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아 작가 서울시립미술관 분관 전시
자신을 긍정한 ‘위버멘쉬’ 로 승화시켜
공간과 작품이 하나가 된 인스톨레이션

[서울=뉴스프리존] 편완식 미술전문기자=인물화들이 나란히 나란히 걸려있다. 여는 가정집 사진각구에 걸려있는 가족사진을 연상시킨다. 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박유화’전 풍경이다. 지난달 개막을 했어야 할 전시지만 코로나 사태로 일반에 공개가 지연되고 있는 상황이다. 인물화 주인공들은 모두가 입양아 출신들이다. 한국화 인물화 기법으로 장지(한지)에 돌가루 안료인 분채로 서구 10개 도시에서 살고 있는 입양아를 그렸다. 물론 지금은 성인이 된 인물들이다.

초상화로 워홀이 부자들을 셀럽으로 만들어 주듯이, 엘리자베스 페이튼이 자기 주변 친구들을 타고난 귀족처럼 그렸듯이, 박유아는 서구에서 살아가고 있는 한국발 입양아들을 초인, 위버멘쉬로 그렸다. 살아가고 있다는 그 자체를 '입신양명'하고 돌아온 자식보다 더 귀하고 자랑스럽게 그린 것이다. 이 귀한 사람들의 초상을 우아한 공간에서 고상하게 드러내기 위해선 서울시립미술관 분관(남서울미술관)은 제격이었다. 구벨기에 영사관 건물이라는 화려하고 우아한 근대 문화재 건물 속에서 입양아의 초상은 더 없이 소중하게 다가오게 한다. 단순한 그림 전시라기 보다는 초상화 인스톨레이션이다. 다시말해 미술 작품을 주위 공간과 융합하게 설치하면서 완성됐다.

문화재 건물이라 벽에 못질 자체가 금지되어 있어 가벽을 사용할 수 밖에 없는 조건을 오히려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가벽으로 공간을 분할하고 새롭게 창출했다. 전시공간과 작품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미니멀리스트 조각처럼 보인다.

입양아들에게 모국은 언제나 뿌연 안개에 갇힌 정체성의 근원이게 마련이다. 서구적 환경에서 성장하고 삶을 영위하면서도 문뜩문뜩 근원의  무게에 직면하게 된다. 흔히 말해 정체성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값싼 연민으로 바라볼 뿐이다.

작가는 이 지점에서 다시 바라보기를 시도한다. 입양아 초상화들을 니체의 초인을 떠올리게 해주는 ‘위버멘쉬’ 시리즈로 명명했다. 니체의 위버멘쉬(Übermensch)는 우리가 생각하는 슈퍼멘 초인(超人) 보다는 극복인(克服人)에 가깝다.

“이 시리즈는 미국으로 입양 온 한인 입양아 출신 Glenn Morey 감독이 제작한 'side by side project'를 우연히 보게 되면서 시작됐다. 전세계에 살고 있는 이제는 성인이 된 한국 입양아들을 직접 인터뷰해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상이다. 똑같은 포맷으로 찍은 각각 20-30분 정도의 인터뷰 100개를 웹사이트에 올려놓은 것을 보았다. 그의 다큐멘터리는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물음들, 그리고 니체의 초인의 개념을 적용하고 이해하려는 듯이 보였다. 그런데 100개의 인터뷰를 보며 하나의 이야기가 끝날 때마다 내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축복을 염원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됐다. 그것은 단순히 그 스토리에 대한 감탄보다는 버티고, 겪어내고, 살아낸 인간에 대한 존경과 경외심이었다. 그들 하나 하나는 기존의 가치나 도덕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을 긍정하고 수련하여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진정한 승리자였다.”

사람간의 관계를 천착해 왔던 작가로서 입양아들의 진정한 얼굴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전시장은 인공조명도 절제했다. 자연광에 얼굴을 드러낸 초상들은 사진각구의 가족들 모습처럼 편안하다. 구벨기에 영사관의 모습만이 입양아들이 그동안 살았던 공간을 상기시켜 준다.

“위버멘쉬는 어원적으로 뛰어넘는 인간을 뜻한다. 다시 말해 극복하는 인간이며, 극복함으로써 창조하는 인간이다. 입양아들의 삶이 그랬다.”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긍정한 사람들이란 것이다.

문화비평가 이택광(경희대교수)은 “박유아 작업은 하나의 소재가 아닌, 보편적 삶의 진리로서 입양아를 우리 앞에 다시 서게 했다”며 “국가와 개인이라는 이분법을 넘어서는 새로운 실존의 형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평했다. 박유화 초상작업의 제의적 가치에 주목한 것이다. 박유아가 그린 초상의 주인공들은 여전히 ‘입양아’로 불리는 이들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은 여전히 성인으로 인준 받지 못하고 한국에서 ‘아이들’로 불린다. 태어나서 이들은 비자발적으로 ‘모국어’로부터 배제 당했다. 모국어를 하지 못하는 이들은 여전히 ‘아이들’이다.

박유아는 초상을 통해 입양인들을 아이가 아닌 위버멘쉬로 승화시키는 예술적 제의,치유(pharmakon)적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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