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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아부(周亞夫), 나라를 구하는 지략은 있으나 제 목숨은 구하지 못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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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아부(周亞夫), 나라를 구하는 지략은 있으나 제 목숨은 구하지 못해
[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 人物論(39) 모략은 기득권을 지키는 생존전략
  • 이정랑 (논설위원, 중국고전 평론)
  • 승인 2020.12.09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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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건시대 정치가들은 권모술수에 능란한 예술가라고도 할 수 있다.

봉건 관료사회에서 성공한 정치가들은 대부분 권력을 조롱하는 데 있어서 술책의 예술가였다고 할 수 있다. 사소한 실수라도 저지르는 날에는 가볍게는 목숨을 잃고 심하게는 가족이 모두 몰살당하는 분위기에서 권력을 놓치지 않으려는 그들의 술책이 얼마나 뛰어났을지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성공한 봉건관료들은 ‘정치가’라기 보다는 ‘관장의 예술가’라 부르는 것이 훨씬 적절할 것이다.

주아부(周亞夫)는 병법에 통달했고 군을 통솔하는 능력이 뛰어난 명장이었지만 황제와 황실 인척들의 뜻을 헤아리지 못해 굶어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고 말았다.

한 문제 2년(BC 162), 주아부는 조후(條候)에 봉해졌고, 그보다 3년 전에는 하내 군수가 되었다. 문무를 겸비한 그는 민정과 군사 업무를, 관장하는 최고 장관인 하내 군수로 부임하여 임기 동안 문무 양반으로 커다란 공적을 세웠고 개인적으로도 군정 사무 각 분야에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기원전 166년, 흉노의 노상(老上) 선우(單于.-흉노의 군주를 일컫는 말)가 기병 14만을 이끌고 조나라 초관으로 쳐들어와 북지의 군위(郡尉)를 사살하고 곧장 감숙성 진원 동남 지역까지 밀고 내려왔다. 흉노 기병대의 정찰병들이 한의 도성인 장안에서 불과 2, 3백 리 떨어진 지점까지 잠입해 들어와 조야를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 문제는 백성들을 안무(按撫.-백성들을 잘 보살피어 나라의 시책에 기꺼이 따르게 함)하는 조치와 함께 흉노와의 화친을 추진하는 한편 적극적인 군사대응을 준비했다. 이리 하여 주아부가 하내에서 관중으로 옮겨 장안을 수비하는 종요한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주아부가 명장의 이름을 떨친 것은 새류에 군대를, 주둔시키면서부터였다. 기원전 158년, 흉노 기병이 두 갈래로 나뉘어 한을 침략하여 태원군을 바싹 압박하면서 감천에서 장안까지 봉화가 그치지 않았다. 흉노의 남하를 저지하기 위해 문제는 중대부 영면(令勉)을 거기장군으로 임명하여 호구를 방어하게 하고, 소의(蘇意)를 장군으로 임명하여 구주를 지키게 했으며, 장무(張武)를 장군에 임명하여 복지를 사수하게 했다. 이와 동시에 장안의 동, 서, 북 3면에 막대한 병력을 배치하여 흉노의 기습에 대비하게 했다. 당시 장안의 군사 배치는 축자후(祝滋候) 서력(徐歷)이 위북 극문을 지키고, 종정 유예(劉禮)가 패상을 방어하며, 주아부가 세류를 지키는 형세였다.

