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프리존=안데레사기자] "위안부 문제에 대해 일본이 한국과 합의도 했고 배상도 했는데 왜 한국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그것을 알기 위해 한국에 왔습니다." 지난 1일 각자 한국에 도착해서 오는 5일까지 4박5일간 서울시청, 나눔의집, 윤동주자료관, 판문점 등을 방문한 뒤 일정을 마치면 역시 각자 해산한다.

▲ 사진'서프라이즈' / 사진=MBC 방송화면 캡처

올해 대학을 졸업하고 <교토신문>에서 기자로 일할 예정인 미나미씨의 관심은 위안부 문제다. 그가 처음 위안부문제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지난 2014년이다. 당시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의 실태를 처음 보도했던 전 <아사히신문> 기자이자 이번 방문의 인솔자인 우에무라 다카시씨가 한 대학의 교수로 임용되자 일본 우익세력들이 학교측을 집단 공격해 그를 교수직에서 물러나게 했던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통해 처음 위안부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됐고, 일본이 과거 굉장히 나쁜 일을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이 일본 신문에 게재된 이유는 무엇일까. 24일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최초 보도한 일본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의 이야기가 공개됐다.

1990년 6월 일본 정부는 한국 여성단체들의 계속되는 위안부 문제 제기에 "우리는 전혀 관여하지 않았다"며 위안부 문제에 대해 부인했다. 하지만 1년 뒤 아사히 신문 사회면 1면에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였던 한 여성이 일본군 만행과 참담한 실상을 증언한 내용이 담겨 있던 것.

이 기사를 작성한 사람은 아사히 신문사 사회부 소속 기자 우에무라 다카시. 그는 1978년 와세다 대학에 입한한 후 재일교포와 함께 생활하며 한국에 큰 관심을 갖게 됐고, 1987년 아사히 신문사에 입사한 후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윤정옥 대표가 쓴 기고문을 보고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거나 증언을 거부해 취재는 쉽지 않았다.

이후 1991년 8월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피해자 할머니가 직접 녹음한 증언 테이프를 우에무라 다카시에게 전달했고, 그는 그 내용을 바탕으로 기사를 작성했다. 이후 테이프로 증언했던 김학순 할머니가 최초로 기자회견에 나서면서 피해자 할머니들의 증언이 잇따르기 시작했다.이번 방문단을 인솔하고 있는 우에무라 다카시씨(가톨릭대 초빙교수)는 "한일 관계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양국의 기자들이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보도를 하는 게 아니라 각자의 정부 입장만 대변하고 있는 것같아 안타까웠다"며 "그래서 기자를 지망하는 양국 젊은이들이 기자가 되기 전에 만나 교류하고 서로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무라야마담화, 고노담화 등에서 일본은 과거의 잘못에 대해서 여러번 한국에 사과하기는 했지만 진정성을 보여주지 못했다"며 "만약 아베 총리가 독일의 브란트 총리가 했던 것처럼 무릎꿇고 사과한다면 한국 사람들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냐"고 말했다. 한국특파원을 지내 한국어가 유창한 우에무라씨는 지난 1991년 위안부 참상을 처음으로 증언한 고 김학순 할머니의 사연을 보도했지만 이후 일본의 우익세력에 의해 '날조기자'란 공격과 비판을 받은 뒤 대학교수로 자리를 옮겼으나 역시 우익의 공격 때문에 자리를 내놔야했다. 이에 일본 극우 단체는 우에무라 다카시를 향해 "날조 기자이자 매국노"라며 비난했고, 우에무라 다카시는 교수로 임용을 앞둔 상황에서 임용이 취소되거나 가족들의 신상정보가 인터넷에 퍼지면서 협박을 받기도 했다.

▲ 사진: 일본 사회에 위안부 문제를 알리는 데 기여한 우에무라 다카시(58·植村隆) 전 아사히신문 기자(현 가톨릭대 초빙교수)가 한일 위안부 합의 1주년인 28일 서울 주한일본대사관 근처에서 진행된 집회에 참석했다.

하지만 우에무라 다카시는 "기사를 쓴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고 굳건한 입장을 고수했으며, 현재는 가족에게 피해를 준 극우 매체를 상대로 소송을 진행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 윤정옥, '위안부'의 진실 … 숨겨진 문을 열었다. 1943년 당시 열일곱살이던 윤정옥 교수는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 전신) 1학년생이었다. 결혼하지 않은 여성들이 한반도 각지에서 마구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다. 많은 학생들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 결혼을 서두르거나 자퇴를 했다.

▲ 사진 정대협 제공

윤 교수는 부모의 권고로 학교에 자퇴서를 냈고 금강산 온주리로 이주를 했다. 해방이 되고 학도병들과 강제연행을 당하거나 징병을 당한 이들이 고향으로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윤 교수의 또래 여성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에게 물었지만 다들 대답을 회피하거나 마지못해 "군수공장에 간 게 아니라 줄을 선 남자들에게 당했다" "해방이 되자마자 집단학살 당했다" 등의 얘기를 할 뿐이었다.

해방 이후 남과 북이 나뉘면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파고들기에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러던 중 윤 교수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인 고 배봉기 할머니(1991년 10월 사망)에 관한 한 신문기사를 1970년대 말 접하게 된다. 이후 1980년대 그 기사를 들고 윤 교수는 무작정 배 할머니가 계시다는 오키나와에 찾아간다. 주소도 배 할머니의 생존 여부도 모른 채 헤매던 윤 교수는 극적으로 만남을 갖지만 당시 배 할머니는 '위안부' 생활로 인한 여러 정신질환에 시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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