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괄(趙括), 지상담병(紙上談兵)의 고사성어(古事成語)를 낳게 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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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괄(趙括), 지상담병(紙上談兵)의 고사성어(古事成語)를 낳게 한 인물
  • 이정랑 (논설위원, 중국고전 평론)
  • 승인 2021.03.09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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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 人物論(52) 書生을 起用할 때는 愼重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서생이란 호언장담만 하고 실천과 경험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이지 학문이 깊고 넓은 인사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요즘 윤석열의 난동으로 온 나라가 시끄럽다. 제 일신의 출세와 명예를 위해 국민과 국가는 안중에도 없는 그의 파렴치한 난동의 종말은 결국 그가 몸담았던, 검찰을 근본부터 회생 불구로 망쳐놓고, 그도 모자라 정치권마저 망칠 조짐이다.

소양왕(昭襄王)/ⓒ나무위키
소양왕(昭襄王)/ⓒ나무위키

기원전 270년, 진나라 소양왕(昭襄王)은 위나라 사람 범저(范雎)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가 제시한 원교근공(遠交近攻-먼 나라와 친교를 맺고 가까운 나라를 공격한다. 즉, 이해가 긴밀하지 않더라도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국가와 친교를 맺는 외교정책)의 대외정책을, 받아들였다. 이는 진의 대외정책이 크게 성숙 되어 닥치는 대로 공격하고 싸우는 소모적이고 무리한 외교전략에서 탈피했음을 의미했다.

이 정책에 따라 진은 멀리 떨어져 있는 제나라 등과는 우호 관계를 맺고 가까운 한(韓)나라 등은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매년 조금씩 영토를 확장했고 국력은 갈수록 강해졌다. 이 ‘원교근공’의 정책은 진이 16국을 통일하는 데 외교적 기초를 마련해주었다.

소양왕은 제를 공격하는 과정에서 한 차례 좌절을 겪고 난 후 완전히 범저의 계략에 따르기 시작했다. 대내적으로는 태후를 폐하고 양후(穰侯-진나라 소양왕의 모후인 선태후(宣太后)의 동생으로 당시 진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었다)를 축출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제나라와 일시적으로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한나라에 대해선 공격을 감행했다. 기원전 262년, 진왕은 대장 왕흘(王齕)을 파견하여 한을 공격하고 양왕성을 점령했다. 이로써 한나라는 두 토막이 나서 상당과 본토가 완전히 격리되었다. 이로 인해 한은 상당지역을 진에 바치고 그 대가로 철군을 요청하기로 했다. 그러나 이때 상당군의 장수인 풍정(馮亭)이 투항을 반대하면서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상당지역을 진에 헌납하느니 차라리 조나라에 헌납하는 게 낫습니다. 조가 상당을 손에 넣게 되면 진은 이를 빼앗으려 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조와 연합하여 진을 공격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부분의, 대신들이 이에 동의함에 따라 한나라는 조에 사자를 보내 상당지역을 헌납했다.

조나라 효성왕(孝成王)은 사리에 밝지 못한 인물이라 거대한 땅을 거저 얻었다는 생각에 몹시 기뻐하면서 평원군(平原君)에게 5만 대군을 이끌고 가서 이를 접수하라고 명령했다. 상당에 도착한 평원군은 풍정을 화릉군(華陵君)으로 봉하고, 상당 태수로 임명하려 했으나 풍정은 고사하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국토를 헌납함으로써 부귀를 얻은 만큼, 봉작은 가당치 않다는 것이었다. 평원군이 재차 간청하고서야 풍정은 비로소 승낙하면서 막대한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진왕은 조가 땅을 가로챈 것에 몹시 분개하며 왕흘에게 당장 상당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풍정은 세력이 미약하여 저항하기 힘들었고 40일을 사수한 끝에 백성들과 함께 조나라로 피난하다가 장평관에서 조의 지원군과 마주치게 되었다.

시간이 꽤 지나서야 지원 병력을 보내기로 한 조왕은 염파(廉頗)를 대장으로 임명하고 20만의 병력을 파견했다. 염파는 진군과의 일전에서 크게 패한 후, 승리가 여의치 않음을 깨닫고 보루를 단단하게 쌓아 진을 치고 싸움을 피했다. 염파는 장수들에게, 이기든 지든 간에 진영 밖으로 나가 싸우는 자는 무조건 목을 베겠다는 엄명을 내렸다. 염파의 작전은 장기전으로 진군의 힘을 빼면서 군량을 고갈시킨 후에 진군이 퇴각할 때 뒤쫓아가 섬멸하겠다는 것이었다. 경험이 풍부한 노장 왕흘은 장기전의 위험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속지 않고 여러 차례맹공을 시도했으나 함만 뺐을 뿐, 조군을 보루 밖으로 끌어내지는 못했다. 결국, 왕흘은 진왕에게 보고를 올리기에 이르렀다.

