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읽고 새로 쓰는 古典疏通]人物論(53) 조정에서는 재상, 전장에서는 맹장

모든 서생이 다 무능하고 계책이 없지는 않았다.

다양한 장군의 품격 가운데 최고의 경지는 역시 유장(儒將-선비 출신의 장수)이라 하겠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문무를 겸비한 유장에게는 두 가지 장점이 상호 보완적 기능을 수행하여 그만큼 인격적 매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유장이 되는 일은 그리 쉽지 않다. 중국 역사에는 스스로 유장임을 표방한 인물이 무수히 많았지만 진정한 유장이라 할 만한 인물은 극히 드물다. 그 이유는 장수로서의, 자질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학자로서의 인격이 불충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유장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명대의 대학자였던 왕수인(王守仁-1472~1528)이 이를 증명한다. 그는 학자로서 자질과 능력이 충분했고 중국 역사상 가장 큰 업적을 남긴 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서 문화의 거인으로 자리 잡고 있다. 또 그는 수많은 작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워 무장으로서의 능력을 보였고 황실에 대한 반란을 평정하기도 했다.

명 무종(武宗) 정덕(正德) 14년(1519), 강서에서 기병하여 반란을 일으킨 영왕(寧王) 주신호(朱宸濠)가 각지의 중진을 함락시키고, 불과 사흘 만에 파죽지세로 구강 등지를 장악했다. 이런 소식이 전해지자 조정과 민간이 큰 혼란에 빠졌지만, 군신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명조에는 이전에도 이런 사건이 발생한 적이 있었다. 연왕(燕王) 주체(朱棣)가 자신의 봉지인 북경에서 모반을 일으켜 수년간에 걸친 정전 끝에 혜제(惠帝-명나라의 2대 황제인 건문제(建文帝))의 황위를 빼앗았던, 것이다. 때문에, 조정은 큰 불안에 휩싸여 불운한 역사가 반복될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조정이 이처럼 비통한 분위기에 젖어 있을 때 병부상서 왕경(王琼)은 침착하게 반란을 진압하고 큰 공을 세울만한 유장을 물색했다. 이때 그의 눈에 든 사람이 바로 당시의 유명한 학자이자 철학자였던 왕수인이다.

왕수인은 일찍부터 주신호의 모반을 예견하고 이를 미리 방비해둔 바가 있었다. 한번은 그가 복주에서 주신호를 배알, 연회에 동석했을 때였다. 한때 시랑을 지냈던 이사실(李士實)도 주신호의 문객으로 자리를 함께하게 되었다. 시정에 관한 담론이 오가면서 이사실이 탄식을 내뱉었다.

“세상이 이처럼 어지러운데 안타깝게도 탕무(湯武) 같은 인물이 없구려!”

당시의 상황에서 이 말은 두 가지 중요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첫째는 황제에 대한 모반의 뜻을 드러내는 것이고, 둘째는 왕수인이 심학(心學-중국의 정주학(程朱學)과 대립 되는 심즉이설(心卽理說)의 학문체계, 넓은 뜻으로는 마음을 수양하는 학문으로 유교 전체를 말하기도 하나, 일반적으로 송나라 때의 육상산(陸象山), 명나라 때의 왕수인(王守仁)이 제창한 학문을 일컫는다.)을 창시하여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암암리에 다른 사람이 성인이 되도록 돕는 것임을 암시하는 것이었다. 총명하고 눈치 빠른 왕수인은 그의 의도를 알아차리고 말을 받았다.

“탕무가 살아있다 하더라도 이려(伊呂)가 보좌해 주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도 없을 것이오.”

주신호가 자신 있게 말했다.

“탕무가 있다면 자연히 이려도 있게, 마련인데 걱정할 일이 무엇이란 말이오?”

이사실을 이려에 비유한 주신호의 말에 왕수인이 응수했다.

“이려가 있다면 틀림없이 이제(夷齊)도 있을 것이오.”

이제는 옛날 은나라의 백이와 숙제를 지칭했다. 주 무왕이 은의 주왕을 멸해 주나라 천하가 되자 두 형제는 주나라의 양식을 먹지 않겠다며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다가 결국, 굶어 죽고 말았다. 역사에서는 백이 숙제 형제를 절개 있는 현인으로 칭송하고 있다.

