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자영(전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 공사(公私)를 구분하지 못하는 민변과 참여연대

‘검·언유착’ 혐의에 연루되어있는 검사장 한동훈이 자신의 휴대폰 비밀번호(비번)를 알려주지 않아서 수사가 난관에 봉착했다. 한동훈은 자신에게 주어진 혐의를 스스로 무혐의 판단하고, 죄가 없으니, 비번을 알려줄 수가 없다는 입장이다. 여기서 검사는 자신의 죄 여부를 스스로 판단하고 결재한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대단한 검찰이다. 조국 전 법무부장관은 기소부터 먼저 해놓고 증거를 찾으러 다니던 검찰이 정작 자신들에 대해서는 혐의가 있어도 스스로 무죄라고 우기면서 조사 자체를 방해하고 있으니 말이다. 이 같은 검찰의 작태에 대해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참여연대, 정의당 조차 아무 반응이 없었고 한동훈을 나무란 적이 없었던 것은 역설적이다. 본인이 듣고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그러하다. 그런데 그보다 더 웃기는 것은 드디어 이들이 한동훈의 편에 서서 역성들고 나선 사실이다.

한동훈 검사장이 휴대폰 비밀번호를 알려주지 않는 데 대해 법무부 장관이 법원 명령 등을 통해 이행을 강제하고, 불이행시 제재하는 법률 제정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해외 사례를 참고하여 비번을 알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겠다는 뜻이다. 그랬더니 민변, 참여연대 등 시민단체와 김종철 정의당 대표 등이 일제히 나서서 장관의 지시를 위헌적인 것이라고 성토하며 철회를 촉구하고 나섰단다.

이들의 변(辯)에 따르면, “진술거부권, 묵비권은 수사를 하는 기관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 있으나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고, “우리 헌법 12조는 ‘모든 국민은 고문을 받지 아니하며, 형사상 자기에게 불리한 진술을 강요당하지 아니한다’고 명시”하고 있으며, “핸드폰 비밀번호 자백 강요 역시 그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핸드폰 비밀번호를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처벌한다면 우리는 또 다른 무엇으로 처벌받게 될지도 모른다”며 “독재정권에 맞서 싸우며 힘들게 이룩한 민주주의의 가치를 후퇴시키지 말기 바란다”고도 했단다.(뉴시스, 2020.11.13.)

이같은 주장이 갖는 치명적인 허점은 공(公)과 사(私)를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검사장 한동훈의 비리를 개인적인 것으로 그 의미를 축소 은폐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개인의 권리가 있을 뿐, 자기 것이 아닌 권력을 가지고 농단을 하여 민초의 권리와 공익을 침해한 행위에 대한 반성이 없다. 검사장 한동훈의 비리 혐의는 개인적 권리 차원에서 논할 대상이 아니다.

최자영(崔滋英): 경북대학교 문리과대 사학과 졸업(1976), 동 대학교 석사학위(1979), 그리스 국가장학생(1987-1991)으로 이와니나 대학교 인문대학 역사고고학과 역사고고학 박사학위(1991), 다시 이와니나 대학교 의학대학 보건학부 의학박사학위(2016)를 취득. 그리스 오나시스재단 방문학자(2002.12~2003.2월),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2010-2017),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학회장(2016-2017)을 역임, 현재 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고대 아테네 정치제도사』(신서원, 1995)[문화체육부 역사부문 우수도서]; 『고대 그리스 법제사』(아카넷, 2007 [대우학술총서 588 :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역사부문 우수도서]); 크세노폰 지음『헬레니카』(아카넷, 2012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09]); 『시민과 정부 간 무기의 평등』(개정판)(헤로도토스, 2019), 거짓말공화국(헤로도토스, 2020) 등이 있다.
최자영(崔滋英): 경북대학교 문리과대 사학과 졸업(1976), 동 대학교 석사학위(1979), 그리스 국가장학생(1987-1991)으로 이와니나 대학교 인문대학 역사고고학과 역사고고학 박사학위(1991), 다시 이와니나 대학교 의학대학 보건학부 의학박사학위(2016)를 취득. 그리스 오나시스재단 방문학자(2002.12~2003.2월), 부산외국어대학교 교수(2010-2017),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학회장(2016-2017)을 역임, 현재 외국어대학교 겸임교수로 있다. 저서로는 『고대 아테네 정치제도사』(신서원, 1995)[문화체육부 역사부문 우수도서]; 『고대 그리스 법제사』(아카넷, 2007 [대우학술총서 588 :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 역사부문 우수도서]); 크세노폰 지음『헬레니카』(아카넷, 2012 [한국연구재단총서: 학술명저번역 509]); 『시민과 정부 간 무기의 평등』(개정판)(헤로도토스, 2019), 거짓말공화국(헤로도토스, 2020) 등이 있다.