한 문제는 매우 검소하고 신중한 성품을 지닌 황제로서 중국 역사상 보기 드문 성군이었다. 국방에 신중을 처하기 위해 그는 직접 서군과 북군을 시찰했는데, 가는 곳마다 군대가 달려 나와 영접했다. 문제는 이러한 행동에 대해 심히 우려하면서 이럴 때 흉노가 기습해 오면 어떻게 대적하느냐고 질책했다. 하지만 문제가 주아부의 군대를 방문했을 때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문제 일행이 세류에 도착해보니 군사들은 모두 갑옷을 입고 날카로운 창과 활을 들고 있었다. 황제의 행렬이 군영에 다다라 영문으로 들어가려 하자 사병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영문을 지키는 군사가 “천자의 수레가 도착했다.”고 외쳤으나 영문의 출입을 책임지는 군사는 “장군의 명령을 들은 바 없기에 문을 열 수 없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잠시 후 황제의 수레가 영문에 당도했는데도 군사는 여전히 영문을 열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문제가 사람을 보내 주아부에게 황제의 부절(符節.-글자를 적고 도장을 찍은 나무나 돌을 둘로 쪼개어 서로 나누어 가졌다가 뒷날에 서로 맞추어 증표로 삼던 물건)을 전달하면서 “황제께서 친히 병사들을 위로하고자 한다.”고 말하자 그제야 주아부는 명령을 내려 영문을 열게 했다. 영문을 지키는 군사는 황제의 수행원들에게 주아부가 누구를 막론하고 함부로 영내에 들여보내지 말 것이며, 이를 어길 경우, 참수하겠다는 엄명을 내렸다고 해명했다. 황제가 영내로 들어왔는데도 주아부는 무릎을 꿇어 예를 갖추지 않고, 문제를 향해 간단히 읍을 하면서 “갑옷을 입은 상태라 엎드려 절을 올리지 못하니 군중의 예로 대신하겠다.”고 말했다. 문제는 비로소 주아부의 투철한 군인 정신에 감동하여 표정을 누그러뜨리면서 장수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주아부에게 칭찬과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한 문제는 주아부의 군영인 세류를 방문하고 나서 감개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저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장군이오. 패상과 극문의 군영은 주아부의 세류에 비하면 아이들 병정놀이에 불과하지! 패상과 극문의 장군들은 기습 공격을 받을 경우, 패하여 포로가 되기, 십상이지만 주아부는 그 누구도 이기지 못할 것이오.”

마음을 졸이고 있던 대신들은 문제가 주아부를 칭찬하자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사실, 문제는 주아부가 국가와 군주를 위해 헌신하고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의 태도가 지나쳐 내심 황제의 존엄에 손상을 입혔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결국, 자존심이 상했던 문제는 주아부를 중용할 수는 있어도 그를 좋아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국가 대사를 고려하여 전혀 내색하지 않았고, 임종 때는 태자 유계(劉啓.-나중에 한 경제(景帝)가 된다)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장차 나라에 큰 어려움이 발생하거나 반란이 일어날 때는 주아부에게 중임을 맡기도록 하여라.”

과연 한 경제 초년에 유비(劉濞)가 일찍이 오(吳)와 초(楚) 등 7국을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위기가 닥치자 경제는 문제의 유언에 따라 주아부를 태위에 임명하고 군대를 이끌고 나가 반군을 진압하게 했다.주아부는 임무를 받자마자 두말없이 이를 받아들였다. 경제는 반군을 평정할 장수를 구해 기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주아부의 오만한 태도를 대하고 그가 어린 자신을 우습게 볼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과연 주아부는 경제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출병한 3개월 만에 오왕 유비를 살해하고 오와 초의 반군을 평정했다. 오, 초 반군의 주력부대가 괴멸된 데 이어 나머지 다섯 나라의 군대도 한 군의 추격을 받고 대장군들이 차례로 자살하거나 주살 당함으로써 7국의 난은 완전히 평정되었다.

7국의 반란을 평정하고 나서 혁혁한 무공을 세운 주아부는 사람들의 칭송을 한 몸에 받았고 경제도 그를 중용하게 되었다. 경제 전원(前元) 7년((BC 150), 주아부는 문관의 최고 관직인 승상이 되었다. 하지만 승상은 조금만 잘못해도 함정에 빠지거나, 심지어 주살 당할 수 있는 위험이 뒤따르는 자리이기도 했다. 주아부 같은 성격으로는 애당초 오래 보존하기 어려운 직책이었다.

가장 먼저 주아부를 골치 아프게 한 인물은 양왕(梁王) 유무(劉武)였다. 당시 주아부는 반란을 평정하면서 군대를 하남 일대에 배치했다. 오초 연합군은 병력을 총동원하여 양을 공격하고 있었다. 주아부는 형세를 분석해본 결과 연합군의 기세가 대단하여 정면으로 대적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양을 연합군에 주어 이를 공격하게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러자 양왕은 한 경제에게 구원을 요청했고 경제는 주아부에게 양을 지원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나 주아부는 명령에 불복하고 기병을 보내 오초 연합군의 보급로를 차단해버렸다. 오초 연합군은 오래 버티지 못하고 양을 포기한 채 한의 주력군에 맞서기 시작했고, 이에 주아부는 치밀한 전략으로 기선을 제압하여 연합군을 괴멸시켰다. 이리하여 반란군을 진압하긴 했지만, 양나라와는 원수가 되고 말았다.

