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란 무엇인가(3회)

《덕산재(德山齋)》 거실에는 도올(檮杌) 김용옥(金容沃 : 1948~) 박사의 휘호(揮毫) 한 점이 걸려 있습니다. 1991년 10월 3일 원불교 여의도교당 봉불식의 강연으로 원불교와 인연을 맺은 것을 기념하기 위해 저에게 써준 휘호이지요.

「神이 세계를 창조했다면, 이 세계는 신을 창조한다. 창조는 한 시절에 완결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내일 4월 28일이 원불교 대각개교절입니다. 그 도올 김용옥 선생이 4월 16일 자, 원불교신문에 <원불교란 무엇인가?>에 대해 기고(寄稿)하신 글이 실려 있습니다. 원불교도가 아닌 학자가 제 3자의 눈으로 원불교를 바라본 객관적인 원불교를 《덕화만발》에서 연 3회에 걸쳐 게재(揭載)합니다.

<원불교란 무엇인가?>

【본시 완벽한 언어는 무의미한 언어다. 그것은 인간 박중빈의 언어라고 말하기 힘들다. 그러나 『조선불교혁신론』에는 박중빈의 일상적 언어가 소박하게 실려있다. 한용운·백용성·백학명·박한영·송경허와 같은 이들의 논의는 불교교단 내의 유신(維新)임에 반하여, 박중빈의 논의는 현실적·역사적 불교 그 자체를 뛰어넘는 혁신을 말하고 있다.

그는 우선 외방의 불교를 조선의 불교로 만들어야 한다고 주창한다. 이에 박중빈은 매우 래디칼한 발언을 한다. 외방의 불교를 구성한 모든 언어, 즉 불교교리의 숙어, 명사를 단절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인도 말, 고전 중국어로 결구된 언어적 구성물을 파괴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선재래의 불교 언어에도 오염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언어의 단절은 가장 본원적인 단절이다. 그래서 내가 원불교는 불교가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그것은 길룡리의 풍진(風塵)일지언정, 부다가야 보리수나무 밑의 명상이 아닌 것이다. 사은이야말로 진정한 박중빈의 깨달음의 전체, 기존의 어떠한 종교적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는 순결한 우리 삶의 지고한 언어라는 생각을 굳혀가게 됐다.

박중빈은 등상 불(等相佛) 숭배를 불성(佛性) 일원상(一圓相)으로 바꿔야 하는 당위성을 농가에서 참새를 못 오게 하기 위하여 세워 놓는 인형 허수아비에 비유한다. 참새들이 며칠은 오지 않을지 모르나 곧 그것이 허수아비임을 깨닫고 올라앉아 똥을 싸며 유희를 일삼는다는 것이다. 무식한 새도 허수아비를 알아보는데, 최령(最靈)한 인간이 인형(人形) 등상 불을 2천 년 동안이나 모셔왔으니, 이게 도대체 말이 되냐는 것이다.

예수 재림을 기다리는 부활대망공동체를 만든 바울의 거짓말을 2천 년 동안 모셔온 서양종교사에는 박중빈 류의 근원적 혁신은 그 그림자도 얼씬하지 않는다. 나는 일원상의 진리를 “참새 똥”에서 비로소 깨달았다. 원광대 한의과대학 6년 재학의 최대결실이었다. 참새 똥은 모든 종교의 이념과 심볼리즘으로 부터 나를 자유롭게 했다.

흔히 원불교를 진리의 종교라 말하고, 사실의 종교라 말하고, 일원상의 진리를 들어 그것을 설명하곤 한다. 그런데 일원상의 레토릭만을 들으면 공허할 뿐이다. 나는 박중빈의 대각의 핵심이 일원상에 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지만, 박중빈의 언어의 핵심은 그가 인간을 바라보는 눈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 시각(視覺)이 바로 사은(四恩)이다. 처음에 나는 사은을 매우 촌스러운 언어라고 생각했다. 뭔가 그랜드한 느낌을 주는 난해성 같은 것을 결하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이해되는 듯하면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은이야말로 진정한 박중빈의 깨달음의 전체, 기존의 어떠한 종교적 언어로도 표현될 수 없는 순결한 우리 삶의 지고한 언어라는 생각을 굳혀가게 됐다.

사은(四恩)은 인간을 "은(恩)의 존재"로 규정한다. 은은 관계를 의미한다. 내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관계 속에서 은혜를 입었다는 사태를 입증한다는 것이다. 그 은의 근원으로서 천지, 부모, 동포, 법률 4항목을 제시한다. 천지는 곧 부모이며, 부모는 곧 천지이다. 천과 지간의 교합에 의하여 생성되는 모든 존재가 나의 동포이다. 그리고 이 동포들이 살아가는 문명의 방식이 법률이다.

천지가 없이 나는 태어날 수 없었다. 부모가 없이 나는 태어날 수 없었고 성장할 수 없었다. 동포가 없이 나는 생존할 수 없었다. 법률(조금 난해한 개념이다)이 없이 나는 생활의 질서와 이상적 미래를 꿈꿀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천지 은으로 규정된 나는 천지에 보은을 해야만 한다.

부모, 동포, 법률에 대한 보은도 마찬가지다. 원불교가 진정으로 사은을 자각한다면 보은의 행동을 취해야만 한다. 그것은 곧 원불교는 원불교 교리 자체 내에 머물러서는 아니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불교는 원불교를 벗어나야 한다. 소태산-정산-대산 삼대에 걸친 눈부신 축적이 위대했던 것은 그들이 교리를 정교하게 만들어서가 아니라 시대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 흐름을 선도하는 비전을 제시했고 사회적 울림을 만들어냈기 때문이었다.】

어떻습니까? “나는 원불교가 종교를 뛰어넘는, 이적(異跡)과 신비를 거부하는 위대한 생명의 종교라고 확신하지만 박중빈의 외침에 너무도 못 미치는 현황이라고 안타까운 느낌을 토로할 수밖에 없다.”는 이런 말을 도올 선생 외에 어느 누가 원불교를 이렇게 깊은 애정을 가지고 충고를 할 수가 있겠는지요?

이상으로 연 3회에 걸쳐 제가 존경하는 도올 선생의 <원불교란 무엇인가?>의 글을 보내 드렸습니다. 이만 하면 우리 덕화만발 가족들이 원불교란 종교의 실상을 어느 정도 더위잡으시는 데는 부족함이 없지 않을 까요!

단기 4354년, 불기 2565년, 서기 2021년, 원기 106년 4월 27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