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 이승식기자, 기고] 하룻밤만 자고나도 세상이 몰라보게 변해버리는 첨단 디지털(digital)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편지 쓸 일이 거의 없어졌습니다. 손바닥보다 작은 휴대용 전화기로 상대방과 얼굴을 마주보며 영상통화를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누군들 펜을 굴려 편지를 쓰는 불편을 감수하려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계를 이용한 영상통화가 비록 얼굴은 마주보며 얘기할 수는 있지만 어쩐지 편지보다는 진실성이 부족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화 통화야 인파가 북적이고 시끄러운 곳에서도 할 수 있지만 편지를 쓰려면 한적하고 조용한 곳이라야 가능합니다. 오직 상대방을 생각하며 한자 한자 정성들여 쓴 편지야 말로 보낸 사람의 진심어린 마음이 글자마다 묻어있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편지는 2011년 5월 대전시 유성구 금고동에서 미리와 함께 출토된 편지가 500여년 전에 쓴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군관으로 발탁, 함경도 경성(鏡城)지역으로 떠나던 군인이 상급자의 명령에 따라 사랑하는 처자식 얼굴도 보지 못하고 떠나며 보낸 편지입니다. 내용을 옮기면 “여기 분(粉:화장품)하고 바늘 여섯을 사서 보내네. 집에 가서 어머님이랑 애들이랑 다 반가이 보고 가고자 하다가 못 보고 가네. 이런 민망하고 서러운 일이 어디에 있을꼬? 울고 가네. 어머니와 아기를 모시고 다 잘 계시소.”中略 옷가지 등을 챙겨 보내달라는 말로 끝을 맺습니다.

그 시대에 분과 바늘은 대단히 귀한 공산품으로 수출입이 원활치 않던 시절이니 구입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며 수없이 뒤돌아보았을 군관의 모습과 아내에 대한 남편의 애틋한 사랑을 그려볼 수 있습니다. 1998년 4월 안동에서 머리카락으로 삼은 미투리와 함께 출토된 편지는 내셔널지오그래픽이 '사랑의 머리카락(Locks of Love)'으로 소개했던 한국판 사랑과 영혼 주인공의 편지는 전 세계인을 울리고 말았습니다.

당신 언제나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고 하셨지요.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를 의지하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십니까? 당신 나에게 마음을 어떻게 가져 왔고 또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왔나요? 함께 누우면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여보, 다른 사람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 까요?

어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가요? 당신 없이는 아무리 해도 나는 살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나를 데려가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 이승에서 잊을 수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습니다. 내 마음을 어디에 두고 어린자식과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이내 편지보시고 내 꿈에 와서 말씀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편지를 써서 넣어 드립니다...中略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미투리를 삼으며 병든 남편의 쾌유를 기원했건만 끝내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아내는 애절한 심정으로 편지를 써 미투리와 함께 한지에 곱게 싼 다음 관속에 넣었는데 북망산 가는 길에 신고가라는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입니다. 400년이란 세월이  흐른 탓에 언문으로 쓴 편지 내용이 상당부분 훼손되어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남편을 일찍 떠나보내야만 했던 부인의 애절하고 절박함이 구구절절 합니다.

조선시대 대 학자 다산(茶山) 정약용은 강진 땅에서 유배생활을 하던 중 아내가 보내온 색 바랜 치마를 받아들고 “병든 아내가 낡은 치마를 보내왔네, 천리 먼 곳에서 마음을 담아 보냈구나, 오랜 세월에 붉은 빛 바랜 것이 늙은 내 모습 같아 처량하구나.”...中略 사대부집 여인으로서 차마 드러내놓고 사랑한다는 표현이야 못했지만 귀양살이 간 지아비를 기다리다 청춘이 가버린 아내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신 춘원 이광수는 우리나라 최초 여의사인 허영숙과 결혼을 했으나 부인이 곧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이렇게 홀로 건너 방에 앉아 당신께 편지를 쓰는 것이 나의 유일한 행복입니다.” 라고 서두를 시작 했습니다. “금일 140원을 송금한 돈은 잘 받았을 줄 아오, 공부하는 중이고 공부가 곧 저금이니 저축은 아니 해도 좋소, 여름에 레인코트 같은 옷이 필요할 것이니 모두 값을 적어 보내주시오.”....(중략)

비록 두 번째 결혼이기는 하지만 깨소금이 쏟아진다는 신혼 초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간 부인에게 공부가 곧 저금이란 말이 코끝을 찡하게 합니다. 처가에서 장모와 함께 살던 이광수는 당시 한 달 월급이 150원이었다고 합니다. 월급의 전체에 해당하는 140원을 보내주었으니 낮선 타국에서 생활하는 부인에게 학업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마음을 헤아려준 남편의 배려로 여겨집니다.

칠순이 지나서도 왕성한 활동을 멈추지 않는 소설가 박범신은 “당신에게 편지를 쓸 수 있는 밤이 있다는 것은 고마운 일입니다, 눈을 감으면 세상은 당신과 내 가슴속에 잠들고..中略 사랑을 상징하는 분홍색 원고지에 아내에게 향한 사랑을 그려냈습니다. 근래에 발표한 ‘당신’이라는 작품 서문에도 “나이 일흔에 쓴 이 소설을 부끄럽지만 나의 ‘당신’에게 주느니 부디 순하고 기쁘게 받아주길!”이라고 썼다니 로맨틱하지 않습니까?

희미하게 비치는 창밖으로 탐스런 함박눈은 소리 없이 내립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은 점점 깊어지고 적막한 시간에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하지 못하고 마음속에 묻어 두었던 이야기를 편지에 써 보내면 사랑은 더더욱 커지고 깊어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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