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치 쪽이 꽉 막혀

 조금 이른 저녁이었지만 답답한 마음에 술잔을 기울입니다. 참 하기 싫은 이야기들을 또 하고 마네요. 왜 우리는 지금도 아픔을 이야기해야 한단 말입니까! 한두 배 알코올이 들어가자 고통이 꿈틀거리는 생생한 이야기가 오갑니다. 전 입에 담아서는 안될 이야기들을 극구 말려봅니다. 하지만 가족들의 가슴 속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는 저의 이성의 작동을 간단히 무력화시켜 버립니다. 요즘 부쩍 힘이 들고 마음이 시렵습니다. 제가 그런데 가족들은 오죽하겠습니까.

엄마 한 분에게 볶음밥을 권해봅니다. 아구찜 남은 양념에 김 향기가 모락거리는 맛있는 밥을 권했건만 한 술 뜨고는 이내 고개를 젓고 맙니다.

"명치 쪽이 꽉 막혀 먹을 수가 없어요."

배에서 올라온 아이의 살이 떠올라 아무것도 목구멍에 넘어가지를 않습니다. 망할 놈의 국가는 아이의 사망 추정 일시조차 알려주지 않습니다. 1년이 지나 아이의 죽음을 온 마음을 바쳐 애도하려 해도 도대체 언제가 아이를 보낸 지 1년이 되는 날인지 알 수 없습니다. 4월 16일 이후부터 아이가 올라온 그날까지의 매일매일이 가족들에게는 기일입니다.

하루도 버거운데 매일 매일 기일인 나날을 그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꿈에 부쩍 자주 나타나는 아이를 생각하며 미친 사람처럼 넋 놓고 하늘을 보았다 땅을 보았다 합니다. 눈시울이 붉어지다 웃다가 눈물이 줄줄 흐르다가 쌍욕이라도 내뱉다가 다시 멍하니 주저앉아 담배를 물어봅니다.

잔인한 '어르신'

세월호 참사 피해자 가족들은 술도 먹으면 안 되고 담배도 피우면 안 됩니다. 아이를 앞세운 부모가 나돌아 다니며 술이나 먹는다고 사람들이 보는 눈이 매섭습니다. 가족들은 매 순간 그런 세상의 눈총을 의식하며 살아갑니다. 가슴 속에 꽉 차고 또 차올라 넘치기 직전인 분을 어찌하지 못해 생 몸부림을 치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너무 잔인하지 않습니까? 가족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려보려 하지 않고 알량한 자신들의 '도덕률'을 들이대는 것이 말입니다. 눈가가 벌개서 주저앉아 담배 한 대 피워 문 어느 엄마를 '어르신' 한 분이 못마땅한 얼굴로 쳐다봅니다. 다행이 말로 참견을 하지는 않았지만 주위를 배회하며 계속 눈총을 주십니다.

 '어르신'이지만 참 나쁩니다. 어떤 이들은 함부로 입을 놀리기도 하지요. 돈 더 받으려 저 난리를 친다고, 그리고 동네에서는 술이나 먹고 담배까지 피더라고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입니다. 그것이 은밀한 폭력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참 나쁜 우리입니다.

금연이 당연시 되는 지금의 세태에서 본다면 철지난 이야기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따져봐야겠습니다. 여자가 담배를 피워서는 안 된다는 '도덕률'은 도대체 누가 무슨 권한으로 만들었나요? 그런 어처구니없는 미세한 권력의 폭력들이 멀쩡한 보통 사람들을 옥죄고 거꾸로 근본적인 죄악들을 덮어오지 않았나요? 남자에게만 허용된 담배 문화야말로 우리 사회의 보수성을 상징하지요.

이건 금연주의의 '정당성'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보수적인 '어르신'들에게 여자란 그저 조신하게 밥이나 하고 남자의 특권을 뒷바라지 하는 존재여야 합니다. 그런 근본에서부터 왜곡된 잣대를, 아픔을 조금이라도 잊기 위해 피워 문 어느 엄마의 담배 한 대에도 아무런 죄의식 없이 들이대고 있다는 말입니다.

동네 '어르신'도 그러할진대 깔끔쟁이로 금연하고 매일같이 호텔 휘트니스 클럽에서 땀 흘리시는 돈 많고 잘난 분들의 눈총은 오죽하겠습니다. 그들의 잘난 폭력적 시선에서는 가족들이 가난하고 무식하고 무질서한 '저열한 존재'로밖에는 비춰지지 않겠지요.

