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소통]

‘당태종이위공문대’에서 이정이 한 말이다. 그 뜻은 아군의 군기를 엄격하고 분명하게 잡고 경계 태세를 삼엄하게 한 다음 적군의 마음이 흩어져 부대의 기강이 느슨해졌을 때 공격한다는 것이다.

기원전 203년 한신(韓信)이 제나라를 격파한 전투와 625년 이정(李靖)이 힐리가한(頡利可汗)과 벌인 전투가 바로 이 ‘이엄대해’의 책략을 채현한 본보기였다.

‘사기’ ‘역생육가열전(酈生陸賈列傳)’의 기록을 먼저 보자.

기원전 204년, 제나라 왕 전광(田廣)은 한나라군의 진공을 막기 위해 역하(歷下.-지금의 산동성 제남)에 대군을 주둔시켰다. 유방은 역생(酈生)을 제왕 전광에게 보내, 한왕(즉 유방)의 항복을 받아들이고 역하의 대군을 철수시켜 달라며 전광을 유혹하게 했다. 기분이 들뜬 전광은 날마다 역생과 어울려 술과 놀이판을 벌였다. 한신은 역생이 전광을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자 상대의 흩어진 틈을 타 역성을 습격, 제나라의 수도 임치를 점령해버렸다.

630년, 이정은 기병 3천을 이끌고 마읍(馬邑.-지금의 산서성 삭현)으로부터 악양령(惡陽嶺.-지금의 내몽고 화림격 이현 남쪽)을 향해 빠른 속도로 전진했다. 힐리가한은 깜짝 놀랐고 병사들도 두려움에 떨었다. 이정은 몰래 간첩을 잠입시켜 힐리가한의 심복을 이간시키고 야밤에 정양(定襄)을 기습하니, 힐리는 몸만 빠져나와 적구(磧口.-지금의 내몽고 고양현 서북)를 거쳐 철산(鐵山.-지금의 내몽고 고양현 북)으로 달아났다. 그는 사신을 보내 사죄하고 나라 전체를 당에 바치겠다고 했다. 이정이 나가 맞이하고, 태종도 당검(唐儉)을 보내 위로하게 했다. 그런데 이정은 거기에 그치지 않고 힐리가 당의 융숭한 대접에 정신을 놓고 해이해진 틈을 타 다시 기습을 가하여 기어이 그를 사로잡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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