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백범 김구

2018학년도 대입 수능시험 한국사 문제를 보다가 반가운 지문을 발견했다. 1945년 비밀리에 추진한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이 시험지에 전개된 것이다. 당시 중국 충칭에 거점을 마련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군과 긴밀히 협의하며 이 작전을 준비했다. 먼저 잠수함으로 광복군을 한국에 침투시켜 주요 거점을 장악하고, 뒤이어 대규모 상륙전을 펼치려 했다.

1945년 8월,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섬서성에서 광복군의 특수훈련을 점검하고 있었다. 국내 진공작전을 위한 최종 테스트였다. 그는 젊은 전사들의 열정과 노력에 만족감을 표시하고 디데이를 손꼽아 기다렸다. 8월 15일 일본의 항복 소식은 그런 의미에서 희소식이 아니었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구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고 한다.

비록 일본의 패전이 확정되고 민족은 해방을 맞았지만, 김구는 앞일이 걱정이라고 일지에 적었다. 그가 열망한 것은 단순한 광복이 아니라 ‘대한독립’이었다. 한자 그대로 풀이하자면 스스로 일어서는 것이 ‘독립(獨立)’이다. 광복의 순간도 우리 힘으로 일궈내는 것이 절실하다고 봤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을 준비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하나님이 내게 물으시면 나는 서슴지 않고, ‘내 소원은 대한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다음 소원은 무엇이냐 하면 나는 또, ‘우리나라의 독립이오.’ 할 것이다. 그 다음 소원이 무엇이냐 하는 세 번째 물음에도 나는 더욱 소리를 높여서, ‘나의 소원은 우리나라 대한의 완전한 자주독립이오.’ 하고 대답할 것이다.”

1947년 ‘백범일지’가 국내에서 처음 출판될 때 김구는 ‘나의 소원’이라는 글을 추가했다. 그이에게 ‘독립’은 철학이자 종교였다. 도대체 우리나라의 완전한 자주독립은 어떻게 해야 이룩할 수 있을까? 일제 강점에서 벗어나고 외세의 간섭을 떨치는 게 전부는 아니다. 김구가 말한 ‘독립’은 그 삶의 발자취를 살펴봐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다.

영화 ‘대장 김창수’는 그래서 흥미롭다. 김창수는 김구의 본명 중 하나다. 젊은 날 그는 동학교도, 의병, 승려로 신분을 바꾸면서 ‘좌충우돌’ 인생을 살았다. 1896년에는 명성황후 시해에 대한 응징이라며 수상한 일본인을 살해하기도 했다. 그 현장에서 도망치기는커녕 떡하니 방을 붙였다. 내가 그랬으니 잡아가라고 이름과 주소까지 밝힌 것이다.

청년 김창수는 의로움이 넘치고 격정적이었다. 재판정에서도 그는 판사와 검사를 꾸짖었다. 나처럼 천한 사람도 국모의 원수를 갚기 위해 나서는데 나라의 녹을 먹는 당신네들은 뭘 하느냐고. 그런데 감옥생활은 그이의 삶에 이정표가 되었다. 의로운 격정을 넘어 무엇을 할 것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만난 무지렁이 백성들 덕분이다.

영화에서 김창수는 동료 죄수들에게 글자를 가르치고 대변자가 되어준다. 감옥은 시대의 아픔과 인생의 부조리가 뒤죽박죽된, 풍진세상의 축소판이다. 못 배우고, 가진 게 없다는 이유로 억울한 옥살이를 하는 사람들. 물론 어디에 붙어야 잘 살지 머리 굴리는 자도 있다. 그들과 부대끼면서 청년은 현실에 눈을 뜨고, 자신이 할 일을 찾게 된다.

사형수 김창수는 1898년 고종의 명으로 목숨을 구하고 내친 김에 극적인 탈옥에 성공했다. ‘백범일지’를 보면 이후 그는 기독교 교육사업에 몸을 던졌다. 쓰러져가는 나라를 다시 일으키려면 민초들이 바로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세상을 배우고 진실을 깨달을 수 있게 교육의 문호를 넓힌 것이다. 김창수는 황해도와 서울을 오가며 분주하게 활동했다.

교육사업을 펼치면서 김창수는 이동녕, 이시영, 양기탁, 안창호 등 평생 동지들을 만났다. 을사늑약과 경술국치로 이 나라가 끝내 국권을 상실하자, 그들은 만주에 항일투쟁 거점을 마련하고자 신민회를 결성했다. 불온한 움직임을 포착한 일제는 1911년 신민회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잡아들였다. 거센 검거열풍 속에 김창수는 두 번째 옥고를 치렀다.

“나는 이름을 구(九)라 하고 호를 백범(白凡)이라 고쳤다. 이름을 바꾼 것은 왜의 호적에서 벗어나기 위함이요, 호를 고친 것은 감옥에서 몇 년 간 연구한 결과에 따른 것이다. 미천한 백정(白丁)과 평범한 범부(凡夫)까지 애국심을 갖춰야 완전한 독립에 이른다는 뜻이 담겨 있다.”(백범일지)

백범의 인생철학이라고 해야 할 독립정신은 감옥에서 무르익었다. 독립된 나라는 독립된 인간들이 만든다. 잠든 국민이 깨어나지 않으면 완전한 독립에 이를 수 없다. 그는 이름과 호를 바꾸고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1919년 김구는 상하이로 건너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문지기를 자청했다. 고난의 가시밭길은 1949년 백범이 죽는 날까지 이어졌다.

대한독립을 위해 그가 준비한 것은 광복군의 국내 진공작전뿐만이 아니었다. 김구는 우리나라가 어떤 국가가 되어야 하는지 깊이 연구했다. 동학, 유학, 불교, 기독교 등 젊은 날 접한 여러 가지 사상과 평생토록 몸을 던져 체득한 온갖 경험이 하나로 어우러져 가리키는 것! 그것은 독립된 인간으로서 국민이 자유로운 나라였다.

“우리가 세우는 나라는 자유의 나라라야 한다. 자유 있는 나라의 법은 국민의 자유로운 의사에서 오고, 자유 없는 나라의 법은 국민 중의 어떤 일개인 또는 특정 계급에서 온다. 후자는 독재다.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국가에서는 대다수 국민이 노예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백범일지)

2018학년도 대입 수능시험 한국사 문제와 영화 ‘대장 김창수’는 서로 무관해 보이지만 실은 같은 질문을 던진다. 독립이란 무엇인가? 김구는 일제의 패망으로 조국의 광복을 맞았으나 국민 스스로 일어서는 진정한 독립이 아니었기에 기뻐할 수 없었다. 백범이 흉탄에 세상을 떠난 지 70년이 돼가는 지금도 이 질문은 한국사회의 화두로 남아있다.

[머니투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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