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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량이 줄어드는 것을 가장 가슴아파했던 노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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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량이 줄어드는 것을 가장 가슴아파했던 노화백
물방울화가 김창열 별세...향년 92세
손자오줌방울 같은 존재 평생 천착
  • 편완식 기자
  • 승인 2021.01.06 14: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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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스프리존] 편완식미술전문 기자 = ‘물방울 작가’로 대중에게 널리 알려진 김창열(92) 화백이 5일 별세했다. 김 화백은 영롱한 물방울을 그린 작품을 선보이며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다. 10여년전 평창동 거처에 들렀을 때 예전에 없던 풍경과 맞닥드린 것이 인상적이었다. 아래층 작업실로 내려가다 보면 어린아이들의 탈것과 옷가지들이 널려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김 화백의 공간에서 손자손녀들의 비중을 짐작케 하는 풍경이었다. 당시 김 화백은 손자손녀들에 대해 “촌스러울 정도로 기쁨이 크다”고 털어놓았다. 40여년간 한결같이 물방울을 소재로 작업해 온 그에게 물방울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그날 새삼스럽게 물었다.

“배설물이지만 깨끗해서 먹을 수도 있는 ‘애기 오줌’ 같은 귀한 존재지요”라는 답이 돌아왔다.기실 이 같은 그의 푸근한 해석은 지난 세월의 보상으로 보였다. 사실 그의 물방울은 시대의 상처를 내포하고 있다.

뭔가를 하면 빠져버리는 성격이라 평생 무엇을 잡고 있는 것이 무서웠다고 털어 놓은 그는 연극을 좋아해 영화를 한 번 찍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이라고 말했다. 그는 6·25전쟁을 격심하게 겪은 세대다.

“ 20살 때 총 쏘는 광경을 직접 봤죠. 그러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여러 작가가 전람회를 한다고 했어요. 그때 마침 앵포르멜(비구상)이 한국에 들어오기 시작했죠. 당시 내 그림의 주제는 총 맞은 육체를 연상시키는 거였어요. 총을 맞아 구멍이 뚫린 형상은 ‘상흔’이란 제목으로, 또 사람이 찢긴 듯한 이미지는 ‘제사’라는 제목으로 그렸죠. 그러다 그 상흔 자국 하나하나가 물방울이 된 것이에요. 물방울은 그 상흔 때문에 나온 눈물이에요. 그것보다 진한 액체는 없어요.”

처음엔 콘크리트를 비집고 나오는 점액질 형태였다. 전쟁에 대해 뭔가를 말해야 한다는 표현주의적 외침이었다. 점액질은 차츰 식어 나프탈린(좀약)처럼 굳어졌고, 물처럼 투명해지면서 물방물이 됐다.

“물질을 그려도 된다고 보장해준 팝아트의 영향도 컸을 겁니다.”

물방울엔 산으로 둘러싸인 그의 고향(평남 맹산) 강물과 약수에 대한 향수도 담겨있다.

“어린 시절 뛰놀던 강가와 뒷산의 약수터에 대한 향수는 ‘맑은 물’에 대한 애착이 됐고 물방울이 되어 가슴에 맺혔습니다.”

깨우침처럼 물방울이 그에게 다가오기도 했다.

“어느 날 제 자신의 그림이 못마땅해 캔버스 위에 물을 벌컥 뿌려버렸어요. 그 찰나에 ‘큰 세계가 열리는 것 같은 감동’을 느꼈지요.” 이후 그는 물방울을 본격적으로 조형화하기 시작했다.

천자문 배경에 물방울을 그리기도 했다.

“신문지 위에 물방울을 그려보면서 글자의 획이 물방울의 부드러운 질감을 돋보이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왜 하필 한자냐면 초등학교 가기 전 할아버지에게 붓글씨와 먹 가는 법, 붓 쥐는 법, 획 긋는 법 등을 배웠어요. 그래서 내겐 붓글씨와 천자문이 어릴 적 가장 큰 향수로 남았어요.”

그가 물방울이란 한 가지 작업에만 매달려온 이유는 뭘까.

“남자들은 예쁜 여자 보면 다 연애하고 싶지만, 아내가 있어서 그렇게 못하잖아요.(웃음) 화가도 이것저것 할 자유가 있는 것 같지 않아요. 파블로 피카소 때까지가 자유로웠고 우리 세대는 그렇지 못했어요. 특히 미니멀리즘 계통의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변화무쌍한 작업은 못해요.”

사각형(네모)만 그린 조셉 엘버스를 떠올리면 이해가 된다.

“제 세대엔 하나에 매달리지 않으면 인정을 못 받았어요. 다른 사람과의 차별성, 오리지널리티가 강조됐지요. 하지만 멀티미디어 시대인 요즘엔 생각도 작업도 ‘멀티’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김 화백은 나이가 들어가면서 작업량이 줄어드는 것을 가장 가슴아파했다.

“밥 먹는 것처럼 (규칙적으로) 작업하지만, 작업량은 줄고 있어요. 50∼60대 때 비하면 작업량이 반 이상 줄었어요. 큰 작품 하기에는 힘이 들죠. 하지만, 작은 작품만 하면 답답해요. 나이가 드니 ‘보는 눈이 풍부해졌구나’ 하는 느낌은 가끔 있어요. 예전에 그린 그림의 구성(composition)을 보면 ‘이런 실수는 지금이라면 안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해요.”

유족으로는 부인 마르틴 질롱씨와 아들 김시몽 고려대 불어불문학과 교수, 김오안 사진작가 등이 있다. 빈소는 고려대 안암병원 301호실. 발인은 7일 오전 11시5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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