주아부는 나라를 위해 지략을 발휘할 줄만 알았지 자신을 위해 지모를 쓸 줄은 몰랐기 때문에, 양왕의 원한을 사게 되었던, 것이다. 때문에 양왕는 매번 조회가 있을 때마다 두태후(竇太后)에게 주아부에 대해 언급하면서 중상과 모함을 일삼았다. 결국, 두태후는 양왕의 참언을 그대로 믿고 경제에게 주아부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경제 전원 4년(153), 장자 유영(劉榮)이 황태자가 되었으나 그 모친인 율희(栗姬)가 총애를 잃게 되자 태자를 폐하고 새로 왕황후의 아들인 유철(劉徹)을 태자로 세우게 되었다. 중국의 봉건사회에서 태자를 세우는 것은 매우 중대한 일이었다. 장래 국가사직의 운명이 상당 부분 태자의 손에 달려있어 조금이라도 신중하지 못할 경우, 국난을 초래하기에 십상이었다. 게다가 장자를 폐하고 어린 아들을 태자로 세우는 것은 절대로 허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주아부는 재상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태자에게 과실도 없는 한 마음대로 태자를 폐하고 세우다가는 큰 혼란이 생길 것이라며 반대했다. 성품이 강직하고 솔직하여 권술을 모르는 주아부는 고집스럽게 경제에게 맞섰고, 경제는 태자를 폐하고 세우는 문제는 자신의 가정사인 만큼 다른 사람의 간섭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주아부에게는 더, 이상 다른 방법이 없었다. 결국, 주아부의 권고와 간언은 경제를 설복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황제의 분노를 유발하고 말았다. 지나치게 강경한 성격이 황제로 하여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경제 중원 3년(BC 147), 두태후는 경제에게 왕황후의 오빠인 왕신(王信)을 제후에 봉해주기를 요구했다. 매우 교활했던 왕황후는 갖은 방법으로 두태후의 비위를 맞추면서 환심을 사고 있었다. 외척을 제후에 봉하는 것은, 전례가 없던 일이라 경제는 주아부가 동의하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고 예상하고 먼저 그를 찾아갔다. 과연 주아부는 단호하게 반대하고 나섰다.

“고조 황제께서는 일찍이 여러, 대신들에게 유씨가 아닌 자가 왕이 되거나 공적이 없는 자가 제후에 봉해지면 천하가 함께 이를 공격할 것이라고, 피로 맹세하신 바 있습니다.”

주아부는 유방의 말을 인용하여 신하들을 압도하고 나서 두려움 없이 얘기를 계속했다.

“아무런 공적도 없는 그를 제후에, 봉하면 고조의 규약을 위배하는 셈이 됩니다.”

경제는 주아부의 격렬한 언사에 크게 격분했지만 신하들 앞에서 내색하는 것이 불편하여, 묵묵히 속으로 분을 삭이고 있었다.

주아부는 왕신을 제후에 봉하는 일을 저지하긴 했지만, 이때부터 경제와의 갈등이 깊어졌고 왕신으로부터 커다란 미움을 사게 되었다. 그리하여 서로 사이가 좋았던 양왕과 왕신은 손을 잡고 주아부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 일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흉노의 여섯 마을 수장들이 투항해 왔다. 경제는 몹시 기뻐하며 이들을 모두 열후(列侯)에 봉했다. 그 가운데 타인(它人)이란 자는 이전에 흉노에 투항했던 한나라 장령 노관(盧官)의 손자였다. 노관은 남쪽의 영토를 차지하려고 기회를 엿보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죽었고 그의 아들도 한나라로 잠행했다가 병사하고 말았다. 노타인은 조부와 부친의 뜻을 이루기 위해 다른 수장들과 함께 투항한 것이었다. 주아부는 노타인을 열후에 봉해선 안 된다고 판단하고 경제에게 말했다.

“그의 조상은 한조를 배반하고 흉노에 투항했는데, 지금은 다시 흉노를 배반하고 한조에 투항해 왔습니다. 그를 열후에 봉한다면 신하로서 군주에 불충했던 책임을 어떻게 물으시겠습니까?”

이번에는 경제의 반응이 전과 달랐다. 경제는 주아부의 건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잘라 말하고 여섯 사람을 전부 열후에 봉했다. 사실 주아부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는 단정하기 어렵다. 관점에 따라 얼마든지 다른 결론을 내릴 수 있기에 구체적인 상황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 문제이다. 경제가 그의 주장을 단호하게 거절한 것도, 그의 견해에 대한 반대라기보다는 그의 뜻대로 해서는 안 되겠다는 경계심이 상당히 작용한 결과였다. 주아부는 자신의 말을 들어주지 않자 상소를 올려 병을 핑계로 사직 의사를 밝혔다. 경제도 굳이 그를 말리지 않아 결국, 그의 사직은 무리 없이 이뤄졌다.

