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 人物論(34) 권력은 생을 망치는 독약이다.

인간은 자신의 행위를 완전히 통제할 수 없는 불완전한 존재인가?

기원전 221년, 진왕 정은 6국을 완전히 합병하고 장기간 분열 상태에 있던 중원을 통일했다. 통일 후에 부딪힌 가장 큰 문제는 거대한 국가를 어떻게 통치하느냐 하는 것이었다. 승상 왕관(王綰)은 국토가 너무 넓어 관리가 어려운 만큼 주대처럼 여러 자제들을 분봉하여, 다스리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신하들이 모여 이 문제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박사 순우월(淳于越)이 진왕에게 말했다.

“은주(殷周)가 천 년이 넘도록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천하를 자제들과 공신들에게 분봉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또다시 천하가 거대해졌지만, 종실의 자제들은 땅이 없어 일반 백성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만일 제나라의 전상(田常)이나 진(晉)나라의 육경(六卿) 같은 사람들이 반란을 일으킨다면 누가 와서 구해주겠습니까? 옛일을 본받지 않고 오래 갈 수 있었던 왕조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이사만이 군현을 설치하여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천하에 전란이 빈번했던 이유는 제후들이 각자 정치를 펴면서 서로 적대시했고 주의 천자도 이를 제지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천하를 통일한 후에도 수많은 나라를 세운다면 또다시 분열 국면을 조성하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중앙 집권 관리가 어려워진다는 것이었다.

진왕은 이사의 주장을 채택하여 전국을 36개 군으로 나누고 그 밑에 현을 설치했다. 이로써 중국은 제후 봉건 통치에서 강력한 통일 국가를 이루었다.
순우월은 분봉제를 실행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함으로써 진시황을 격노케 했고, 진시황은 그를 이사에게 넘겨 처리하게 했다. 이는 ‘분서갱유(焚書坑儒)’라는 엉뚱한 결과를 낳았다. 이사는 순우월의 옛것을 중시하고 현재를 경시하는 경향이 고서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진시황에게 건의하여 분서령을 내리도록 했다.

이사의 결정에 따라 진의 역사를 기록한 책 이외의 모든 사서와 박사들이 소장하고 있던 시, 서, 백가 등의 주요 저작들이 송두리째 불태워지고 의약과 무술, 원예 등에 관한 일부 서적들만 남겨졌다. 시서를 논하는 사람들은 누구를 막론하고 저잣거리에서 처형되었고 옛 사적을 빌려 현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일족이 몰살당하는 화를 입었다. 또 이런 사실을 알고도 눈감아주는 관리는 죄인과 같은 처벌을 받았다. 분서령이 내려진 후 30일이 지나도록 책을 태우지 않는 사람들은 얼굴에 글자를 새겨넣는 형벌을 받은 후 만리장성 축조에 징용되었다.

분서가 단행된 지 2년 후인 기원전 212년, 진시황제는 유생들에게 더욱 잔혹한 박해를 가했다. 함양의 유생 460여 명을 산 채로 매장하는 이른바 ‘갱유(坑儒)’를 단행한 것이다.

‘분서갱유’는 중국 문화사상 가장 큰 사건으로 중국 문화의 극단적인 파괴와 손실을 줘 왔을 뿐 아니라 인류 문명에 커다란 치욕을 안겨주고 인간의 존엄을 잔혹하게 박해했던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같은 진시황의 폭정 뒤에는 자신의 권세만을 좇아 이를 부추겼던 이사라는 신하가 있었다. 이사라는 인물은 진시황의 심리에 영합하여 그의 행위를 극단적으로 부추겼고, 한편으론 정신에서 물질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경쟁자를 탄압하고 제거함으로써 천하의 인재들이 진나라를 가까이하기 두려워하게 만들었다.

이사의 목적은 달성되었지만, 학자 출신인 그가 문화를 배반하고 파괴했던 것은 분명 자연적 선을 훼손한 것이다. 이런 지식인을 향해 우리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기원전 210년, 진시황은 권세를 과시하고 6국의 백성들을 위무하기 위해 다섯 번째 출유(出遊.-순유巡遊라고도 하며, 여러 지방을 돌아다님을 말함)를 시작했다. 함양을 출발하여 무관을 거쳐 위수와 한수를 따라 운몽으로 간 다음, 다시 장강을 통해 동쪽으로 내려가 회계에 이르렀다. 회계산에 올라서는 대우(大禹)에게 제사를 올리고 바위에 그 내용을 새겨 기념했다. 다시 함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진시황은 중병에 걸렸고 얼마 후, 사구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시 진시황을 수행했던 사람 중에는 이사와 진시황의 아들 호해(胡亥), 그리고 호해의 스승인 조고(趙高)가 있었다. 진시황은 임종 직전에 편지를 써서 장자인 부소(扶蘇)에게 장례를 진행하게 했다. 당시에는 장자가 황위를 계승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부소는 용감하고 의로운 성품으로 비교적 안정된 인심을 얻고 있었다. 그러나 대권을 장악하기 위해 호해를 황제로 앉히려 했던 조고는 진시황이 부소에게 쓴 편지를 호해에게 맡기고 보내지 않았다.