이때 이후로 왕수인의 심지를 알게 된 주신호는 항상 그를 경계하면서 기회 있을 때마다 그를 해치려고 했고, 왕수인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주신호의 일거일동을 철저하게 감시했다.

6월 9일, 감주를 출발한 왕수인이 15일에 풍성에 도착하자 풍성 지현은 주신호가 모반을 일으키는 동시에 왕수인의 목에 현상금을 걸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임기응변에 능한 왕수인은 즉시 복장을 바꿔 임강으로 잠입했다. 임강 지부는 왕수인이 도착했다는 소식에 신발도 신지 않은 채 황급히 달려 나와 영접하고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성지를 지킬 계략을 제시해 달라고 간청했다. 왕수인이 대덕유(戴德儒)에게 말했다.

“임강은 장강(長江-양자강을 달리 이르는 말) 유역에 있어 남창과 인접한 데다가 교통의 요충지인 만큼 길안으로 가는 것이 좋겠소.”

대덕유는 이에 찬성하면서 반군을 막아낼 계책을 물었다. 왕수인은 적의 위치와 형세에 대해 세밀하고 체계적인 분석을 마친 후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신호의 용병에는 상중하 세 가지 계략이 있소. 그가 곧장 경사로 쳐들어간다면 나라가 위급한 지경에 처해 예상치 못한 후환을 조성하게 될 텐데 이것이 상책일 것이오. 아니면 먼저 남경을 점령하여 장기전 태세를 갖출 수도 있는데, 이것도 큰 피해가 우려되는 상황이오. 이는 상책이 될 수는 없지만, 중책이라 할 만하오. 하지만 그가 남경을 사수하면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는 하책이 될 것이오. 그때 가서 관군을 한대로 집결시켜 사방에서 한꺼번에 공격한다면 그는 항아리 속의 자라가 되어 손쉽게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대인은 이런 구체적인 상황에 맞춰 다양하게 조치를 하도록 하시오.”

그러고 나서 왕수인은 비밀리에 고깃배를 한 척 구해 직접 길안으로 향했다. 얼마 후 반군의 추격을 받게 되자 그는 평민 복장으로 갈아입고 부하에게 자신의 관복을 입고 타고 있던 배에 남아 있게 했다. 주신호의 부하들은 이 배를 뒤쫓아 붙잡았으나 왕수인이 이미 멀리 도망쳤다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되돌아갔다. 도중에 주신호가 공격하여 성지를 함락시킬 것을 우려한 왕수인은 밀정을 보내 조정의 밀지를 가장하여 양평과 호양의 어사와 남경과 북경의 병부는 즉시 장수들을 출동시켜 비밀리에 요충지에 매복하고 있다가 주신호의 대군이 몰려오면 이들을 기습공격하라는 명령을 전달했다.

그는 이런 조치로도 충분치 못하다고 판단하고 우령(優伶) 몇 명을 고용하여 이런 명령이 담긴 서한을 옷섶에 지니고 다니게 했다. 우령들이 출발할 때쯤 그는 또 영왕 태사의 가족들을 사로잡아 그들을 배에 태워 일부러 이런 명령을 알게 했다. 그러고는 크게 화를 내며 이들을 배에서 끌어내려 목을 베라고 호통쳤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이 몰래 도망쳐 주신호에게 거짓 정보를 전달하게 하려는 술책이었다.

이런 소식을 들은 주신호는 우령들을 붙잡아 그들의 옷 속에서 서찰을 발견하고는 정말로 조정에서 병력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으로 오판하고 출병을 망설였다. 한편 무사히 길안에 도착한 왕수인은 길안 지부 오문정(伍文定) 등과 함께 주신호에 대한 방어 전략을 상의했다.
“적병이 장강을 타고 동쪽으로 이동한다면 남경을 지켜내기 어려울 것이오. 하지만 내가 이미 그들의 동행을 저지할 수 있는 조치를 해놓았소. 열흘 후에 여러 지역의 군마가 집결하면 주신호와 결전을 벌여도 문제가 없을 것이오. 옛 성현들께서도 일이 닥쳤을 때는 두려움을 갖고 진지하게 책략을 준비하라 하셨소. 이제 곧 군사를 움직여야 할 터이니 먼저 군량과 마초를 충분히 확보하고 병기와 배를 넉넉하게 갖춰 결전에 대비하도록 하시오.”