그러나 사태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가 비록 황제의 미움을 사긴 했지만 적지 않은 공로와 위세와 명망이 있었기 때문에, 경제는 그에 대해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경제는 주아부를 불러 그가 정말로 분수를 아는 사람인지 시험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하루는 경제가 특별히 주아부를 식사에 초대했다. 주아부는 관직을 그만두기는 했지만, 여전히 도성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이에 곧장 응할 수 있었다. 궁중에 들어간 주아부는 혼자 앉아있는 경제에게 다가가 배례했고, 경제는 그에게 간단히 몇 마디 건낸 다음 식사를 담당하는 주석관(主席官)에게 상을 차리라고 지시했다. 경제가 주아부에게 같이 식사를 하자고 하자 주아부도 사양하지 않고 순순히 접대에 응했다. 그 자리에는 경제와 주아부 두 사람뿐이었다. 약간 당혹해하던 주아부는 자기 자리에 술잔만 하나 있을 뿐 수저가 없어 푸짐하게 차려진 음식들을 먹을 수 없음을 알았다. 주아부는 이것이 경제의 장난이라고 생각하고 고개를 돌려 주석관에게 젓가락을 달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주석관은 이미 경제로부터 지시받은 바가 있어 들은 척 만 척, 하면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주아부가 재차 지시하려는 순간 경제가 끼어들었다.

“군주의 이만한 성의에 만족하지 못하겠단 말이오?”

주아부는 화도 나고 부끄럽기도 했지만 경제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 않아 바닥에 무릎을 꿇고 엎드려 사죄했다. 경제는 일어서라는 말 한마디 외에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두 사람사이엔 아무런 대화도 오가지 않았다.

며칠 후 궁궐에서 사자가 찾아와 주아부에게 관아에 나가 대부(對簿)를 받으라는 지시를 전했다. 대부란 질의를 통해 죄의 사실 여부를 가리는 일종의 심문이었다. 주아부는 자신이 최후를 맞게 됐다는 사실을 직감했지만, 도대체 무슨 죄를 범했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주아부가 관아에 들어서자 심문관이 그에게 편지를 한 통 건넸는데, 그는 편지를 읽고 나서도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주아부가 연로하여 아들에게 장례 집기 등을 준비시킨 것이 화근이었다. 그의 아들은 호상(護喪)에 사용하기 위해 5백 벌의 갑옷과 방패, 목재를 많이 구해드려, 이것이 모반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간주 되었고, 인부들을 부리고 나서 돈을 주지 않은 사실을 누군가가 부풀려서 고발한 것이었다.

주아부에게 몹시 화가 나 있던 경제는 이를 구실로 그를 당장 대리시(大理寺.-형벌에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로 넘겨 심문을 받게 하라고 지시했다. 주아부가 투옥되자 그의 아들은 자초지종을 알고서야 부친에게 자신의 행실을 사실대로 알렸다. 주아부는 아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긴 탄식만 내뱉었다. 대리시 심문관이 물었다.

“왜 모반을 획책했는가?”

“내 아들이 사들인 물건들은 전부 장례에 쓰기 위한 것인데 어찌 모반 운운하는 것이오?”

대리경(大理卿)도 할 말이 없었지만, 경제가 그를 죽이기를 바라고 있었기에 어떻게 해서든지 꼬투리를 잡아야 했다. 결국, 대리경은 황당하고 어이없는 억지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그대가 살아서 모반을 계획하지 않았다면 죽어서 모반하려 했던 것이 분명하다!”

이 말에 주아부는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다시 투옥된 그는 닷새 동안 음식을 거부하고 굶어 죽고 말았다. 일대 명장의 안타까운 최후였다.

주아부가 간파하지 못했던 것은, 국가와 군주가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이다. 국가는 공적인 존재지만 군주는 사적인 존재이다. 군주에 대한 충성이 반드시 애국인 것도 아니고, 애국이 반드시 군주에 대한 충성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봉건사회에서는 이론상으로 국가와 군주를 하나로 간주하고, 국가를 군주 일가의 사업으로 생각하지만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다. 예컨대 군주의 사욕을 희생시키면서 국가의 복리를 실현하려 할 경우, 대부분 커다란 좌절과 함께 개인적 보복에 봉착했다. 결국, 아무리 훌륭한 정책이라 하더라도 군주의 사욕을 합리화시킬 수 있을 때 만 실행할 수 있었다. 정말로 군주와 국가가 동등한 존재라면 중국 역사에서 그토록 많은 왕조가 교체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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