진시황이 사망하자 이사는 천하 대란이 일어날 것이 두려워 사람을 시켜 진시황으로 변장시켜 수레에 오르게 했고 평상시처럼 물과 식사를 봉공하게 했다. 조고는 이를 기회로 이사를 끌어들여 은밀하게 말했다.

“황제께서 서거하시기 전에 부소에게 장례를 부탁한다는 편지를 한 통 썼지만 이를 보내기도 전에 황제께서 서거하셨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겠지요. 하지만 이 편지는 호해가 가지고 있습니다. 황제께서 이미 서거하셨지만 아무도 이 사실을 모르고 있고, 누가 황위를 계승할지를 결정하는 일은 전적으로 저와 호해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공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초(楚)나라 상채(上蔡) 출신((? ~ BC 208):출처(李斯列傳(이사열전)
초(楚)나라 상채(上蔡) 출신((? ~ BC 208):출처(李斯列傳(이사열전)

이사가 말을 받았다.

“신하로서 입에 올려선 안 되는 일이지요. 너무 지나치다는 생각은 안 하시는지요?”

“황제의 뜻대로 일을 처리한다 해도 제겐 아무런 손해도 없습니다. 제가 묻고 싶은 것은 공과 몽염(蒙恬.-제나라를 멸망시킬 때 큰 공을 세운 진나라의 장수)을 비교할 때 누가 더 능력이 있느냐 하는 것이지요.”

이사가 대답했다.

“난 몽염에 미치지 못하오.”

“그럼 좋습니다. 부소는 강직하고 용맹한 인물로 공께서 황제와 함께 추진했던 분서갱유에도 줄곧 반대했습니다. 그가 즉위하게 되면 가장 가까운 인물인 몽염을 승상으로 기용할 것이 분명한데 그때 가선 어떻게 하시겠소?”

이사는 말이 없었다. 조고는 앞일을 멀리 내다볼 뿐 아니라, 권세와 부귀를 탐하는 이사의 속마음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진시황의 서찰을 위조하여 부소에게는 ‘불효’, 몽염에게는 ‘불충’의 죄명을 뒤집어씌워 자결을 강요했다. 부소는 곧바로 자결했지만 몽염은 자결하지 않고 구금되었다가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 후 호해가 진의 2대 황제로 즉위했다.

호해는 매우 어리석고 속된 인물로 향락만 추구하면서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진 왕조는 불난 데 기름을 뿌리는 것처럼, 위험한 형세로 쇠퇴일로로 치닫고 있었다. 이사는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의 명리를 보전하기 위해 호해에게 아무런 권고도 하지 않았다. 한번은 호해가 이사에게 물었다.

“공의 동료인 한비가 말하기를 고대의 제황들은 모두 힘든 세월을 보냈다고 했는데 황제란 자리가 정말 그런 자리요? 황제가 자기 자신도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어떻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소? 짐의 생각으로는 신하들이 무능하여 황제가 힘들었던 것 같소. 짐은 마음껏 욕망을 따르면서도 천하를 잘 다스리고자 하니 그대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보도록 하시오.”

이 말에 이사는 호해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일련의 ‘독책술(督責術)을 제시하면서 현명한 준주가 독책술을 시행하기만 하면 신하들과 백성들은 열심히 일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했다 ’독책‘ 이란 실제로는 독단적인 전횡을 일삼으며 잔혹한 사법과 형벌을 남용하는 것이다. 호해는 어린아이처럼 좋아하는 즉시 이사의 제안을 실행하라고 지시했다. 그 결과 충신들은 전부 주살 당했고 사리에 밝은 관리들은 박해를 받아 전국에 원성이 자자했다.

조고와 이사는 원래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였으나 점차 경쟁하고 배척하는 사이가 되었다. 호해는 종일 향락에 빠진 채 조정의 대소사를 전부 조고에게 일임한 상태였다. 하루는 조고가 이사를 찾아가 의도적으로 관동 지방의 소요에 대해 언급해 두 사람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다. 조고가 말했다.

“지금 관동 지방에 도적 떼가 들끓고 있어 빈번하게 경보가 전달되는데도 황제께서는 환락에 취해 일꾼들을 동원해 아방궁을 축조하고 있소. 이처럼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니 덕망이 높은 승상께서 간언해주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사가 말을 받았다.

”간언을 올릴 마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황제께서 아예 조정에 나오지 않으시니 어쩔 수 없었던 것이지요.“

조고는 호해에게 간언을 올려달라고 다시 부탁했고 조고를 훌륭한 충신으로 평가하고 있던 이사는 흔쾌히 승낙했다.