“조군의 통수 염파는 전쟁 경험이 풍부하고 공수(攻守)의 이치를 잘 알고 있습니다. 그가 계속 보루를 지키면서 밖으로 나오지 않기 때문에 아군은 그와 결전을 벌일, 기회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미 3년이 지나 군량과 마초의 공급에도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대왕께서 달리 방법을 구하지 않으시면 진군은 전부 불귀의 객이 되고 말 것입니다.”

이때 승상이 되어 있던 범저가 말했다.

“진군이 염파 같은 노장을 만난 이상 대적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보기에 염파의 유일한 전략은 장기전으로 끌고 가는 것입니다. 조군을 이기려면 전략을 바꾸게 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조군의 주수(主帥)를 성격이 급하고 무지한 인물로 교체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인물로는 조사(趙奢)의 아들 조괄(趙括)이 가장 적격이지요.”

범저는 조나라의 관원을 매수하여 유언비어를 퍼뜨리기 시작했다. 며칠 후 조나라의 조정에는 염파가 나이가 많아 젊은 시절의 예기를 상실하고 진군과의 결전을 피하고 있는데, 젊고 힘이 넘치는 조괄로 머지않아 진군을 무너뜨릴 수 있을 것이라는 의견이 분분했다. 조왕은 염파가 결단력이 없어 싸움에 나서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러한 논의가 일자 당장 사람을 보내 전쟁을 재촉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염파는 조왕의 재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공격을 미룬 채 수비에만 전념했다. 이에 대로한 조왕은 당장 조괄을 불러들여 장평의 진군을 무찌를 수 있는지 물었다. 조괄은 허세를 부리며 백기(白起)같은 장군도 자기 앞에서는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이 말에 힘을 얻은 조왕은 즉시 조괄을 보내 염파를 대신하여 조군을 통솔하게 했다.

조괄(趙括)은 조의 명장 조사(趙奢)의 아들이었다. 기원전 270년, 진 소양왕이 왕흘을 시켜 조의 연여 지구를 공격하자 조왕은 조사를 보내 조군을 지원하게 했다. 조사는 경솔하게 싸움에 뛰어들지 않고 한단에서 30리 떨어진 지점에 군사를 주둔시킨 다음, 몰래 진군에 첩자를 보내, 조군의 장수가 겁이 많아 감히 쳐들어오지 못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했다. 이에 진군의 방비가 소홀해진 틈을 타 진군을 기습 공격하여 유리한 고지를 점령한 다음 대대적인 공격에 나서 속수무책인 진군을 대파하고 돌아왔다.

조사는 대단히 신중한 성격에 학식과 경험이 풍부한 명장이었으나 그의 아들 조괄은, 일개 허풍쟁이에 불과했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했으며, 열정적인 성격에 토론을 좋아하여 부친과 적지 않은 병서를 함께 학습하면서, 자주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말재주가 뛰어난 조괄이 경전의 내용을 인용하며 부친의 견해를 공박하곤 했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지상담병(紙上談兵-종이 위에서 병법을 말한다는 뜻. 조괄과 관련된 이 고사는 자신의 지식만 믿고 나섰다가 낭패를 당한 경우를 말한다)에 지내지 않았다. 조괄은 실전경험이 전무 하면서도 이론적 지식만 믿고 자신을 천하무적의 명장으로 과대평가했다.

이때 조괄의 부친 조사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조괄의 모친은 조왕이 자신의, 아들을 주수로 임명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즉시 조왕을 찾아가 울면서 호소했다.

“남편이 임종 직전에 제게 당부하기를 절대로 대왕께서 조괄을 기용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했습니다. 전쟁이란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어려운 일로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제 아들은 경험이 부족할 뿐 아니라 성격이 매우 경솔하여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병사들의 지지도 못 받고 있습니다. 제 남편 조사는 왕이 후한 상을 내리실 때마다 이를 전부 병사들에게 골고루 나눠주었고 일단 명령을 받으면 집안을 돌보지 않고 전심전력 나라를 위해 병무에 임했습니다. 하지만 제 아들 조괄은 장군이 되자마자 사람들을 업신여기기 시작했고 대왕께서 베풀어 주신 은전을 고스란히 집으로 가져와 전답을 사들이면서 병사들에겐 한푼도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이런 인물이 어떻게 대장이 되어 병사들을 거느리고 싸움에 나갈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선 당장 명령을 거두어주십시오.”

승상 인상여도 나서서 적극, 반대했지만 조왕은 자신의 결정을 철회하지 않았다. 조괄의 모친은 간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다시 조왕을 찾아가 말했다.

“기어이 조괄을 주수로 보내시겠다면 나중에 그가 일을 그르치더라도 남은 가족에게 죄를 묻지 않겠다고 약속하시고, 이를 문서로 남겨 가족이 죽임을 당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조왕은 그 요구를 받아들여 조괄의 성공 여부에, 관계없이 가족에게 죄를 묻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약속했다. 집으로 돌아온 조괄의 모친은 아들이 패전할 것이 분명하다고 판단하고 가산을 정리하여 이웃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주수가 된 조괄은 장평으로 가서 염파의 자리를 인수한 다음, 일부 장수들을 교체한 후 조군을 지휘했다. 그는 염파가 진행하던 방어진지의 구축을 중단하고 진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격을 준비했다. 진은 조가 자신들의 계략에 말려들어 염파 대신 조괄을 내보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몹시 기뻐하며 백기를 대장으로, 왕흘을 부대장으로 파견하면서 병력을 크게 증강 시켰다.

