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경기지사가 주장하고 있는 ‘기본소득’을 둘러싸고 최근 정치권 안팎에서 찬반 논란이 일고 있다. 그 와중에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알래스카 외에는 (시행)하는 곳이 없고, 기존 복지제도의 대체재가 될 수 없다”며 반대입장을 폈다. 그러자 이 지사는 7일 자신의 페이스북에서 이 대표를 향해 “사대주의 열패의식”에서 나온 발상이라는 식으로 비판했다. [이 지사 페북 글 참조]

사대(事大), 사대주의(事大主義)란 ‘큰(大) 것을 섬긴다(事)’는 뜻, 혹은 그런 사상의 기조를 말한다. 여기서 ‘큰 것’은 주로 나라, 즉 강대국을 말한다. 우리 역사 속에서 보면 과거 조선은 명나라, 청나라를 섬겼다. 약소국인 조선은 이처럼 큰 나라를 상대할 힘이 없었다. 아프고도 부끄러운 우리의 지난 역사이다.

일제 때는 비슷하거나 더 심했다. 국권은 물론이요, 심지어 우리말과 글조차 빼앗긴 채 꼬박 35년을 식민지로 전락했었다. 일제는 이 땅에 총독부를 세워 실제로 통치를 했고, 모든 행정과 제도는 일본의 것이었다. 그들의 무력 통치에 대해 우리 선조들은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저항했지만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런 불행의 시대를 거쳐 지금 우리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으로 상당히 높은 수준의 독자성을 갖추었다. 근대 여명기와 해방 직후에는 소위 선진국의 제도와 문물을 수입하는 데 급급했다. 그러나 지금은 사회 각계에서 자주적이고 독창적인 틀과 역량을 갖추었다. BTS와 영화 ‘기생충’, 반도체, K-방역 등은 그 같은 토양 위에서 얻은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지사가 주장하는 ‘기본소득’은 이유야 어쨌든 현재로선 지구상에서 알래스카 말고는 시행하는 곳(나라)이 없다. 그렇다면 기본소득 제도는 보편적이고 범용성이 우수한 제도는 아니라는 얘기다. 우리가 흔히 거론하는 미국과 유럽의 여러 선진국, 범위를 좀 넓히자면 OECD 가입 36개 회원국 가운데 그 어느 나라에서도 ‘기본소득’ 제도를 채택하지 않고 있다.

대표적인 선진국으로 꼽히는 스위스는 2016년 이 제도 도입을 놓고 국민투표를 했다. 전 국민에게 우리 돈으로 매달 성인은 300만원, 미성년자는 78만원을 주는 기본소득 지급안을 국민투표에 붙였다. 결과는 유권자의 78%가 반대하여 결국 부결되고 말았다. 스위스는 인구 800만명에 1인당 국민소득이 8만 달러로 세계 최고의 부자나라로 불린다. 당시 스위스 국민의 대다수는 ‘기본소득’을 포퓰리즘으로 평가했다.

이처럼 세계의 여러 나라에서 기본소득을 채택하지 않는 것은 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유수한 선진국에서도 이를 채택한 사례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가 기본소득을 채택하고 말고는 우리 내부의 문제이지 ‘사대주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국민적 합의에 따라 필요성이 공감되면 기본소득을 제도화하여 시행하면 그뿐이다.

설령 미국이나 중국 같은 '큰 나라'가 이 기본소득을 채택하고 있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기본소득이 우리의 실정과 현실 여건에 맞지 않으면 시행할 수도, 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이 문제는 이 지사가 페북에서 언급한 BTS와 영화 ‘기생충’, 반도체, K-방역 등의 신화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기본소득 도입을 마치 BTS 등의 성공신화와 결부시킨 것은 분명 엉뚱한 비유이자 견강부회다.

‘열패(劣敗)’란 남보다 열등하여 패한 것을 말한다. 상대보다 못하면 싸움에서 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잘 알다시피 구한말 우리가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을 빼앗긴 것은 그들보다 군사.경제.문화적으로 열등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힘을 길러야 하며 지금의 우리는 국제사회에서 상당한 실력자가 되었다. 한 예로 우리는 ‘3050클럽’의 멤버이기도 하다.

근자에 우리는 무혈 촛불혁명으로 불의한 권력을 심판했고, 코로나 위기 속에서도 국가와 민족을 잘 건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따라서 ‘사대주의’나 ‘열패의식’ 같은 말은 지금의 우리에겐 ‘갓 쓰고 양복 입은 꼴’과도 같다. 냉정히 말하자면 이런 표현 자체가 구시대적이요, 자기비하다. 상대를 설복시키려면 이런 자극적인 표현보다는 품격을 갖춰야 하며, 비판이 비난투가 돼선 안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만약 우리가 기본소득을 채택하지 않는다면 이는 국민적 필요성이 공감되지 않았거나 현실적인 여건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따라서 이를 ‘사대주의 열패의식’ 때문으로 규정하는 것은 내용적으로도 표현상으로도 온당치 못하다. 이 지사 식으로 독하게 표현하자면 현 단계에서의 기본소득 도입은 마치 임상시험을 제대로 거치지 않은 백신을 전 국민에게 접종하자고 강변하는 식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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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소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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