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정권의 요직에 있던 인물들이 적폐청산의 이름하에 줄줄이 검찰에 불려가고 구속영장이 떨어져서 투옥되고 있다. 과거 군부정권 때 정치의 주요 행위자는 대학생과 군부, 미국이었다. 주권자인 국민은 통치의 객체였다. 대학과 지식인을 한 축으로 하고 그 대척에 군부와 미국이 있었다. 중앙정보부와 이후 개명한 국가안전기획부는 물론 검찰과 법원까지도 권위주의 정권 유지의 전위 역할을 마다하지 않았다. 중정과 안기부는 정치적 탄압과 물리적 억압은 물론 간첩조작 사건으로 사법살인도 서슴지 않는 독재정권의 가공할 자원이었다. 이러한 과거청산작업을 뒷받침하는 정치이론으로 최근 각광을 받는 학문분야가 Transitional justice이론(우리말로 옮기면 과도기적 정의:過渡期的 正義 또는 전환기적 정의:轉換期的 正義)이다. 과도기적 정의는 한마디로 요약되기 힘들만큼 다양한 분야를 망라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과도기적 정의이론의 핵심은 혁명이나 교체대상이 된 정권들이 공분을 살만한 인권의 억압이나 유린 같은 인권 범죄를 가장 중시하면서 이러한 인권억압이나 유린의 실상을 밝히고 그것을 바로잡는데 정의이론(正義理論)의 칼날을 세운다. 물론 나라마다 상황은 다르지만 인권문제이외에도 정권교체에 의하지 않고는 바로 잡을 수 없었던 비리나 부패문제역시 과도기적 정의가 시정하고자 하는 관심사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근현대사는 적폐의 역사다. 집권 정부는 수많은 △정치개입 △인권침해 △비민주적 관행을 자행했다. 이를 청산하려는 역사도 존재했다. 청산은 대개 △진상규명 △가해자 처벌 △피해자 보상 △화해와 역사화의 과정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이를 막으려는 반대 세력은 선행돼야 할 과정을 뛰어넘거나 권력으로 활동을 방해했고, 그때마다 청산 작업은 좌절됐다. 근현대사 속에서 되풀이되는 적폐청산 사업의 실패와 그로 인한 피해를 짚어봤다.

친일 대물림은 현재진행형

1945년 8월 15일, 민족 해방의 기쁨은 일제 잔재 정리의 촉구로 이어졌다. ‘친일반민족행위’를 저지른 이들은 일본제국을 도와 독립운동을 저해하거나 국권 피탈에 앞장섰고, 그 공을 치하받아 부와 명예를 얻었다. 따라서 그들이 누구인지 밝혀내 처벌하자는 국민의 요구가 거셌다. 이에 1948년 제헌국회가 <반민족행위처벌법>(이하 반민법)을 통과시키고 법에 따라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창설한다. 1949년 1월부터 활동에 나선 반민특위는 친일반민족 행위자 약 7천 명을 파악했으며 취급한 조사 건수만 총 682건이었다. 특히 악질 기업가 박흥식을 시작으로 최남선, 이광수 등의 반민족행위자를 검거하면서, 국민의 많은 관심과 지지를 얻었다.

그러나 이들의 행보는 집권 정부의 방해로 멈춰 서게 된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의 활동에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그의 주요 권력 인사 및 지지자 다수가 친일파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국가 안보가 위협받는 상황에서 내부 혼란과 분열을 야기하는 반민특위 활동이 온당치 않다고 주장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반민특위를 막기 위해 폭력도 서슴지 않았다. ‘국회프락치 사건’과 ‘6·6 반위특위 습격사건’이 그것이다. 이에 반민특위의 여러 위원이 사퇴하는데, 이 자리를 친일파 청산 반대 인사가 차지하게 된다. 이로 인해 반민특위는 내부에서 무력화됐다. 결국 1949년 9월 반민법이 개정되고 임기가 축소된 반민특위는 당해 10월 해체된다.

반민특위의 시작은 창대했지만 결과는 미약했다. 한일합방에 서명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사형 선고가 없으며, 대부분 무기징역 이하의 형을 받았다. 뿐만 아니라 활동이 끝날 때까지 검찰부 기소 건수가 222건이었지만, 그 중 △불구속기소 44건 △보석 건수 57건이었다.

이후 여러 차례 친일 잔재를 청산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완벽히 정리되지 못했다. 오히려 친일파 재산의 대물림은 현재 진행형이다. 추적하기 쉬운 토지 외의 금화한 재산, 귀중품들은 국고로 환원되지 않았고, 친일파의 막대한 부는 그대로 후손에게 전해졌다. 

떨쳐내기 힘든 유신의 망령

권위주의 정부 아래 고문수사와 인권유린은 빈번했다. 특히 유신 체제 아래에서는 △인민혁명당(이하 인혁당) 사건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이하 민청학련) 사건 등의 용공조작(容共造作)을 통한 사법살인까지 자행됐다. 피해자들은 고문으로 거짓 진술을 했고, 이로 인해 무기징역 또는 사형 판결을 받았다. 진실은 30년이 지나서야 밝혀졌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후 바로 신군부가 들어서 진상규명이 어려워진 탓이었다. 게다가 진상규명 작업 시에는 국가정보원조차 핵심 관련 자료가 보존되지 않았으며, 피해자에게 무엇이 잘못인지 증명할 증거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 두 사건이 용공조작이었다는 진실이 드러났다.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피고인과 유족은 재심을 청구했고, 그들에게는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그러나 아직 풀리지 않은 사건이 더 많다. 대표적으로 부마민주항쟁이 있다. 당시 반유신시위에 참여한 시민, 학생은 무차별적으로 폭행당했다. 이에 ‘국무총리소속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 및 관련자 명예회복 심의위원회’(이하 부마민주항쟁규명위)가 출범했다. 그러나 제대로 된 진상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이유는 앞선 두 사건과 비슷했다. 결국 부마민주항쟁 수사과정의 고문과 불법체포·구금은 증명되지 못한 채, 지난달 12일 조사가 끝났다. 미비한 조사로 피해자들은 피해 보상받기 어려워졌다.

