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 “홍범도 장군의 귀환은 어려운 시기,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위기극복에 함께하고 있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에게 큰 희망이 될 것”

8월 18일 마침내 홍범도 장군의 귀향이 이루어졌습니다. 문대인 대통령은 국립대전현충원에서 열린 홍범도 장군 유해 안장 식에서 “홍범도 장군의 귀환은 어려운 시기,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위기극복에 함께하고 있는 대한민국 모든 국민들에게 큰 희망이 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문 대통령은 이날 오전 추념사를 통해 “선조들의 고난을 뒤돌아보며 누구도 넘보지 못하는 강한 나라, 국제사회에서 존중받는 나라를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이어 문 대통령은 “그해 치러진 ‘독립전쟁 1회전’ ‘독립전쟁 첫 승리’라고 불렸던 봉오동 전투와 독립전쟁 최대의 승리, 청산리 대첩을 이끌었던 독립전쟁의 영웅,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이 오늘 마침내 고국산천에 몸을 누이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는 평범한 사람들이 함께 만든 ‘승리와 희망의 역사’라고 의미를 부여하면서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기 하나로 모여든 무명의 청년들과 간도 지역으로 이주한 수십만 동포들이 승리의 주역이었다.”고 평가했습니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은 ”모두가 함께 만든 승리는, 나라를 잃은 굴종과 설움을 씻고, 식민 지배에 억압받던 삼천만 민족에게 강렬한 자존심과 자주독립의 희망을 심어주었다.“고 말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장군의 불굴의 무장투쟁은 강한 국방력의 뿌리가 되었다”면서 “1800톤급 잠수함 ‘홍범도 함’은 긍지와 함께 필승의 신념으로 동해 앞바다를 지키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대하서사시 <홍범도>를 지은 이동순 시인이 고국으로 돌아온 장군의 마음을 표한한 시 한 구절입니다.

「나 홍범도, 고국 강토에 돌아왔네./ 저 멀리 바람 찬 중앙아시아 빈들에 잠든 지 78년 만일세./ 내 고국 땅에 두 무릎 꿇고 구부려 흙냄새 맡아보네./ 가만히 입술도 대어보네,/ 고향 흙에 뜨거운 눈물 뚝뚝 떨어지네.」

조국 광복을 위해 평생을 바친 홍범도 장군(1868~1943)이 마침내 순국하신지 78년 만에 고국의 품에 안겼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 독립군사에 ‘자유시 참변(慘變)’이란 대참사가 있었다는 것을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것도 일본군이 아닌 소련군의 앞잡이인 같은 민족 공산당에 의해서지요.

청산리 전투의 영웅들과 무려 4,000여명의 대한독립군단이 몰살당한 어마어마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 독립의 주력핵심이 사라지고 일제 강점기 내내 회복불능의 상태가 된 것입니다. 당시 우리 독립군 투쟁은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세계 독립운동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승리를 넘겼습니다.

외세의 지원 없이 자발적으로 만들어진 군대가 일본의 정예군과 맞붙어 두 번 씩이나 대첩(大捷)을 이룬 역사는 다른 식민지 국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빛나는 성과이었지요. 이미 구한말부터 의병을 이끌고 치열한 전투 경험을 쌓았던 홍범도 장군은 간도국민회 산하 대한독립군 700명을 지휘하여, 독립군의 근거지인 봉오동 까지 들어온 일본군을 궤멸시켜 버린 것입니다.

당시 러시아는 혁명 내전 중에 있었고, 일본군이 러시아 공산혁명의 반대군대인 백군(白軍)을 도와 시베리아까지 출병해 있었어요. 때문에 러시아 땅으로 넘어온 한국독립군은 부득이 레닌 정부군인 백군의 혁명투쟁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고 그들로부터 군량, 무기지원까지 받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정부군인 적군(赤軍)은 혁명이 어느 정도 진척돼 한인들의 도움이 필요 없다고 느끼게 되자. 이를 눈치 챈 일본군은 적군과 독립군을 이간시키기 시작한 것입니다. 1920년 일본은 북경에서 러시아와 캄차카 반도 연안의 어업권 문제를 둘러싼 양국 간 어업조약을 맺으면서 그 대가로 러시아 땅에서 한인 독립군의 활동을 중지시킬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러시아는 이를 수용했습니다. 그리하여 1921년 6월 28일 러시아 적군과 러시아주재 문창범과 오하묵이 이끄는 독립군이 마침내 제야강 자유시(현 스보보드니) 주둔 한국 독립군을 포위하고 무장해제령을 내렸지요. 대한독립군으로서는 소련군과의 협력관계나 그들의 혁명투쟁을 위해 흘린 피의 대가로 보더라도 무장해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조치였습니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은 마땅히 이를 거부했습니다. 그 결과 일어난 것이 바로 ‘자유시 참변’이라는 『대한독립군 집단 학살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정확한 전사자 숫자는 자료마다 기록이 달라 정확하지 않지만, 4,000명에 달하는 독립군은 그 뒤 자취를 감추어 버렸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이 4000명 모두가 몰상 당했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니다.

참으로 엄청난 사건이었지요. 이 자유시 참변 이후 한인들의 항일무장독립운동은 사실상 그 막을 내리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봉오동과 청산리 전투의 영웅 홍범도 장군도 역시 스탈린의 강제이주 정책에 따라 중앙아시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연행된 뒤 시골 극장의 수위로 쓸쓸한 여생을 마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떻습니까? 이번 영웅의 귀향을 계기로 간단하게 독립군 투쟁 중, ‘대한 독립군 집단학살 사건’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우리는 잊으면 안 됩니다. 그 독립군 영웅들이 계셨기에 오늘날 우리가 번영과 자유를 크게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 한 구석에 그런 영웅의 귀향을 폄훼(貶毁)하는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지요!

단기 4354년, 불기 2565년, 서기 2021년, 원기 106년 8월 20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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