며칠 후 호해가 놀고 있을 때, 조고는 환관을 이사에게 급히 보내 서둘러 입궁하라고 전했다. 이사는 서둘러 입궁했으나 한창 여흥에 젖어 있던 호해에게 호된 질책을 받고 그냥 돌아가야 했다.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되자 호해는 이사에게 몹시 화가 났고 자신의 흥을 깬다는 이유로 안 좋은 감정을 갖게 되었다 조고는 이런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사를 모함하는 참언을 올렸다.

”조서를 위조하여 폐하를 황좌에 앉히는 일에는 이사도 참여했습니다. 그의 공로를 인정하여 황상께서는 크게 봉상 하셨지만, 그는 지금 불만이 가득합니다. 그가 여러 차례 폐하를 알현하고자 하는 것도, 좋은 뜻은 아닌 듯합니다. 게다가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그가 아들 이유(李由)와 함께 모반을 꾀하고 있다 합니다. 확실한 소문은 아니나 관동 지방에 도적들이 창궐하고 있는데도 이유가 수수방관하는 것은 모반의 증거가 틀림없습니다. 서둘러 그를 잡아들여 큰 화를 면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어리석기 그지없는 호해지만 이런 사안의 중요성을 모를 리 없는 그는 사람을 시켜 즉시 조사하게 했다. 한편 조고는 사신들을 사주하여 이사를 철저하게 모함하도록 조치했다. 자신과 아들 이유를 조사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이사는 그제야 조고의 술책에 걸려들었음을 깨달았다. 그는 즉시 황제에게 수차례에 걸쳐, 조고의 죄상을 보고하고 패배 국면을 만회하려 했지만 호해는 더욱 분개할 따름이었다.

”조고는 성품이 청렴하고 아래로는 민의를 두루 살피고 있고 위로는 짐의 뜻을 잘 헤아리고 있으니 짐이 조고를 중용하지 않으면 누구를 믿고 천하를 다스린다는 말인가? 승상은 헛된 마음으로 조고를 모함하고 있소!“

이사는 호해가 자신의 진언을 받아들이지 않자 우승상 풍거질(馮去疾)과 장군 풍각(馮却)을 끌어들여 여러 사람 이름으로 상주(上奏)를 올리면서 아방궁 축조를 중단하고 조고의 간언을 내쳐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자 극도로 화가 난 호해는 나라가 부유하여 황제가 향락을 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도적이 창궐하는 것을 수수방관하는 것은 신하로서의 직무를 유기하는 것이라 하여 세 사람을 모두 잡아들여 옥에 가둬버렸다. 결국 ’독책‘을 주장했던 이사는 자신의 책략에 희생된 셈이었다.

풍각과 풍거질은 치욕을 거부하고 자결하였지만, 이사는 여전히 부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죽음을 거부한 그는 조고에 의해 곤장 천 대를 맞고 혼절까지 했다. 그는 여러 차례 억울함을 호소하는 상주를 올렸지만, 매번 조고에 의해 차단됐다. 결국, 이사는 모반죄로 오형(五刑)을 당하고 삼족을 멸하는 혹형에 처해 그의 자제와 족당 전원이 저잣거리에서 비참하게 처형당했다. 이사는 울면서 둘째 아들에게 말했다.

”너와 함께 황구를 끌고 상채 동문을 나서 유유자적하게 노닐고자 했는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되었구나!“

이사는 먼저 얼굴에 문자를 새기는 형을 받은 데 이어 코를 잘리고 두 발이 잘렸으며 그런 다음 목이 잘리고 나서 요참을 당했다. 이것이 중국 최초로 정치가와 지략가, 학자의 자질을 한몸에 지녔던 정치인의 최후였다.

이사는 진시황을 도와 중원을 통일하고 군현제를 시행했으며 유생들을 탄압하여 왕권을 강화하는 등 적지 않은 공을 세웠지만, 이 모든 공적의 동기가 국가와 백성, 또는 당시의 군주와 왕조를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권세와 부귀를 위한 것이었다. 또 한비를 죽이고 아첨과 영합으로 분서갱유를 단행한 것은, 그의 일생에 있어서 결코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조고 역시 교활하고 간사한 성격에 대담하면서도 세심한 지모로 기회를 놓치지 않고 모략을 일삼았던 인물로 전형적인 간재(奸才)였다. 중국 역사에는 왜 이처럼 잔인하고 위험한 인물들이 조정을 차지하고 진정한 우국지사들이 밀려났던 예가 많았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처음에는 우국의 충정을 가졌지만, 관료가 되자 초심을 잃고 이사처럼 개인의 영달만을 추구하는 탐관으로 변질했을지도 모른다.

위의 예는 불행하게도 반성과 개혁의 의지가 없는 권력 집단, 특히 괴물과 흉기로 변해 인사불성이 된 우리나라 정치검찰의 행태와 무관하지 않다. 오늘도 권력이란 독주(毒酒)에 만취(滿醉)해서 위, 아래도 모르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그들에게 부디 감계(鑑誡)가 되길 바랄 뿐이다. 절제하지 못하는 권력은 결국, 멸망이며 자멸이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의 냉엄한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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