풍정 등 경험이 많고 신중한 일부 장수들은 조괄이 너무나 성급하게 싸움에 임하는 것을 보고 강력하게 저지하면서 염파의 전략을 설명해주었으나 조괄은 막무가내였다.

“염파 따위가 뭘 안다고 그러시오? 내겐 40만 대군이 있어 세력이 막강하고 사기가 하늘을 찌를듯하단 말이오. 나가서 진군을 섬멸하지 못하면 절대로 퇴군하지 않을 것이니 두고 보시오!”

진군의 백기는 백전노장으로 용병의 이치에 통달한 인물이었다. 그는 조괄에게 약간의 미끼를 던져 병력을 유인하기로 마음먹고 최소한의 병력을 내보내 먼저 싸움을 걸고 몇 차례 지는 척했다.

이에 기고만장해진 조괄은 직접 대군을 이끌고 성 밖으로 밀고 나왔다. 오히려 왕흘이 방비에 전념하며 싸움에 응하지 않자 조군은 왕흘을 포위하고 며칠 동안 공격을 계속했다. 조괄이 이처럼 자만에 찬 공세에 여념이 없을 때, 퇴로가 이미 진군에 완전히 차단되었다는 비보가 날아들었다. 이어서 또 다른 장군의 소식이 도착했다. 서쪽에 진군이 잔뜩 진을 치고 있어 통행이 불가하고 동쪽에서만 진군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조괄은 이미 삼면으로 포위당해 동쪽 길로만, 철군이 가능했다. 간신히 5리 길을 달렸을 때 조군은 또 진군과 마주쳤다. 진군의 대장 몽오(蒙鰲)가 고함쳤다.

“조괄! 넌 이미 무안군의 계략에 걸려들었다!”

조괄은 무안군 백기의 이름을 듣고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앞뒤 생각 없이 서둘러 진을 치려 했다. 풍정을 비롯한 노장들이 나서서 아직은 전력이 우위에 있으니 지금이라도 서둘러 포위선을 뚫으면 무사히 돌아갈 수 있다고 권고했으나 조괄은 이마저 무시했다.

백기는 조괄이 물러서지 않고 진을 치는 것을 보고는 동쪽마저 차단하여 완전히 포위해버렸다. 조괄은 이런 상태로 46일을 버텼지만, 밖에선 구원병이 도착하지 않고 안에선 군량과 마초가 떨어져 병사들이 서로 잡아먹는 일까지 벌어졌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조괄은 전투에 능한 병사들을 선발하여 포위망을 뚫어보려 했으나 매번 진군의 공격에 막혀 희생만 가중되었다. 조괄은 마지막 수단으로 5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말에 올라 진군의 왕전(王翦)과 몽오에 맞서 결전을 벌였지만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다. 조군은 조괄이 죽자 전의를 상실하여 한 차례의 혼전 끝에 전부 투항했고 백기는 투항한 40만 대군을 열 개의 대오로 나누어 감시했다. 그날 저녁 백기는 조군 병사들에게 술과 고기를 나누어주고 일부 장수들에게는 상까지 내리면서 말했다.
“노약자나 집으로 돌아가길 원하는 사람들은 내일 즉시 진영을 떠나도록 조치하고 진군에 남기를 원하는 사람은 진군의 대오로 편입시켜 무기를 지급해 주겠다.”

그날 밤 조 군의 포로들은 모두 안심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백기는 투항한 조 군에게 의심과 분노를, 가지고 있어서 이들이 진심으로 투항한 것이 아니므로 이들을 제거해야만 뒷날이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진군 병사들에게 휜 머리띠를 두르게 하여 조군 병사들과 구분한 후 한밤중에 조군의 병영을 급습하여 모두 포박했다. 그리고 미리 파놓은 수십 개의 거대한 구덩이에 이들을 전부 산 채로 매장해 버렸다. 하룻밤 사이에 조군의 40만 병사가 무참하게 살해된 것이다.

백기는 조의 병사 240명만 살려서 돌려보냄으로써 진의 위풍을 과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조나라는 슬픔과 비통에 휩싸였고, 그 후로 더 기세를 회복하지 못하고 진에 의해 멸망 당하는 비운을 맞았다.

이는 진이 ‘원교근공’의 외교정책을 실행한 이후에 거둔 가장 큰 승리였고, 이로써 진은 외교와 군사 분야에 있어서 16국을 통일할 수 있는 실질적인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조나라의 패망은 어떤 의미에서는 조괄이라는 서생 한 명이 초래한 비극이라 할 수 있다. 결국, 지상담병의 교훈은 ‘어설픈 지식은 한 번의 경험보다 못할 수도 있음’을 가르쳐준다. 또 ‘인사에 있어서 적재적소에 맞는 인물을 배치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특히 서생이라는 특수한 유형의 인재를 기용할 때는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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