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의 대선출마 선언에 부쳐

지난 6.29일 서울 양재동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관'에서 윤석열이 대선출마 기자회견을 가졌다. 대선출마 선언문에서 윤석열은 자신에 대한 격려와 지지를 그저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 법을 집행하면서 위축되지 말라는 것으로 생각해왔다고 소회를 밝혔다. 현 정부를 공정과 상식을 무너뜨리고 자유와 법치를 부정하는 세력으로 규정하면서 더 이상 집권을 연장하여 국민에게 고통을 주지 않도록 정권을 교체하는데 헌신하고 ‘앞장서라’는 뜻으로 자신에 대한 격려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윤석열과 한동훈(사진출처:뉴스프리존, 2021.2.15. http://www.newsfreezone.co.kr/news/articleView.html?idxno=298024)
윤석열과 한동훈(사진출처:뉴스프리존, 2021.2.15.

이 같은 윤석열의 생각을 읽노라면, 그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가 원하는 것은 정권을 교체하여 다름아닌 자신이 ‘앞장을 서고 싶다’는 것이고, 보고 듣는 모든 것이 그 권력에 대한 자신의 집착으로 연결된다는 점이다. 그가 밝힌 소회는 검찰총장 재직시 검찰개혁에 눈과 귀 다 막고, 아래로 검찰의 횡포에 시달리는 기백 만 사법 피해자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위로 행정 권력을 견제하는 데 골몰했던 행적과 정확하게 같은 맥락에 있다.

윤석열은 검찰총장인 자신이 행정부 권력을 견제하지 않으면 할 사람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 분명하다. 삼권이 분립되어서 행정, 입법, 사법부가 서로 견제한다는 민주적 분권 이론은 윤석열이 보기에 미흡했던 것이다. 급기야 윤석열은 자신이 정권을 잡아야 하겠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의 선언문은 ‘정권교체는 반드시 해야 한다’는 데서 시작하여 그 같은 내용으로 끝을 맺는다. 그가 원래 정권을 잡고 싶어서 위를 처받아 행정부 권력을 흠집을 낸 것인지, 아니면 행정부가 할 일을 다 못해서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분명한 것은 윤석열이 다른 이가 아닌 자신이 필히 ‘앞장서서’ 권력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독선이다.

짧은 선언문에 현 정부를 공격하는 이유로 그가 열거한 것은 여러 가지인데, 구체적 내용이 뒷받침되지 않은 선언적인 것이다. 그는 정권교체를 이루지 못하면 “개악과 파괴를 개혁이라 말하고, 독재와 전제를 민주주의라 말하는 선동가들과 부패한 이권 카르텔이 지금보다 더욱 판치는 나라가 되어 국민들이 오랫동안 고통을 받을 것이고, 그야말로 ‘부패완판’ 대한민국이 될 것”이라고 한다.

왜 현 정부가 추진하는 개혁이 개악과 파괴이며, 윤석열이 지키려고 하는 기존 검찰의 아성이 정의가 되는 것인지, 왜 민초가 뽑아올린 현 정부가 독재와 전제 정부이고 윤석열 자신은 ‘자유민주주의자가 되는 것인지, 부패한 이권 카르텔이 왜 현 정부에만 있고, 야당 국회의원이나 윤석열 주변에는 없다고 하는 것인지 설득력있는 근거는 제시되고 있지 않다.

또 윤석열은 현 정부가 “법을 무시하고 매표에 가까운 포퓰리즘 정책”을 구사한다고 하고, 국민을 내 편 네 편으로 갈라 상식과 공정, 법치를 내팽개쳐 나라의 근간을 무너뜨리고 국민을 좌절과 분노에 빠지게 하였고, 정권과 이해관계로 얽힌 소수의 이권 카르텔은 권력을 사유화하고, 책임의식과 윤리의식이 마비된 먹이사슬을 구축하고 있고, 권력을 사유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집권을 연장하여 계속 국민을 약탈하려 한다고 매도했다.

그런데 윤석열이 현 행정부를 향해 비난하는 이 같은 작태는 피아(彼我)를 가릴 것 없이 지난 정부 및 그 전통을 다소간 이어받은 현재 야당 의원, 나아가 그 보수세력과 결탁한 각종 언론, 검찰 및 법원 등 부패한 사법권력, 기업 자본가 등에 광범하게 연루된 것이다. 여야를 가릴 것 없이 한국 정치사회의 현주소가 보편적으로 그러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윤석열은 그런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현 행정부만 비난했다. 그것은 소수의 이권 카르텔이 권력을 사유화하여 국민을 약탈하는 현실을 근본적으로 고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다만 권력만 쟁취하려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자신이 ‘앞장’을 서고 싶어서, 현 정부를 비리의 온상으로 몰고 그래서 집권을 연장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독선이다.