한동훈이 연루된 ‘검·언유착’ 혐의는 검찰이 지금까지 자행해온 가짜 증거조작 행위와 같은 맥락에 있다. 연루된 혐의에 대한 수사를 방해하는 한동훈의 행위 자체도 ‘개인’의 권리 차원이 아니라 공적 범죄 혐의로 특별히 무겁게 다루어져야 한다. 수사 방해 행위 자체도 ‘검·언유착’ 혐의와는 또 다른 범법행위로서 문죄해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를 옹호하고 나선 민변, 시민단체 및 정의당, 언론 등은 민주시민으로서의 자질 여부조차 의심을 사게 한다. 특히 민변은 ‘민주시민을 위한’ 것이지의 여부를 떠나서 과연 법을 숙지한 ‘변호사’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 조차 의심을 사게 한다. 아마 민변이 뜻하는 ‘민주시민’이란 민초나 공익이 아니라 한동훈 같은 권력을 가진 ‘시민’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들이 간과하고 있는 핵심은 비번을 알려주도록 한동훈을 강요하는 것이 독재정권이 되는 것이 아니라, 공권력 오남용의 혐의가 있는 한동훈을 방조하는 것이 바로 권력의 오남용, 즉 독재정권을 비호하는 것이 된다는 점이다. 독재권력은 수와 무관하게 누구라도 권력을 오남용하는 경우를 말한다. 지금 검사장 한동훈이 검찰로서 자체 면죄부를 발부하고 무죄라고 우기며 수사를 방해하는 것이 바로 검찰 독재 권력의 산 증거이다. 검찰이 스스로 무죄를 선포하고 몽니를 부려도 견제할 방법이 현재로서 없다.

‘진보’의 최종 보루로 여겨졌던 한겨레도 마찬가지이다. 한동훈이 의도적으로 함구하는 행위에 대해서는 잠자코 있더니, 한동훈의 함구를 지지하는 민변과 참여연대의 입장에 대해서 한겨레가 연일 기사를 올리면서, 비평적 발언이 없는 것이 그러하다. 그것은 막힌 수사를 바로 하겠다는 법무부가 아니라 한동훈의 함구 행위를 지지한다는 뜻인 게다. 흔히 침묵은 동조이다.

이렇듯, 민변, 참여연대, 거기다 정의당까지 한동훈의 개인 권리를 주장하는 이들의 눈에는 온직 개인의 권리가 보일 뿐, 막강한 공권력을 오남용하여 민초와 공익에 피해를 입힌 공적 범죄의 위중함에 대한 개념이 없다. 공직자 비리를 개인의 행위로 폄하하는 것은 공권력이 당위로서 도모해야 할 공익보다 사익을 우선한다는 뜻이다. 한국의 변호사, 그것도 민주사회를 위한다는 기치를 내건 민변과 시민단체의 수준이 이러하다. 이로써 이들은 미래의 수많은 한동훈을 양산하고 있는 셈이 된다. 그런 점에서 민변, 참여연대, 한겨레 등은 오히려 공직자 비리와 적폐를 발효하는 또 하나의 온상이다.

이들뿐 아니다. 한동훈의 함구에 침묵하는 이들이 죄다 그러하다. 거기에 법원도 들어간다. 사법농단에 연루된 판사 66명 중 50명이 징계는 물론 재판을 받지도 않았다고 한다. 재판을 받아도, 잘못한 사실이 인정되어도 무죄로 막 풀려난다. 이런 사실은 한동훈의 비번 함구와 다른 맥락에 있는 것이 아니다. 검사는 검사끼리, 판사는 판사끼리 이른바 스스로(셀프) 조사, 검증, 처벌하도록 맡겨놓은 것은 사법 적폐를 양산하는 치명적인 제도적 결함이다.  

당달봉사같이 번히 눈 뜨고 당하기만 하는 공직자 비리를 감독하기 위해 공수처를 설치한다고 했더니, 윤석열이 반대하고, 이른바 ‘국민의 짐’ 당도 반대를 했다. 끝없는 훼방과 반대를 일삼는 야당, 그 야당의 거부를 차단하기 위해 여당 몇몇 의원들이 공수처법 개정안을 발의하겠다고 했더니,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법원이 슬그머니 ‘공수처 설치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던 법원이 공수처 설치가 될까봐 걱정하고, 내심 그 설치를 반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검찰집단, 법원조직, 뿐 아니라 언론, 시민단체 조직들이 똘똘 뭉쳐서 비번을 알려주지 않는 한동훈을 비호하고, 그래서 검찰, 법원의 비리를 묵인 조장하고, 나아가 공수처 설치를 방해하고 있다.

윤석열, 추미애의 갈등을 개인 간 고집의 충돌로 폄하하는 유인태

검사장 한동훈의 ‘사보타쥬(방해)’ 행위를 한갓 ‘개인적 행위’로 폄하하고 ‘개인의 권리’ 운운하는 이들은 검찰조직 개혁의 시도조차 사적 분쟁으로 몰아간다. 이들의 눈에는 중차대한 반사회, 반국가적 공권력의 비리가 온통 개인적인 행위에 불과한 것으로 축소된다. 그 한 예가 언론이 대서특필한 유인태 전 국회 사무총장의 발언이다.

