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부쩍 일본의 징조가 이상합니다.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각종 교과서에 올려 자라나는 학생들을 세뇌하고 있습니다. 또 이번에는 후쿠시마 원전의 오염수를 태평양에 버리겠다고 위협합니다. 그런가 하면 하버드대학 램지어라는 친일 학자를 내세워 우리 한 맺힌 할머니들을 모욕하기 일쑤입니다.

이 모든 사건을 그냥 우연의 현상이라고 생각하는지요? 정말 묻지 않을 수 없는 일련의 사태들입니다. 방구가 잦으면 뭐가 나온다 했던가요? 우리가 만만하게 보인다면 큰 코 다칠 우려가 다분합니다.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서애 류성룡 표준 영정. (사진=국립현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서애 류성룡 표준 영정. (사진=국립현대미술관)

<징비록(懲毖錄)>이라는 책이있습니다.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 1542~1607)이 임진왜란 때의 상황을 기록한 자료이이지요. ‘징비’는 고전 《시경(詩經)》에 나오는 ‘스스로를 미리 징계해서 후환을 경계한다.’는 의미의 ‘여기징이비후환(予其懲而毖後患)’이라는 문장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방비를 하지 못하여 전국토가 불에 타버린 참혹했던 임진왜란의 경험을 교훈 삼아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경계하자는 뜻에서 책의 제목으로 사용된 것입니다. 이 책은 1599년 2월 집필하기 시작하여 1604년에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필사본 <징비 록>은 조수익이 경상도 관찰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 서애 손자의 요청으로 1647년(인조 25)에 16권 7책으로 간행한 것입니다.

임진왜란 이전의 조선과 일본의 관계, 명나라의 지원병 파견 및 조선 수군의 제해권(制海權) 장악 관련 전황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징비 록에는 또 조정 내의 분열, 임금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원망과 불신, 무사안일로 일관했던 상당수 관료와 군인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의 전쟁준비 소홀과 그로 인해 유발된 참담한 결과를 묘사했습니다. <징비 록>은 1969년 11월 7일 국보 제132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징비 록에서는 부산 첨사 정발이 절영도로 사냥을 나갔다가 일본군이 바다를 메우며 몰려오자 부산 성으로 달아났으며, 일본군이 뒤따라와 성을 함락시킨 것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해서는 지방행정관이 일본의 공격으로부터 관문인 부산을 방비해야 할 필요성을 조정에 보고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있던 중앙의 고급관료들이 조선군이 일본군과의 첫 전투인 부산 성 전투에서 참패하고 전멸당한 것에 대한 책임을 지방의 행정관에게 뒤집어씌운 것이라는 견해도 제시되고 있습니다.

어떻습니까? 미래는 과거의 결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역사를 돌아보는 이유는 다가올 미래를 알기 위함인 것입니다. 함석헌(咸錫憲 : 1901~1989)옹은 역사를 설명하기를 “한 사람이 잘못한 것은 모든 사람이 물어야 하고, 한 시대의 실패를 다음 시대가 회복할 책임을 지는 것” 이라고 명료하게 답했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징비 록>을 읽어 본 사람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더 놀란 사실은 오래 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책방에서 <징비 록>을 발견하고 어떻게 이것이 일본사람이 읽는 것인지 의아 했던 일이 생각됩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이 <징비 록>이 1647년에 간행되었는데, 일본에서는 1695년에 벌써 번역되어 간행된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징비 록>이 ‘에도시대’에 이미 일본 지식인들 사이에 베스트셀러였다는 것을 듣고는 읽어야 할 사람은 읽지 않고, 경계의 대상인 일본인들이 읽었다는 사실에 아연실색(啞然失色)을 한 것입니다. 우리 역사가 임진왜란, 병자호란, 일제 강점기라는 뼈아픈 역사가 왜 반복되었을까요?

이것은 우리가 역사를 게을리 하고 역사의 교훈을 잊은 탓이 아닐까요?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히는 수모의 역사가 또다시 되풀이되지 말라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자강(自强)할 수 있도록, 우리를 담근 질해야 하는 것입니다. <징비 록>을 읽노라면 울분을 삭일 수가 없게 됩니다.

어떻게 그렇게 망하는 일만 골라서 하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왕은 백성을 팽개치고 도망가기에 급급했고, 신하들은 자신의 안위만을 살폈으며, 장수들은 싸움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군사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가기에 급급했지요. 이런 것을 바라보는 백성은 원망하고 통곡하다 급기야 분노하여 경복궁에 불을 질렀습니다.

왜군 침입 후 첫 승전을 올렸던 부원수 신각은 도원수 김원명이 자신을 따라 도피하지 않았다며 명령 불복종 죄로 몰려 우상 유홍의 주청으로 참형되었습니다. 나중에 신각이 전투에 이겼다는 보고가 올라오자 조정에서 참형을 중지하려고 급히 선전관을 보냈으나 이미 집행한 후였지요.

한산도 대첩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도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며, 그를 추천한 유성룡도 공격을 받았습니다. 1586년 일본 사신 ‘다치바나 야스히로’는 예조판서가 베푼 잔치 자리에서 술에 취해 자리 위에 후추를 흩어 놓았습니다. 그랬더니 기생들과 악공들이 다투어 줍는 소란을 보고 통역에게 “너희 나라는 망할 것이다. 기강이 허물어졌으니 망하지 않기를 어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라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우리 다시 <징비 록>을 읽어야 합니다. 지금의 나라꼴을 보면 나라가 극도로 어려워질 징조가 보이는 것 같습니다. 여야가 죽기 살기 싸움은 그만하고 제발 다가오는 국난에 대비하면 얼마나 좋을 까요!

단기 4354년, 불기 2565년, 서기 2021년, 원기 106년 4월 30일

덕산 김덕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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