윤석열은 “거대 의석과 이권 카르텔의 호위를 받고 있는 이 정권은 막강하기 때문”에 정권교체로 나라를 정상화시켜야 된다고 한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어도 또 다른 카르텔이 그 자리를 메꿀 뿐, 그 같은 무리들이 그 같은 작태를 여전히 연출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윤석열은 털어놓지 않았다. 정권이 바뀌면 촛불 이전의 정부로 돌아갈 위험에 대해서 그는 함구하고, 오히려 모든 게 정상이 된다고 무책임하게 호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윤석열의 속임수이다.

윤석열은 “열 가지 중 아홉 가지 생각은 달라도, 딱 한 가지 생각, 정권교체로 나라를 정상화시켜야 된다”, “정권을 교체하여 국민이 진짜 주인이 되는 나라를 만들어야 하므로, 모든 사람들이 힘을 합쳐야 한다”고 한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함께 힘을 모을 때, 우리는 더 강해지고, 그래야만 이길 수 있고, 그러면 빼앗긴 국민의 주권을 되찾아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다음에 나타난다. 원래 국민이라는 단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홉 가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 그러면 그 가운데서 강해지고 이기는 사람이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생긴다. 국민이 강해지고 이기는 것이 아니라 윤석열이 강해지고 이기는 것이 될 뿐이다. 그 윤석열은 검찰총장으로 있을 때같이 조직을 자신의 왕국으로 만들게 될 것이다.

윤석열은 26년 자신의 공직 생활을 두고 법과 정의,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현실에 구현하는 과정, 공정과 법치를 실현하는 과정으로 스스로 평가했다. 그리고 여전히 미래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고 헌신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검찰총장, 검찰조직의 왕초로 그가 군림할 때 보여주었던 선택적 정의를 기억하고 있다. 나물 날 곳은 잎새부터 안다.

윤석열의 대선 출마 선언문은 현 정부를 매도하는 한편, 자신이 잘해나갈 것이라는 전망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이 두 가지가 다 구체성이 없고 피상적이다. 현 정부를 두고 그는 “국민들이 뻔히 보고 있는 앞에서, 오만하게 법과 상식을 짓밟는 ‘정권’, 국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고 고통에 신음하게 만드는 정치 세력은 새로운 기술 혁명의 시대를 준비하고 대처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못살아서 일가족 자살하는 일이 다반사인 한국의 현실은 현 정부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다. 더구나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정치가 반드시 기술 혁명의 시대를 준비하고 대처할 능력을 갖지 못한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두 가지는 별개의 사안으로서, 빈부의 차이, 사회적 불평등은 사회구조적인 것일 뿐, 기술 혁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국민들이 뻔히 보고 있는 앞에서, 오만하게 법과 상식을 짓밟은 것은 현 정부가 아니라 오히려 검찰총장 직에 있던 윤석열 자신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다시 현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두고 윤석열은 세계 일류 기술을 사장시켰다고 매도했다. 그러나 일류 기술이 있는 것과 위험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일류 기술이 있다고 해서 그 기술을 이용해서 돈을 벌어야 하니, 원전이 갖는 어마무시한 위험을 감내해야 한다는 논리는 성립하지 않는다. 일본 원전 누출사고 이후 독일 메르켈 수상도 독일 내 원전 건립 계획을 통째로 취소했다.

또 윤석열은 수많은 청년, 자영업자, 중소기업인, 저임금 근로자들의 고통, 정부 부채 급증으로 변변한 일자리도 찾지 못한 청년 세대들이 엄청난 미래 부채를 떠안았고, 청년들이 겨우 일자리를 구해도 폭등하는 집값을 바라보며 한숨만 쉬고, 청년들의 좌절은 대한민국을 인구절벽으로 몰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 말을 거꾸로 되짚어보면 논리의 비약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청년들의 좌절이 인구절벽을 가져오는데, 이것이 마치 현재 폭등하는 집값이나 정부 부채 급증으로 인한 미래 부채와 연관이 있는 것처럼 연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구절벽은 현 정부 들어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벌써 20여 년 전, 김영삼 정부 말기 IMF 체제로 들어서면서 기업의 재기를 위해 고육책으로 해고를 쉽게 할 수 있도록 하고 노동조건이 더 열악해지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집값 오르는 것도 현 정부에서만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었고, 또 민초들이 작당하여 스스로 올리는 집값을 정부탓으로만 돌릴 것이 아니다. 윤석열 자신이 말하는 ‘자유’ 시장의 논리에 입각하여 정부로서도 정책 수립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부동산 문제에서 윤석열의 정부 비판은 그 자신이 주장하는 ‘자유민주주의’와 이율배반의 모순을 갖는다. 한편으로 그는 현 정부가 우리 헌법의 근간인 자유민주주의에서 ‘자유’를 빼내려 한다고 비난한다. 같은 맥락에서 그는 ‘정부가 시장과 싸우려 한다’고도 한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는 부동산 값이 폭등한 것을 정부의 책임으로 돌리는 것이다. 만일 정부가 시장과 싸우기를 포기하고 시장 논리를 인정해야 하는 것이라면, 시장 논리에 따라 요동치는 부동산 투기에 대한 책임도 정부에게 덮어씌우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집값 폭등한다고 윤석열이 정부를 비난하는 것은 모순이다.