그리하여 왕수인은 군마와 군량, 마초를 준비하는 동시에 사방에 방을 붙여 16만 대군이 남창 부근에 집결할 예정이라 대량의 군량이 필요하니 제때 군량을 내도록 하되 이를 어기는 사람은 참수하겠다는 포고를 내렸다.

주신호가 포고문을 보고는 진위를 가리지 못해 밀정을 보내 알아보게 했으나 너무나 치밀한 계략에 밀정도 이를 사실로 알고 그대로 보고했다. 결국, 주신호는 목을 감춘 자라처럼 남창 성안에 틀어박혀 감히 남경으로 진군하지 못했다. 왕수인도 여전히 성을 지키면서 출병하지 않자 오문정은 이를 이상하게 여겨 그 이유를 물었다.

”용병의 도리에 따르자면 적을 기습 공격하는 것은 부득이한 경우에 하는 일이오. 지금 반군이 성안에서 꼼짝하지 않은 채 방비에 전념하고 있으니 공격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오. 내가 공격을 미루면서 일부러 수비가 허술한 척하면 주신호가 먼저 참지 못하고 공격해올 터이니 그때 가서 그가 차지했던 성을 수복하고 그의 본거지를 제거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오. 그가 다시 성을 공격하기 위해 병력을 돌릴 때 진로를 차단하고 공격하는 것이 거점을 포위하여 공격하는 것보다 훨씬 수월할 것이오.“

오문정은 왕수인의 전략에 감탄하여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주신호는 남창을 사수한 지 열흘쯤 지나도 관군의 공세가 시작되지 않자 정찰병을 보내 상황을 면밀하게 파악한 결과 자신이 왕수인의 계략에 말려들었음을 깨달았다. 후회막급이었지만 이미 때는 늦어버렸다. 그는 서둘러 6만의 병사와 군마를 모아 10만 대군을 자칭하면서 파양호를 출발하여 남경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남창에는 최소한의 병력만 남아 지키게 했다. 그러나 주신호는 안경에서 관군의 저항에 부딪혀 며칠 동안 성을 포위하여 적극적인 공격을 펼쳤지만, 병력의 손실만 가중될 뿐 전세가 나아지지 않고 진퇴양난의 함정에 빠져버렸다.

그 사이에 왕수인은 어렵지 않게 군대를 이동시킬 수 있었다. 이제 시기가 무르익었다고 판단한 왕수인은 오문정 등 길안에서 온 병력과 포고에 따라 각 지역에 집결한 8만의 병력을 이끌고 7월 중순에 팽성에 도착했다. 이때 장수하나가 그럴듯한 계책을 제시했다.

”주신호는 열흘 동안의 치밀한 계략 끝에 출병한 만큼 남창성의 방비 또한 철저하여 일시에 함락시키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지금 안경을 공격하고 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병사들의 사기가 크게 털어져 있을 터이니 대군을 파견하여 안경의 병력과 합세하여 양면에서 협공하면 대승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남창의 병력은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이는 대단히 일리 있는 허허실실 책략으로 병가의 도리에 합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왕수인의 생각은 달랐다.

”아니요.! 아군이 남창을 가로질러 내려가 장강에서 적군과 대치한다면 안경의 병력은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지 몰라도 장강으로 와서 우리를 지원하지는 못할 것이오. 게다가 남창의 병력이 우리의 뒤를 공격하게 되면 보급로가 끊어지고 남창과 구강의 적병이 합세한다면 우리는 앞뒤로 적을 상대해야 하기에 훨씬 불리한 상황으로 몰릴 수 있소. 차라리 남창을 먼저 공격하는 것이 좋을 것 같소. 주선호의 정예 병력은 전부 안경에 있기 때문에 남창의 수비는 허술할 수밖에 없소. 아군의 사기가 한참 올라 있는 이때에 남창을 치면 반드시 승리할 것이오. 주선호가 아군의 남창 공격 사실을 알게 되면 틀림없이 병력을 돌려 지원하러 오겠지만 그때는 이미 세력이 크게 약해져 있을 것이고, 일단 남창을 함락시키면 적군의 기세는 크게 꺾여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질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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