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閑吾可以養志 - 사람이 사는데 뜻을 가지려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

▲ 이인권 논설위원장 / 커리어 컨설턴트

12월의 달력 한 장을 넘기면 어느덧 새해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같이 하는 얘기들이 있다. “시간이 너무 잘 간다”, “세월이 너무 빠르다”고 하는 것이다. 엊그제 새해를 맞았다 싶으면 이내 한 해가 다 가는 시점에 와 있고는 한다.

21세기를 맞이한 지도 벌써 20년을 내다보고 있다. 컴퓨터가 새로운 세기를 읽어내지 못할 것이라며 전 세계가 밀레니엄버그로 홍역을 치렀지만 세상은 큰 물결대로 도도히 흘러가고 있다. 바뀐 것이 있다면 디지털 기술이 첨단화 되어 생활의 편리함도 있지만 세상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다.

일상생활에서 스마트기기가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이제 인공지능(AI)과 로봇이 인간생활의 중심이 될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고 있다. 로봇이 나노기술(NT), 바이오기술(BT), 정보통신기술(ICT), 인지과학(CT) 등과 융합한 휴머노이드(humanoid) 시대를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격변의 시대에 우리사회 문화도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한 해를 보내고 맞는 세시풍습도 달라졌다. 요즘은 한 해를 보내는 12월이 되어도 징글벨 음악을 듣기가 어렵다. 그만큼 시간의 흐름이 빠르다는 뜻이다. 흐르는 물처럼 한해 한해의 구분이 희석되어가고 있다는 상징이다.

그것이 인간의 생체감각으로 느끼는 생활리듬의 속도감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주변 환경이 쾌속 질주를 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렇게 느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척박하고 사회 기반시설이 빈약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시골의 버스를 타고 다닐 때와 달리 지금은 시원스럽게 뻗은 고속도로를 안락한 우등 고속버스로 달린다. 아니 완행열차를 타던 과거를 지나 새마을, 아니 지금은 KTX와 SRT가 전국을 대부분 1일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과거와 현재의 시대를 비교하면 속도의 엄청난 격차가 쉽게 이해된다.

교통수단인 버스나 열차 안에 타고 있는 승객인 우리 본연의 모습은 그대로다. 하루 세끼 밥 먹고, 밤이 되면 자고, 생리적인 볼 일 보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그러나 우리를 둘러싼 환경, 즉 도로와 버스와 열차가 놀랄 만큼 빨라졌다. 그러니 과거와 달리 우리가 창밖을 보는 경치도 그처럼 빨리 흘러가게 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생리적 작용은 그대로이지만 사회적 활동은 엄청나게 변한 것이다.

디지털 테크놀로지가 상징적으로 가져온 빠름의 미학은 우리의 의식구조를 고속, 아니 초고속에 맞추게 해 놓았다. 우리의 미래는 시간당 60분, 하루는 24시간, 일 년은 365일의 속력으로 다가오고 있다. 이것은 시계와 달력으로 측정된 기계적인 시간일 뿐이다.

그러나 우리가 빠르다고 느끼는 것은 주관적인 감각의 시간이다. 사회의 흐름이 빠르다 보니 우리는 많은 새로운 경험들을 하게 된다. 그런데 그것들이 반복되는 현상이 나타나면서 스스로 시간이 빠르게 느껴진다. 단순히 우리가 생체적으로 시간이 빠르다고 느껴지는 것만은 아니다. 그 빠름 속에 이제 세상은 과거 휴먼시대를 넘어 포스트휴먼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미 경제적으로 속도는 하나의 전략이 되었다. 스피드가 생명인 시대가 되어 그것이 하나의 트렌드가 되고 패러다임이 되었다. 한국의 우리는 ‘빨리빨리’를, 바깥의 세계는 ‘SPEED! SPEED!’를 외치면서 경쟁의 달리기에 나선지 오래다. 분초를 다투는 치열한 경쟁이다.

남보다 먼저 시장을 확보하여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지 않고는 뒤쳐지게 되었다. 이 경쟁의 달리기는 숨을 고르며 뛸 수 있는 마라톤의 경주가 아니다. 앞뒤 돌아볼 것도 없이 단숨에 치달아야 승부가 결정되는 100m 단거리다.