유인태는 수사지휘권과 특활비 문제 등으로 연일 충돌하고 있는 추미애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검찰총장에 대해 “둘 다 임명권자가 인사조치 해야 된다”고 말했단다(경향신문, 2020.11.13.). 자기 고집만 옳다고 하면 결국 그게 독선으로 흐르고, 또 장관과 총장이 서로 두 고집끼리 지금 저렇게 충돌을 하니까 누가 말리지도 못하고, 한쪽만 인사 조치 하기에도 참 애매하게 돼버렸고, 국민들이 너무 짜증내고 하니 둘 다 경질할 필요가 있단다.

이렇듯 유인태는 윤석열과 추미애의 갈등을 두고 개인적 고집 간의 충돌로 그 의미를 축소했다. 윤석열이 지키려고 하는 검찰조직, 조국 전장관에 이어서 추미애가 온몸으로 맞서고 있는 검찰조직 개혁의 몸부림이 유인태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 모든 짓거리가 그의 눈에는 그저 개인 간 고집의 충돌로 보일 뿐이다. 이는 마치 검사장 한동훈이 비번을 함구하면서 수사를 방해하는 것이 개인적인 권리의 향유로 보일 뿐인 것과 같은 맥락에 있다. 공권력 오남용의 비리 의혹에 대한 방조와 묵인이 미래에 조장의 효과에 대한 반성이 없다.   

유인태는 노무현 대통령 시절 참여정부에서 정무수석을 지내는 등 민주당 내 ‘원조 친노’ 인사로 꼽히고, 14·17·19대 국회의원을 지냈고, 20대 국회에서 사무총장을 역임했다고 한다. 이 같은 경력을 소개하는 것이 유인태 말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참여정부 정무수석까지 지냈다고 하는 인물이 이렇듯 공사(公私)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있으니, 노무현 정부를 구성한 인물의 수준에 대한 의구심까지 일 판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 윤석열과 추미애의 충돌이 어떻게 사적(私的) 성격의 충돌로 보인다는 것인지.

어쩌면, 유인태 같은 인적 자원을 정무수석에 두고 검찰개혁을 하려했던 노무현의 실패는 예정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증거를 조작한 검찰의 손에 희생양이 된 그의 죽음은 부적합한 인적 자원의 기용과 실패로 끝난 검찰개혁에 기인한 바가 적지 않다. 

공권력 비리 양산의 토대를 제공하는 민변과 참여연대

항일투쟁을 왜 못했느냐, 박정희 독재체제에 왜 항거하지 않았느냐 하다가도 처자식 생각해서 불이익을 당할까봐 못한 것이라고 봐준다. 그런데 그런 것만이 아니었다. 불이익 당할까봐서가 아니라 다른 이들보다 더 편하게 살고 싶고, 더 많은 특권을 누리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 민변과 참여연대가 비번에 함구하는 검사장 한동훈을 비호하는 것이 검찰조직의 적폐를 비호하고 그 개혁에 역행하는 몸짓이라는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들은 자신에게 돌아오게 될 불이익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을 수호함으로써 남다른 특혜를 누리고, 그 사회적 불평등을 영속화하는 데 정치 권력을 장악 이용하려 하고 있거나, 적어도 거기에 다소간 시여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 공직자의 부패, 적폐의 현주소를 가능하게 한 근원적 원인이 명확하게 드러난다. 사실에 없는 증거까지 조작해내는 검찰, 사법권력을 농단한 법원의 존재가 이 사회에 가능했던 것은 그 짓거리를 묵인하는 수많은 우리 민초들 때문이었다. 민변, 참여연대, 한겨레, 참여정부 정무수석 유인태도 그들 중의 하나에 불과할 뿐이다.

이승만 정부하에서 일제에 못지않은, 아니, 그보다 더한 학살이 자행되고, 박정희 유신독재 하에서 인권을 유린당한 것은 이승만과 박정희의 탓이 아니라 그에 부화내동하거나 묵인 방조한 우리 민초들 자신의 탓이다. 유엔사와 한미워킹그룹이 남의 나라에서 콩나라 팥나라 간섭을 하고 있어도 거의 모두가 방조 침묵하고 있는 것이 그러하다. 정부 탓, 미국 탓, 일본 탓, 검찰 탓, 판사 탓만 하고있는 게으른 민초들에게 모든 책임이 있다. 그런 공백을 노려서 민변, 참여연대, 한겨레를 비롯한 언론들까지 가세하여, 비리와 적폐의 온상을 깨뜨리지 않고 보존하여 자손대대로 물려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민변’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의 준말이다. ‘참여연대’는 공권력을 감시하고 시민이 참여하여 바른 세상을 만들어가자는 취지로 만들어졌다. 그런데 이들이 비번을 함구하는 한동훈의 행위를 ‘개인의 권리’로 옹호하는 것은 앞으로도 그 같은 공권력 비리 양산의 토대를 제공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비리와 적폐를 조장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민변과 참여연대는 그들이 내거는 기치를 배반하고 있다. 밖으로 내거는 구호 따로, 내용 따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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