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조부님이 그러셨어. 만선이 아니면 노 잡지 말라고...
우리 아부지도 만선 될 고기 떼는 파도가 집채 같아도 쌍돛달고 쫓아가라 하셨어"

"만선" |  /(사진=Aejin Kwoun)
"만선" | 무대디자이너 이태섭은 무대는 사실적인 묘사보다 작품이 담고 있는 상황에 더 주목하게 될 것이라 이야기한다. 바닷가 방파제 밑에 웅크리고 있는 곰치의 엉성한 양철집은 곧 밀려올 거대한 파도 앞에 간신히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그것은 다가오는 새로운 세상의 물결 앞에 과거의 인간적인 가치들이 무너지고 있는 은유라고 볼 수 있다. 바다로부터 몰려오는 비와 바람은 남아있는 곰치의 마지막 의지를 무너트리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사진=Aejin Kwoun)

[서울=뉴스프리존]권애진 기자= 1964년 국립극장 희곡공모 당선작이며 문학 교과서 속에 등장했던 희곡이 극의 배경인 어촌마을과 바닷가의 비바람을 실감 나게 구현한 무대에서 다시 살아났다. 2021년에 다시 보는 한국 리얼리즘의 연극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작품 “만선”은 2020년 코로나19로 인해 무대에 오르지 못한 국립극단 70주년 기념작으로 비로소 관객들과 만나며 세대를 초월한 처절한 삶을 그려내고 있다.

"만선" 공연사진 /(사진=이강물, 국립극단)
"만선" 공연사진 | 이번 윤색본에서 크게 달라진 점은 곰치의 배만 돌아오지 않아 무당을 불러 점을 치는 장면이 프롤로그로 배치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는 어촌의 무속적 세계관을 부각시키는 동시에 곰치네 일가에 드리운 운명의 아이러니를 암시하는 듯 보여주고 있다. - 김성희 연극평론가 - (사진=이강물, 국립극단)

평단의 호평 속에 1964년 국립극장 희곡 현상공모 당선작으로 같은 해 7월 초연되며 제1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현 백상예술상)에서 천승세 작가에게 신인상을 안겨주었던 작품 “만선”은 1960년대 산업화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서민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 깊은 공감을 샀고 이후 동명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195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점례와 소’로 입선하여 작가로 등단한 천승세 작가는 간결한 문체와 민중적 언어, 상징적이지만 유려한 이야기 구성을 통해 사회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강렬하게 드러내는 작가로 평가받는다.

"만선" 공연사진 /(사진=이강물, 국립극단)
"만선" 공연사진 | 이번 윤색본에서는 슬슬이를 남성의 횡포, 운명과 맞서 싸우는 적극적인 여성으로 성격화하여 현대성을 부여하였다. - 김성희 연극평론가 - (사진=이강물, 국립극단)

지난 3일부터 19일까지 국립극단 명동예술극장에서 관객들과 함께 호흡하고 있는 작품 “만선”의 초연은 현재 이번 작품이 공연 중인 명동예술극장에서 곰치 역 배우 김성옥, 그의 아내인 구포 댁 역에 배우 백성희가 열연했다. 백성희 배우는 이 작품으로 제1회 한국연극영화예술상(현 백상예술대상)에서 여자연기상을 받았다. 현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은 초대 단원이자 오랫동안 단장을 지내기도 했던 백성희 배우의 이름에서 따온 만큼 국립극단에 있어서 여러모로 의미가 깊은 작품이기도 하다.

"만선" 공연사진 /(사진=이강물, 국립극단)
"만선" 공연사진 | 마을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징소리와 함께 의기양양 등장하는 그들은 만선의 기쁨에 들떠 있지만, 다가올 비극을 알고 있는 관객들에게는 오히려 더 슬프게 느껴지기도 하였다. (사진=이강물, 국립극단)

제31회 이해랑연극상 수상자이기도 한 이태섭 무대디자이너는 육성으로 감탄이 터지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현실감 가득한 무대를 구현하였으며, “만선”의 키를 잡은 심재찬 연출이 “신구 세대가 함께 호흡하게 되어 더욱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라며 “제목 그대로 객석이 만선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던 기대만큼 이번 작품은 전석매진을 기록하며 미처 티켓을 구하지 못한 관객들을 위해 추후 3층 다락석을 추가 오픈할 계획이다.

"만선" 공연사진 /(사진=이강물, 국립극단)
"만선" 공연사진 | 동생을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곰치(복쟁이 새끼 잡어 묵음시로 곰곰하는 눈 툭 불거진 고기의 이름을 땀)의 고집에도 묵묵히 뱃일을 하는 도삼과 연철의 사고는 너무나 안타깝고 슬프기에, 구포댁의 소망처럼 제발 그들이 살아돌아오기만을 함께 바라게 된다...불가능한 일임을 알고 있음에도... (사진=이강물, 국립극단)

2021년 국립극단의 “만선”은 동시대적 감수성을 지니고 자신만의 생생한 언어로 사회의 어두운 이면뿐 아니라 삶의 고단함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보통의 인간군상을 그려내는 사실주의 작가 윤미현의 윤색과 늘 새로운 변화를 꾀하며 장르를 가리지 않고 폭넓은 활동을 펼쳐온 연출 심재찬의 깊이 있는 해석으로 인간 본위의 모습을 그려내며 더욱 단단한 무대로 돌아왔다. 실감 나는 무대뿐 아니라 시대상을 반영하여 감각적으로 의복을 구현한 최원 디자이너, 곰치의 고집스러운 성격을 비롯해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나타내도록 한 이동민 디자이너의 분장은 교과서 속 작품이 무대 위에 살아 움직이는 듯 관객을 ‘만선’ 속 끝이 보이지 않는 집념 속으로 안내하고 있다.