잘 살고 있다. 가해자만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고 찾아온 ‘서울의 봄’은 길지 않았다.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해 또 다른 권위주의 정부가 수립됐기 때문이다. 이에 전국에서 민주화투쟁이 일어났다. 이날 이후 광주는 며칠간의 폭행과 집단 발포로 피로 물들어졌다. 직접 사망자만해도 165명이며 △후유증 사망자 376명 △행방불명자(암매장) 65명 △부상 3,139명 △구속 및 고문 피해자 1,589명에 달했다.

제5공화국이 끝나자 광주민주화운동 진상 규명이 국정과제로 떠올랐다. 1987년 ‘5.18광주민주화운동진상조사특별위원회’(이하 광주특위)가 설립돼, 신군부의 무자비한 탄압과 학살을 밝힐 거라는 기대가 모아졌다. 광주특위는 전두환 대통령을 포함해 70명의 증언을 확보하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그러나 한계에 봉착했다. 청문회에 출두한 증언자들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변으로 일관했다. 심지어 이 자리에서 전두환 대통령은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대처가 정당한 자위권 발동이라 주장하기도 했다. 그렇게 광주특위는 성과 없이 끝나버렸다. 이후 1995년 <5.18민주화운동 등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신군부 인사들을 처벌할 수 있게 됐다. 이 법에 따라 그들의 죄목을 묻고 그에 따른 사법 판결이 내려졌다. 이때 전두환과 노태우 대통령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최초 발포 명령자가 누군지는 밝히지 못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후 전두환과 노태우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 때 특별 사면돼, 현재 평온한 삶을 살고 있다. 특히 고급 주택에 거주하면서, 경호를 위해 국고에서 지원되는 금액은 8억에 달한다. 전 재산이 29만 원밖에 없어 추징금을 납부할 수 없다던 얘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최근에는 <전두환 회고록>을 발간해 발포 책임을 부인하고, 광주민주화운동을 ‘폭동’이라 표현하기도 했다.

촛불로 교체된 정권 적폐 제대로 청산할까

지난 10년 동안 집권 정부는 권력을 이용해 사익을 취했다. 그뿐만 아니라 △문화계 블랙리스트 △이화여자대학교 학사 청탁 △국가정보원 댓글 동원 등 반민주적인 행동도 일삼았다. 때문에 문재인 정부는 지난 정부의 적폐 청산 사업에 주력하고 있다. 국정농단으로 드러난 사건 외에도 이명박 정부의 정치개입도 조사하고 있다. 진실을 제대로 규명하기 위해 더불어민주당은 ‘적폐청산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이들은 국가정보원 캐비닛 문서를 공개해 여론 조작 증거를 내놓기도 했다. 이밖에도 현재 정부 각 부처에서는 적폐청산을 위한 팀을 구성해 정치개입 및 인권침해, 비민주적 관행을 조사하고 있다.

그러나 야당의 반발은 거셌다. 특히 국가정보원 댓글 수사 은폐 혐의로 수사받던 변창훈 검사 투신을 빌미로 적폐청산 사업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유한국당 이은재 의원은 ‘국정원 수사 방해 혐의를 받던 검사가 투신했고 변호사도 자살했다’며 ‘무리한 하명수사가 쏟아져서 이런 비극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본질을 호도하려는 시도도 등장했다. 자유한국당은 이명박·박근혜 정부보다도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재조사가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정치 보복이 의심된다’고도 말했다. 보수 언론도 가세했다. <부처마다 적폐청산위…“몇 명 구속돼야 끝날 듯”>, <정부기관 19곳 적폐TFT 운영…“사실상 수사” 월권 논란도>의 제목으로 적폐청산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강조했다.

이러한 와중 한 부처의 적폐청산 사업에 적신호가 켜졌다. 국가정보원 적폐청산 진상조사 활동도 반쪽 조사에 그친 것이다. 수많은 정치 개입과 연루된 국가정보원은 정치개입 의혹을 조사하기 위해 내부 자료 분석에 돌입했다. 그러나 현직 직원들이 연루돼 있고, 이들의 비협조로 인해 조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청산 작업은 많은 노력을 쏟아부어도 항상 결말이 미진하다. 이번에도 반대 세력의 반발, 조사 기관의 미흡함 등으로 흐지부지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증거들은 인멸되고 관심도 낮아질 수밖에 없다. 지난 100년의 역사가 그랬듯 말이다. 그렇기에 지금 청산 작업을 반대하는 세력의 논리는 합당치 못하다. 청산 사업은 지금 이뤄져야 한다. 과거의 잘못이 유대에 의해 영향을 끼치는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 말이다.국가의 공식적 정보기관이 공적 영역을 벗어나 비선 라인에 의해 운영되고 공직자와 민간인을 사찰한 정황이 뚜렷하다. 또한 국민의 혈세를 대통령에게 뇌물로 바치고 여론을 조작했다. 이도 모자라 대선에 직접 개입했다. 혐의가 이러한데도 이를 지시한 최종 책임자를 가려내지 못한다면,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의 발포 명령자를 가리지 못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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