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 人物論(36) 황제가 되려면 현자를 스승으로!

인재를 얻으면 나라가 흥하고 인재를 잃으면 나라가 망한다.

춘추전국시대에는 인재를 얻으면 나라가 흥하고 인재를 잃으면 나라가 망하는 현상을 흔히 볼 수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진(秦)나라이다. 진나라는 사방 수백 리가 채 안 되는 작은 나라였지만 천하를 손에 넣었다. 모두 서로 다른 시기마다 여러 문신과 무신들이 훌륭한 정책을 내고 실천한 덕분이다.

특히 진나라의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이들이 모두 다른 나라에서 온 인재였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법률을 개혁한 상앙(商鞅), “먼 나라는 사귀고 가까운 나라는 공격해야 한다(遠交近攻).”라고 주장한 범수(范睢), 군현제(郡縣制)의 기초를 다진 이사(李斯) 등은 모두 진나라 출신이 아니다.

미친 듯이 인재들을 끌어모은 이들도 많았다.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 목공(穆公)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진나라는 서주(西周) 시대에는 본래 협소한 지역이었다. 제후의 명칭도 얻지 못하다가 서주 말엽에 와서야 주나라 황제에 대한 충성을 인정받아 제후로 책봉되었으며, 이후 몇 대에 걸친 군주들의 노력으로 점차 발전하기 시작했다. 목공은 현명하고 유망한 군주였다. 그는 평생 인재를 포섭하고 활용하는 데 힘썼다.

백리해(百里奚)는 본디 가난한 농민이었다. 집안이 너무 가난해 여러 해 떠돌아다니며 다른 길을 찾으려 했지만, 관리가 될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 사이 아내와 자식들마저 뿔뿔이 흩어져 행방을 알지 못했다. 간신히 친구의 추천으로 우(虞)나라의 대부가 되었지만 조금 지나지 않아 우나라는 진(晋)나라 군대에 길을 빌려주었다가 멸망했다. 이때 백리해는 우공과 함께 진나라의 포로가 되었다. 목공은 백리해의 능력을 알아보고 벼슬을 주려 했지만,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그러던 중 공자(公子) 집(縶)을 진(晋)나라에 보내 혼인을 요청하게 되자, 백리해가 신부 수행을 맡게 되었다. 그러나 진나라에 가고 싶지 않았던 그는 도중에 몰래 빠져나와 초(楚)나라로 들어갔다. 초나라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가 첩자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나이가 많은 것을 보고 소 키우는 일을 맡겼다. 그런데 그가 키우는 소들은 하나같이 튼실하게 무럭무럭 자라는 게 아닌가. 결국, 초나라 성왕(成王)에게까지 그의 명성이 알려졌다.

공자 집은 늙은 종 하나쯤 달아난 것 따위에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어느 날 그는 진(晋)나라의 밭에서 특이한 용모의 장사를 보았다. 그 장사는 커다란 괭이 한 자루로 빠르게 땅을 파고 있었다. 집은 그가 기인이라고 판단하여 진(秦)나라로 데려왔는데, 이 장사가 바로 후일의 명장 공손지(公孫枝)였다. 목공은 신부 수행단의 명단을 보다가 백리해가 빠진 것을 보고 공손지에게 물었다. 공손지는 백리해가 본래 능력이 출중한데도 기회를 얻지 못한 인물이라고 말했다. 목공은 즉각 사방으로 사람을 풀어 그의 소식을 탐문, 드디어 초나라에서 그를 찾아냈다. 목공은 의장을 갖춘 마차로 그를 데려오려 했지만, 공손지가 만류하며 말했다.

“그런 식으로 종을 맞아들이면 틀림없이 초나라의 의심을 사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백리해를 놓아줄 리 없습니다.”

목공은 공손지의 의견에 따라 다섯 장의 양가죽을 주고 백리해를 바꿔왔다.

백리해를 만난 목공은 그가 일흔 살이 넘은 백발노인인 것을 알고 안 좋은 기색을 보였다. 이에 백리해가 말했다.

“대왕께서 저보고 호랑이를 때려잡으라고 한다면 그러기에 저는 너무 늙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대사를 논하라고 한다면 저는 강태공보다 열 살이나 젊습니다.”

목공은 그의 말이 일리가 있다고 여기고 그와 국가의 일을 상의했다. 뜻밖에도 두 사람은 말을 하면 할수록 의기가 투합하여 사흘을 꼬박 이야기를 나누었다. 목공은 그에게 상국(相國)의 벼슬을 내리려 했지만, 백리해는 자신은 그럴 사람이 못 된다며 대신 건숙(蹇叔)을 천거했다. 곧 공자 집이 건숙을 데려왔고, 그의 두 아들인 서걸술(西乞術)과 백을병(白乙丙)도 함께 진나라로 왔다. 목공은 건숙과도 당시의 세태를 논하였는데 이번에도 식사를 잊을 정도로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몇일 뒤, 목공은 건숙을 우상(右相)으로, 백리해를 좌상(左相)으로, 그리고 서걸술과 백을병을 대부로 임명했다. 이로써 목공은 한꺼번에 다섯 명의 현명한 선비를 얻은 것이다. 이후 이 다섯 사람은 진나라를 강국으로 만드는 데 온갖 힘을 다 쏟았다. 그 결과 진나라는 천하의 패자가 되기 위한 기틀을 다질 수 있었다.