여기에 우리 사회의 병의 근원이 있습니다. 돈 많고 잘난 분들의 깔끔한 겉태 뒤에는 성완종의 검은 돈과 이완구의 거짓 눈물과 같은 썩은 내 나는 저열함이 있습니다. 기름 번드르르한 이완구가 흘리는 '눈물'을 측은해 하고, 가족 엄마의 떨리는 손가락에 쥐어진 담배 한 대는 싸늘하게 바라보는 그 시선이야 말로 어리석고 저열하고 잔인한 것 아닐까요?

훈육된 우리의 몸속에 흐르는 보수의 피가 이 사회를 옥죄고 가치를 전도시키며 멀쩡한 사람을 '저열하게' 만드는 폭력의 원천이자 교묘하고 은밀한 죄

악의 근원입니다.

유민 아빠 김영오 씨의 분노

 동료 교수가 쓴 글에 유민 아빠 김영오 씨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혼한 유민 아빠를 비난하는 우리 사회의 '가벼움'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더군요. 이 사회는 도대체 왜 유민 아빠의 아이 사랑을 공감하지 못하는 걸까요? 이혼하여 더 애잔한 아빠의 마음, 많이 주지 못해 먹먹한 수많은 회한들, 그리하여 광화문을 떠나지 못하는 그의 사랑을 어찌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요?

이혼은 죄이고, 이혼한 아빠는 아이를 버린 죄인이며, 김영오 씨의 싸움은 거짓이라는 '도덕률'은 위선 덩어리입니다. 유민이 동생 유나가 아빠의 가슴에 안겨 사랑을 건넵니다. 아빠는 미안하고 또 미안해서 그저 손만 꼭 잡고 말이 없지요. 그런 그를 향해 아이를 버렸다고 돌을 던지는 사회, 그야말로 죄 많은 사회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내를 사랑하지 않게 되어 이혼을 한 아빠는 죄인이 아니라 그저 불행한 경험을 한 사람일 뿐입니다. 사랑이 식어 급기야 아내를 미워하게까지 되어버렸다면 아프지만 이혼을 할 수밖에요. 불행한 결정을 한 아빠는 혹여 아이가 마음의 상처를 받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조심스럽게 사랑을 건넸을 겁니다.

잠시만 생각해봐도 유민 아빠의 그런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집니다. 사랑하지 않는 아내를 도구로 이용하며 언어폭력과 온갖 속박을 일삼는, 이혼하지 않은 남편은 거꾸로 이 사회에서는 죄인이 아닙니다. 그저 이혼을 부정하는 '도덕률' 하나만 부여 쥐고 온갖 위선적이고 폭력적인 죄악에는 눈감는 사회이지요.

학교에서는 이혼한 집의 아이를 '결손 학생'으로 취급한다는군요. 유나는 이혼한 아빠를 사랑하고 걱정하며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데도 말입니다. '정상 가정'만을 '정상'으로 보는 왜곡된 '도덕률'의 잣대, 그 잣대를 아이들에게까지 들이대며 무언의 폭력을 행사하는 학교, 그런 위선 덩어리만 존재하지 않는다면 아이들은 스스로 쑥쑥 자라납니다. 이혼이 아이들을 병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위선적이고 도덕적이지 못한 미세한 폭력들이 바로 아이들을 병들게 합니다.

 '아이 바보' 김영오 씨와 '아빠 바보' 유나의 늠름하고 감동적인 사랑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이지요. 하지만 지금도 김영오 씨는 위선 덩어리인 이 사회의 폭력으로 인해 분노의 나날을 견뎌가고 있습니다. 함께한 저녁 자리에서 '아이 바보' 김영오 씨는 어찌 투쟁을 이어갈지에 대해 외치고 또 외칩니다. 이 사회의 음울한 어두움이 그를 더 이상 '투사'로 만들어가지 않기를 두 손 모아 기도했습니다. 그 외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뫼르소의 부조리

 세상은 1주기를 맞은 가족들에게 잔인하게도 매일같이 칼날을 꽂습니다. '사기 시행령'으로 꽂고 배보상 공격으로 꽂고…차벽으로 꽂고 물대포와 최루액으로 또 꽂습니다. 비수에 찔린 그들에게 우리는 또 다시 무관심의 칼날을 꽂습니다. 그 틈을 타서 선거로 꽂고 재판으로 꽂고, 도대체 그칠 줄을 모릅니다.

