 합니다. 그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승리할 때가 정말 위험한 순간이지요. 《소학(小學)》에 「종신양로 불왕백보 종신양반 부실일단(終身讓路 不枉百步 終身讓畔 不失一段)」이라는 글귀가 나옵니다. ‘평생 남에게 길을 양보하면서 살아도 그 손해가 백보밖에 안되고, 평생 동안 밭두둑을 양보한다 할지라도 한 단보(段步)를 잃지 않을 것이다’는 뜻이지요. 결국 겸양의 미덕을 권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우리 덕화만발 가족에게, 그리고 이웃들에게도 적용되는 말입니다. 겸손함으로 자신을 낮추고, 양보로 남을 배려한다 해도 일생 동안 손해 볼 것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또 당장 손해를 보는 듯해도, 과욕을 비켜 간다고 얼마나 잃을까 생각해 봅니다. 저의 <스승님 팔훈>을 다시 한 번 살펴봅니다.

《스승님 팔훈》

1. 말의 억양을 낮추어라.

2. 겸양 이상의 미덕은 없다

3. 말 보다는 행이 앞서라.

4. 너그럽고 부드럽게 덕을 베풀라.

5. 거짓말 하지 말라

6. 중죄(重罪)를 짓지 말라.

7. 공부와 사업에 몰두하여라.

8. 교당(敎堂)과 회상(會上)과 일체생령을 위한 대인이 되어라.

위대한 실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 1762~1836)도 겸양만이 가장 큰 인간의 미덕임을 강조했습니다. “국량(局量)의 근본은 용서해주는 데 있다. 용서할 수만 있다면 좀도둑이나 난적(亂賊)이라 할지라도 아무 말 없이 용인할 수 있을 것인데 하물며 보통 사람에 있어서이랴!”라 하였습니다.

‘화해와 평화의 바닥에는 용서가 있다’는 다산의 말씀은 참으로 의미심장한 것입니다. 다산도 <주역사전 ‘겸(謙)’ 자의 해석>에 “스스로 높다고 여기는 사람은 남들이 끌어 내리고, 스스로 낮다고 여기는 사람은 남들이 들어 올려준다.(自上者人下之 自下者人上之)” 라는 말을 인용하셨습니다.

실천이 없는 논리나 주장은 무용한 일입니다. 오직 실천에 옮겨야만 의미가 살아납니다. 아무리 제가 조석으로 <스승님 팔훈>을 독송(讀誦)하더라도 <겸양의 미덕>을 본받아 행동으로 옮기지 않는다면 한갓 구두선(口頭禪)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참된 위인(偉人)에게 오는 최초의 시험은 겸양이라 했습니다.

그래서 진정으로 용기 있는 사람만이 겸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겸양하는 사람은 자기를 낮추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자기를 세우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대중의 마음은 마침내 덕 있고 겸양할 줄 아는 사람을 따릅니다. 조금은 바보 같이 나를 낮추고, 가능한 모든 것을 베풀며, 세상을 위하여 맨발로 뛰는 정열! 겸양은 그런 것입니다.

《논어(論語)》에서도 ‘늘 낮은 자세로 임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달야자 질직이호의(夫達也者 質直而好義)/ 찰언이관색 려이하인(察言而觀色 慮以下人) ‘대저 통달한다 하는 것은, 질박하며 정직하고 의(義)를 좋아하며, 남의 말을 잘 살피고 타인의 얼굴빛을 잘 관찰하여 항상 사려 깊게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라야 가능한 것이다.’」

공자(孔子)는 “통달(通達)이란 바탕이 순수하고, 이치를 앞세우며, 상대의 이야기를 잘 가리고, 마음 가지 잘 살피며, 상대를 배려하고 자신을 낮추는 것이다. 그러면 통하지 않는 것이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그 겸양을 완전히 몸에 배게 하여 이 세상에 ‘겸양 이상의 미덕’이 없음을 보여 주면 어떨 까요!

단기 4353년, 불기 2564년, 서기 2020년, 원기 105년 10월 20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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