이런 추세를 잘 반영하고 있는 통계가 있다. 한국의 직장인 2명 중 1명은 ‘항상 시간이 부족하고, 뭐든지 빨리 해야 안심이 된다’고 느낀다. 이른바 ‘속도 중독증’에 걸려 있는 것이다. 그 비율이 조사 대상 직장인의 무려 55.8%나 되었으며, 심지어 ‘일을 천천히 하면 불안하다’는 반응까지 보였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 조급증을 불러 왔다. 나아가 졸속문화를 낳고 내용보다는 형식을 중시하는 세태를 가져왔다. 그래서 성공도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속도를 내어 단숨에 이루어야 직성이 풀린다.

아니 ‘성공’이라는 말보다 ‘출세’라는 말이 더 적합하다. ‘성공길’이라는 말은 없어도 ‘출셋길’이라는 말이 있는 것을 보면 한국사회 문화를 알 수 있다.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유명하게 되는 길을 찾아 정도(正道)보다는 가장 빨리 질러갈 ‘샛길’을 찾는다. 이런 속도를 추구하는 ‘샛길주의’가 우리사회에서 신문의 사회면을 장식하는 온갖 문제의 기본 원인이 되고 있다.

이제는 이런 속도의 질주가 체감으로 절절하다 못해 반작용까지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요즘 현대인들은 오히려 다운시프트와 슬로우라이프를 부르짖게까지 되었다. 패스트푸드의 빠른 서비스를 좋아했던 고객들은 이제는 오히려 여유식의 슬로우푸드를 찾는다.

그뿐만이 아니다.

속도 지향적인 사회에 지친 현대인들은 느리게 사는 삶을 추구하며 ‘슬로우시티 운동’을 펼치고 있다. 2002년 7월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 그레베의 시장이었던 파울로 사투르니니. 그는 주민과 세계를 향해 ‘이제 좀 느리게 살자’고 호소하였다.

슬로우시티는 공해 없는 자연 속에서 그 지역에서 나는 음식을 먹고, 그 지역의 문화를 공유하며, 자유로운 옛날의 농경시대로 돌아가자는 느림의 삶을 추구하는 국제운동이다.

그런가하면 요즘은 장보기도 슬로우쇼핑이 유행하고 있다. 그래서 멀티숍(multishop)이라는 콘셉트도 생겨났다. 옷이나 패션 액세서리만을 구성 판매했던 것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서점이나, 카페, 갤러리 등을 포함하는 복합공간으로 바뀌고 있다.

여기에는 문화적인 향내가 한 몫을 단단히 하고 있다. 그 시즌 패션에 영향을 미쳤던 음악, 영화, 사진, 그림 등 다양한 장르의 문화 요소를 조화시키고 있다. 손님들이 천천히 여유롭게 즐기면서 쇼핑을 하도록 하는 것이 트렌드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제 현대인들은 빠름의 미덕에서 느림의 미학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래서 ‘사람이 사는데 뜻을 가지려면 여유가 있어야 한다(閑吾可以養志)’라는 말이 첨단을 달리는 이 시대에 가슴에 진하게 와 닿게 된다.

■ 이인권 논설위원장 / 커리어 컨설턴트

중앙일보, 국민일보, 문화일보 문화사업부장과 경기문화재단 수석전문위원과 문예진흥실장을 거쳐 2003년부터 2015년까지 한국소리문화의전당 대표(CEO)를 역임하였다. ASEM ‘아시아-유럽 젊은 지도자회의(AEYLS)' 한국대표단, 아시아문화예술진흥연맹(FACP) 국제이사 부회장, 한국문화예술회관연합회 부회장, 한국공연예술경영인협회 부회장, 국립중앙극장 운영심의위원, 예원예술대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예술경영 리더십> <예술의 공연 매니지먼트> <문화예술 리더를 꿈꿔라> <경쟁의 지혜> <긍정으로 성공하라> 등 13권을 저술했으며 한국기록원으로부터 우수 모범 예술 거버넌스 지식경영을 통한 최다 보임으로 대한민국 최초 공식기록을 인증 받은 예술경영가이다. 한국공연예술경영인대상, 창조경영인대상, 대한민국 베스트 퍼스널 브랜드 인증, 2017 자랑스런 한국인 인물대상, 문화부장관상(5회)을 수상했으며 칼럼니스트, 문화커뮤니케이터, 긍정성공학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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