정신 못 차릴 만큼 칼에 찔린 그들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말들을 토해 냅니다. 말이지만 말이 아닌 말들…그 속에 꼭꼭 채워 담겨진 억울함과 절망과, 피를 토할 만치 끓어오르는 분노와, 그리움과 허망함과 두려움이 식당 안을 가득 메웁니다. 어느 엄마는 투쟁의 의지를 불태우지만 눈망울 깊숙한 곳에 제발 도와달라는 가녀린 속마음이 그득합니다. 어느 엄마는 톡 건드리기만 해도 연방 깔깔거리고 웃지만 이미 쉬어버린 목소리에는 견딜 수 없는 슬픔이 배어있습니다.

어느 엄마는 오늘은 저녁 안 챙기고 취하고 말 거라고 호방한 척 하지만 발그레한 얼굴 표정 속에는 산 자의 미안함과 근심 걱정이 가득합니다. 또 어느 엄마는 유가족만 보면 아이의 죽음이 떠올라 타지에서 알바를 시작한다 말하지만 흐려진 말끝에서 혼자되는 두려움과 외로움이 역력히 느껴집니다. 부조리, 그리고 설명할 수 없는 혼돈의 먹구름이 우리 모두를 엄습합니다.

전혀 이어지지 않는 연상인데도 왠지 알베르 카뮈의 <이방인>이 떠오릅니다. 전혀 다른 색깔임에도 불구하고 뫼르소나 느낄 법한 부조리함이 가족들에게도 느껴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앞섭니다. 뫼르소가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눈물 흘리지 않는 '이상한 행동'을 했었다고 사형을 선고받았듯이 가족들도 투쟁했다고, 웃었다고, 이혼했다고, 술 마셨다고, 담배를 물었다고 사형을 선고받는 것은 아닌지….

그들은 아랍인을 죽이지도 않았고, 그저 자신의 아이들이 가장 부조리한 죽음을 당했을 뿐인데 말입니다. 위선 덩어리인 이 세상이 그들을 그렇게 몰고갈까봐 두렵습니다. '저열한' 인간들이 돈 더 받으려 '저열한 짓'을 하고 있다고 아직도 그 더러운 입을 놀리고 있는 세상이 두렵습니다. 뒤에서 온갖 죄악을 일삼으며 앞에서는 위선적 '도덕률'의 칼춤을 추는 이 사회가 가족들의 고통을 극단으로 몰고 가는 이 상황이 두렵기 짝이 없습니다.

상자 텃밭

 그래도 우리는, 투쟁이나 일삼고, 허망한 웃음이나 웃어대고, 이혼도 하고, 술 마시고, 담배까지 무는 가족들과 함께 상자 텃밭을 가꿀 겁니다. 고잔동 기억 저장소에서 상자 텃밭을 시도해보기로 했거든요. 미숙해서 말도 많았고 지루하기조차 한 회의도 많이 거쳤지만, 결국 동사무소의 협조를 얻어 아무도 놀지 않는 놀이터에 가족들과 함께 하는 텃밭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5월 10일 일요일에 다 같이 모여 흙과 거름을 섞고 정성스레 모종을 심을 겁니다. 동네 할머니들이 놀이터를 더럽힌다고 꾸지람 하실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그 꾸지람은 기름 번드르르한 권력자들의 은밀한 폭력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위선적 '도덕률'을 들이대며 가족들을 아프게 하는, 그리 함으로써 스스로의 비겁함과 부도덕함을 애써 덮으려 하는 보수주의자들과도 완전히 다릅니다.

뭘 해결할 수 있을지 잘 모릅니다. 두렵고 자신 없고 혼돈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그저 아프고 명치끝이 꽉 막히고 새벽에 일어나 꺼이꺼이 울기만 하는 가족들이지만 그래도 그들과 함께 쌈 채소 정도는 잘 키울 수 있습니다. 채소가 자라 먹음직스러워지면 동네 할머니들과 마음 맞는 이들을 모셔서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키는 그 날을 상상해봅니다.

이방인이 될 위험에 처해있으나 우리는 이방인이 아닙니다. 상자 텃밭처럼 작고 보잘 것 없지만 부도덕한 권력보다 더 길고 강할지 모릅니다. 우리가 들이키는 막걸리 한 사발이 위선적인 권력자들의 고급 와인 한 잔보다 진실하기 때문입니다.
김익한 교수는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에 재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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