"만선" 공연사진 /(사진=이강물, 국립극단)
"만선" 공연사진 | 딸 뻘이 훨씬 넘는 듯한 슬슬이에 집착을 보이며, 이 가족의 속내 따위 아랑곳 없는 뻔뻔하기 그지 없는 범쇠를 능청스레 연기한 김재건 배우의 등장은 그를 아는 이들에게 놀라운 웃음을 안겨주기도 하였다. (사진=이강물, 국립극단)

물고기가 가득 찬 배, 만선에 대한 곰치의 집념은 그의 일가를 파멸로 치닫게 만든다. 가난한 남해 어민들의 삶은 인물 사이 사실적이고 극적이며 거칠디거친 다양한 대립을 섬세하고 굵직한 연기로 무대 위에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관객들은 자연과 인간사회에 무모하게 도전하는 곰치에게 반감과 동시에 깊은 공감을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핏줄을 모두 잃어버린 구포 댁의 가슴 절절한 모성애와 참담한 비극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만선만을 꿈꾸는 곰치의 인간상은 인간미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선주의 횡포와 범쇠의 꼬드김과 함께 비극적 좌절을 더욱 처절하게 드러내며 그들의 삶 속으로 관객들을 끌어안는다.

"만선" 공연사진 /(사진=이강물, 국립극단)
"만선" 공연사진 | 천둥 번개와 함께 몰아치는 폭풍우는 그들의 갈등과 처절한 아픔을 더욱 고조시켜 주었다. (사진=이강물, 국립극단)

억센 사투리로 짙은 향토성을 드러낼 뿐 아니라 무대 뒤편 외에는 양옆과 관객석으로 삼 면이 트인 특성상 대사전달이 쉽지 않음에도, 관객석이 완전히 암전되기 전부터 등장하며 무대로 집중하기 힘듦에도 “만선”의 배우들은 기울어진 무대 위에서 최고조의 비극을 첨예하게 그려낸다. 평생을 배 타는 일밖에 몰랐던, 그로 인해 모든 것을 잃었음에도 집념을 놓을 수 없는 끈질긴 곰치와 숙명에서 벗어나고픈 그의 아내 구포 댁 역에는 무대와 매체를 오가며 활약하고 있는 배우 김명수와 정경순이 만나 극 전반을 탱탱하게 이끌고 있다. 오랜 동료이자 지기인 배우 김재건, 정상철을 비롯하여 과거 국립극단 단원으로 활동했던 원로배우들과 배우 이상홍, 김명기, 송석근, 김예림 등 국립극단 시즌 단원들이 함께하며 어민들의 비극적인 삶의 모습 속에 작은 웃음을 안겨주기도 하며 저력을 보여준다.

"만선" 커튼콜 /(사진=Aejin Kwoun)
"만선" 커튼콜_순경/마을어부(김명기), 마을어부(정나진), 도삼(이상홍), 성삼(김종칠), 곰치(김명수), 구포댁(정경순), 범쇠(김재건), 선주 임제순(정상철), 슬슬이(김예림), 연철(송석근), 무당/동네아낙(조주경), 동네아낙(김경숙) | 의상디자이너 최원은 실제 조사자료보다 계층이나 빈부격차를 더욱 강조하여, 도망칠 수 없이 죄어오는 가난의 사슬을 은유적인 무대에 어우러지게 표현하였다. 젋은 세대인 슬슬, 연철, 도삼에게는 생기있는 채도를 주어 그들의 사랑과 생명이 사라진 이후에는 무대전체의 색도 호흡도 바래져버리는 비극이 도드라지게 설정하였다. (사진=Aejin Kwoun)

고리대와 가난에 시달려온 그들의 삶이 우리의 아픔을 묵직하게 깨우는 것은 아직 우리 사회의 불평등한 구조가 그들과 별달라질 바 없기 때문일는지 모른다. 운명적인 가난을 벗어나고자 꿈꾸며 발버둥을 치지만 계속해서 좌절하는 그들의 모습은 평생 끈덕지게 일해서 벌어도 작은 집 하나 구할 수 없는 우리네와 처지가 다르다 할 수 있을까? 가족들을 모두 희생하고서도 버릴 수 없는 집착은 국가 경제를 위해서라면 소의 희생은 당연하다 여기는 물질만능 사회 속 우리의 모습이기에 초연 후 58년 만에 찾아온 “만선”이 가슴 속 더 깊이 다가올 수밖에 없을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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