연(燕)나라 소왕(昭王)은 황금대(黃金臺.-중국 북경 부근에 있던 높은 대, 전국시대에 연나라의 소왕이 구축하여 그 건물 안에 천금(千金)을 두고 천하의 현자를 불러들였다.)를 높이 쌓고 천하의 현명한 선비들을 불러들여 연나라가 부흥의 기회를 얻을 수 있게 했다.

소왕은 전란으로 황폐해질 대로 황폐해진 연나라를 되찾고 왕위를 이었다. 그는 우선 후한 예물로 재능 있는 이들을 초청하여 복수를 준비하고자 했다. 그래서 곽외(郭隗)를 찾아가 물었다.

“제나라는 우리 연나라의 내란을 틈타 습격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세력이 미약하여 보복할 힘이 없습니다. 현명한 인재들을 얻어 국사를 의논하고 장차 선왕의 치욕을 씻는 것이, 나의 가장 큰 바람입니다. 그러자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곽외가 대답했다.
“황제의 업을 이루는 군주는 현자를 스승으로 삼고 왕의 업을 이루는 군주는 현자를 친구로 삼으며, 패자의 업을 이루는 군주는 현자를 신하로 삼습니다. 그리고 나라를 망치는 군주는 비천한 소인배를 신하로 삼습니다.”

곽외의 이 말이야말로 고대 중국사회의 ‘지식인 정책’을 대변한다. 그가 다시 소왕에게 말했다.

“대왕께서 몸을 낮추고 현자를 모신다면 자신보다 백 배 나은 인재를 얻을 겁니다. 그리고 다른 이보다 먼저 일하고 늦게 쉬며, 다른 이에게 가르침을 청한 뒤, 깊이 생각한다면 자신보다 열 배 나은 인재를 얻을 겁니다. 또 다른 사람처럼 열심히 일하고 평등하게 사람들을 대한다면 자신과 똑같은 재능의 인재를 얻을 겁니다. 그런데 책상에 기댄 채로 지팡이를 휘둘러 거만하게 사람들을 부린다면 겨우 시종 같은 사람만 얻게 될 것입니다. 한 가지가 더 있습니다. 거칠게 사람들을 대하고 멋대로 성질이나 낸다면 고작 노예 같은 자만 구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옛날부터, 덕 있는 이를 모시고 재능 있는 이를 청할 때 유의해온 점입니다. 대왕께서 정말로 천하의 현자들을 두루 뽑아 쓰고자 하신다면 반드시 예의를 갖춰 그들을 방문하십시오. 천하 사람들이 그일을 널리 알게 된다면 천하의 지혜로운 선비들이 속속 연나라로 몰려올 것입니다.”

“그러면 누구를 방문해야 합니까?”

곽외는 소왕에게 옛적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옛날에 천금을 주고 천리마를 사려는 왕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사지 못했지요. 어느 날 궁궐의 시종 한 명이 그에게 아뢰었습니다. 자신에게 천 냥을 주면 꼭 천리마를 사 오겠노라고 말이지요. 왕은 쾌히 승낙하고 그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3개월 만에 돌아온 시종은 살아있는 천리마가 아닌 죽은 천리마를 가져왔습니다. 금 5백 냥을 주고 말뼈를 사 온 겁니다. 크게 노한 왕이 시종에게 ‘내가 사 오라고 한 건, 산 말인데, 어찌 5백 냥이나 주고 죽은 말을 사 왔느냐?’고 호통을 쳤습니다. 이에 시종이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죽은 말도 기꺼이 5백 냥을 주고 사는데 하물며 산 말은 어떻겠습니까? 천하 사람들은 분명히 대왕이 정말로 좋은 말을 구한다고 생각할 겁니다. 그러니 천리마는 저절로 굴러들어오지 않겠습니까?’라고요 과연 1년이 채 되지 않아 천리마 3천 필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곽외가 다시 소왕에게 물었다.

“지금 대왕께서 정말로 인재를 구하고 싶다면 저를 먼저 등용하십시오. 제가 등용된다면 저보다 훨씬 능력 있는 인재들은 어떻겠습니까? 수천 리 길도 멀다 않고 달려올 겁니다.”

소왕은 곽외의 말을 따랐다. 황금으로 높은 누각을 짓고 곽외를 스승으로 삼았다. 과연 악의(樂毅)가 위나라에서 왔고, 추연(鄒衍)이 제나라에서 왔으며, 극신(劇辛)이 조나라에서 왔다. 소왕은 힘써 그들을 모시면서 죽은 자를 애도하고 가난한 이들을 도왔으며, 백성들과 고락을 나누었다.

28년 뒤, 연나라는 건실하고 부유한 나라가 되었으며 병사들도 생활이 안정되어 전쟁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소왕은 드디어 악의를 상장군(上將軍)으로 파견하여 진나라, 조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공격하게 했다. 제나라 군대는 무참히 패배했고 제나라 민왕(閔王)도 다른 나라로 몸을 피했다. 연나라 군대는 독자적으로 패잔병들을 뒤쫓아가 제나라의 도읍인 임치까지 격파했으며, 그곳의 보물들을 전부 손에 넣는 한편, 제나라의 궁궐과 종묘를 불태웠다.

연나라 소왕이 황금대를 지어 현자들을 맞아들인 고사는 미담으로 전해져 내려온다. 그가 복수의 뜻을 이루고 제나라를 거의 멸망시킨 것도 유명한 역사적 사건이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곽외의 한 차례 유세에서 기인했다. “황제는 스승과 함께하고, 패자는 신하와 함께하며, 망국은 노예와 함께한다.”는 그의 지식인 정책도 중국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곽외는 바로 연나라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에 근거하여 의견을 제시했고, 그렇게 하여 연나라의 황금시대를 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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