더구나 윤석열이 개진하는 자유론은 그 자체로서 앞뒤가 안 맞는 데가 있다. 한편으로 그는 “민주주의는 자유를 지키기 위한 것이고 자유는 정부의 권력 한계를 그어주는 것”이란다. 그래서 자유가 빠진 민주주의는 진짜 민주주의가 아니고 독재요 전제이다. 그러니 현 정권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런데 다른 한편으로 윤석열은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오해를 불식하고자 한다. 자유민주주의가 만민이 아니라 승자(기득권층)를 위한 것이고 그 밖의 사람은 도외시하는 것이라는 오해가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윤석열은 “인간은 본래 모두 평등한 존재이므로 누가 누구를 지배할 수 없고 모든 개인의 자유가 보장되어야 한다. 자유민주국가에서는 나의 자유만 소중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자유와 존엄한 삶 역시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 “존엄한 삶에 필요한 경제적 기초와 교육의 기회가 없다면 자유는 공허한 것, 승자(특권층) 독식은 절대로 자유민주주의가 아니고, 자유를 지키기 위한 연대와 책임이 중요하며, 이것은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국민의 권리에 기초하는 것”이라고 한다.

여기서 윤석열이 말하는 바, 한편에 “자유가 정부의 권력 한계를 그어주는 것”, 그리고 다른 편에 “존엄한 삶에 필요한 경제적 기초와 교육의 기회를 확보하고, 승자(특권층) 독식 대신 연대와 책임을 요구하는 국민의 권리”를 확보하는 것은 서로 평행선에 있는 것이 아니다. 양자는 흔히 반대 방향, 상호 갈등을 빚는 반비례 관계에 있는 것이므로, 덕담하듯이 유야무야 두리뭉실하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이어서 윤석열은 선언문에서 분노하는 이들을 없애려고 한단다. 국가를 위해 희생한 분들이 분노하지 않는 나라, 산업화에 일생을 바친 분들이 분노하지 않는 나라(산업현장에서 죽어나가는 것이 현 정부하에서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민주화에 헌신하고도 묵묵히 살아가는 분들이 분노하지 않는 나라, 세금을 내는 분들이 분노하지 않는 나라(세금을 누가 어느 정도로 공정하게 세금을 내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의 미래를 짊어질 청년들이 분노하지 않는 나라, 청년들이 마음껏 뛰는 역동적인 나라(노인들은 그냥 죽어 지내라는 말인지), 자유와 창의가 넘치는 혁신의 나라, 약자가 기죽지 않는 따뜻한 나라를 만들고, 국제 사회와 가치(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가치인지는 모르겠으나 최근 죽창가 운운하며 회자되는 한일 관계에 대한 반민족적 정서의 견해를 말하는 것인지)를 추구할 것이라고 한다,

다소간에 윤석열이 언급한 이 같은 분노는 현 정부에만 관련한 것이 아니라 한국 사회에 상습적이었다. 더구나 분노 없는 나라를 만드는 것은 윤석열이 자신이 말하는 바, 자유가 ‘정부 권력에 한계를 설정하고 있는’ 틀에서는 쉽지 않다.

실로 윤석열은 민초의 분노에 빗대어 사실은 표를 아우를 수 있는 민초의 부류를 최대한으로 동원한 듯하다. 또 그는 “위대한 국민 여러분”이라는 수식어로 민초의 환심을 사려했다. 그러나 잔머리 굴려 부동산 투기하고 부정부패 앞에서는 주눅이 들어 입도 뻥긋 못하고 죽어지내는 국민이 위대할 것까지는 없고, 스스로 반성해야 할 판이다. 다만 권력 잡으려고 혈안이 된 이의 눈에는 그 투표권 때문에 그 같이 하릴없는 국민 민초도 당분간 위대해 보일 수는 있겠다.

윤석열의 입장에서는, 일단 ‘위대한 국민’을 하나로 묶어서 환심을 사고 싶겠지만, 아무리 해도 아홉 가지 각기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을 현실적으로 다 흡족하게 할 수는 없는 판이라, 그 가운데서 선택적 정의가 실천될 전망에 있다. 검찰총장 윤석열이 한편에 자신의 가족과 나경원에게, 다른 편에 조국과 정경심을 대상으로 만인 앞에 이미 연출했던 그 차별적, 선택적 정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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