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관오리(貪官汚吏)를 아십니까?

탐욕(貪慾)이 많고 부정(不正)을 일삼는 벼슬아치를 탐관오리라고 국어사전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본능이라고 할 수 있지만 국가의 절대 권력자나 고위직에 있는 자가 탐욕스럽다면 백성들 처지는 불 보듯 뻔합니다. 조선 후기 우의정 조두순의 사랑채에서 엽전 한 닢을 삼켜버린 아이를 걱정하는 노비에게 당대의 재담가 정수동은 어느 대감은 남의 돈 수만 냥을 꿀꺽하고도 아무 탈 없는데 그깟 엽전 한 닢에 별일이야 있겠냐며 그냥 물이나 한 사발 먹이라고 했답니다.

80년대 초쯤인가? 고위직 출신으로 착복의 달인들은 소위 큰손이라는 예우(?)를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높으신 양반은 너무 많이 먹었는지 토해내기도 했는데 그 양반 현재 재산이 모두 합해봐야 28만 원인가 밖에 없다고 책장사라도 해야 먹고살 수 있다고 합디다. 최고 인기를 자랑하는 연예인 보다 자주 텔레비전에 얼굴을 내밀던 나쁜 사람이 얼마 지나지 않아 버젓이 다시 고위직에 앉아 심지어 청백리 행세까지 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1894년 발생한 동학농민운동은 일본 놈들에게 우리나라를 넘보게 하는 빌미가 되었는데 따지자면 조병갑이라는 탐관오리(貪官汚吏)가 없었다면 전봉준(全琫準)은 농민운동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입니다. 농민운동이 발발하던 당시 이미 일본넘 첩자(細作)가 농민을 선동하였다는 주장이 있습니다. 조병갑의 토색(討索) 행위가 없었다면 간특하고 음흉스런 저 일본넘들이 아무리 이간질을 시켜도 농민운동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 분명합니다. 대게 사람들은 역사를 과거지사로 단순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역사는 과거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현재라는 나무는 과거라는 땅속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조병갑이 백성들로부터 착복한 돈은 따지고 보면 그리 크지는 않습니다. 지금의 정읍지역 고부군수(郡守)로 부임한 뒤 흉년을 핑계로 만석보(萬石洑)를 만들고 물세(水稅)로 거둬들인 쌀 700석과 태인 군수를 지냈던 부친의 공덕비를 세운다는 핑계로 백성들을 쥐어짜 1천 냥을 수탈했다고 합니다. 요즘 뉴스에 나오는 전직(前職) 어떤 양반한테 비한다면 푼돈일뿐더러 애들 말로 소위 껌 값에 해당됩니다.

조병갑 보다 한술 더 뜬 놈도 있습니다. 1862년 경상남도 진주지역에서 참다못한 8만여 백성이 소요사태를 일으켰습니다. 소위 진주민란이라 부르지만 그 이유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 백낙신(白樂莘)이 진주목사 황병원(洪秉元)과 공모하여 쌀 5만 2천 석을 착복했습니다. 당시 금액으로 환산해도 15만 6천 냥이나 되는 거액입니다.

1863년 대원군은 정권을 손에 쥐자 개혁 정치를 시도합니다. 모든 정치인들이 그랬듯이 앞으로는 개혁이란 대의명분을 내걸었지만 뒤쪽으로는 호박씨 깠다는 이야기입니다.

파락호 생활을 전전하며 부정부패가 어떤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대원군은 “호서(湖西) 사대부(士大夫)와 관서(關西) 기생, 호남(湖南) 이서(吏胥)라고 했습니다. 충청도 양반들이 부정부패 주역이며 평양 기생들은 그 근원이고 호남 아전이 원흉이라고 풀이됩니다. 그러나 개혁을 부르짖으며 유신정치(維新政治)를 내세운 대원군도 뇌물에는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안동 김씨 우두머리 김병국으로부터 1만 냥을 받아서 아들을 보위에 앉을 수 있도록 힘을 써준 조대비에게 뇌물로 바쳤습니다.

대원군의 사저 운현궁은 각 지방에서 뇌물을 들고 찾아오는 손님으로 낮이고 밤이고 문전성시를 이뤘습니다. 전라도 강진(康津) 군수가 뇌물을 적게 받쳐 면직된 이야기가 당시 전국에 소문이 파다했습니다. 상당히 모범적인 관리로 보이는 강진 군수가 시대의 흐름에 감당할 수 없어 운현궁에 혼사가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참깨 한 섬을 구입해 뇌물로 올려 보냈더랍니다. 얼마 후 새벽같이 운현궁을 찾아가 군수 명함을 내밀었으나 하찮은 문지기로부터 기다리라는 대답만 들었을 뿐 대문 안으로 발도 들여놓지 못했습니다.

해는 이미 중천을 지나 오후가 되고 기다림에 지쳐있을 무렵 자신의 밑에서 근무하던 부하 직원이 나타나 대문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가더니 한참 후 거나한 얼굴로 나오더랍니다. 강진 군수는 자존심도 상하고 쪽팔렸지만 얼마나 바쳤느냐고 슬쩍 물어보았습니다. 지난번 혼수 때 혼숫감을 배(船) 한척에 가득 실어 배까지 상납했다는 대답에 이미 군수 자리가 그에게 넘어간 것을 깨닫고 힘없이 발길을 돌렸답니다. 하긴 조병갑이도 민비에게 뇌물로 7만 냥을 바치고 고부군수 자리를 샀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과거시험 가운데 소과(小科, 생원·진사)에 합격하려면 3만 냥, 대과(大科, 문과와 무과) 급제는 10만 냥을 뇌물로 쓰면 낫 놓고 기역 자를 모르더라도 합격할 수가 있었답니다. 또한 수령으로 임명돼 임지에 부임하려면 초사(初仕), 즉 처음으로 발령받은 수령은 1만 냥, 관찰사나 유수(留守)로 부임할 경우에는 백만 냥을 바쳐야 했답니다. 요즘 세상에야 어디 상상이나 가능한 합니까만 권불십년 화무십일홍 아닙니까? 절대 권력을 휘두르던 어떤 양반은 담배 이름 비슷한 회사 때문에 아주 좌불안석인 모양입디다.

다산 선생이 목민심서에 기록하기를 백성은 논밭을 갈아서 먹고살지만 관리는 백성들 등가죽을 갈아서 주지육림 한다고, 혹 어느 높으신 분이 이 글을 보고 기분 나빠 할까봐 하는 말이지만 요즘 관리들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이야 맑고 깨끗한 세상이니 골프가방이나 사과박스 같은 이야기는 모두 다 오래전에 있었던 옛날이야기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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