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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칼럼] 산 너머 저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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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칼럼] 산 너머 저쪽
  • 김덕권
  • 승인 2021.09.16 00: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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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너머 저쪽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원불교의 일원상 서원 문을 보면, 「능이성 유상(能以成 有常)하고, 능이성 무상(無常)하여, 유상으로 보면 상주불멸(常住不滅)로 여여자연(如如自然)하여 무량세계(無量世界)를 전개하였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이제 저 산 너머로 넘어 갈 날이 머지않은 저로서는 평소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자주 하고 있습니다. 우주의 진리가 본래 무량세계로 펼쳐져 있으니 저 세계도 아마 이 세계와 별반 다르지 않지 않을까 생각을 해봅니다. 그렇다면 제가 이생에 사는 모습이 저 생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습니다. 이 세상 최후의 일념이 내생 최초의 일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 세상의 마지막도 성스러운 삶으로 일관 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런데 요즘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무조건적인 저항으로 금전만능의 현대 의술에 의존하여, 단지 몇 시간만이라도 생명을 연장하려고 발버둥을 칩니다.

만물은 변하고 그리고 죽습니다. 변하고 죽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요, 진리입니다. 우리가 반드시 죽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때, 나를 사로잡고 내가 집착하는 이 세상 모든 행위들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송(宋)나라의 주신중(朱新中 : 1097~1167)은 훌륭한 죽음으로 ‘오멸(五滅)’의 실천을 내세웠습니다.

첫째, 멸재(滅財)입니다.

재물과 헤어지는 일입니다. 살아서 마련한 재산에 미련을 두고서는 편하게 눈을 감을 수가 없습니다. 재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는 일이 멸재(滅財)입니다.

둘째, 멸원(滅怨)입니다.

남과 맺은 원한을 없애는 일입니다. 살아서 겪었던 남과의 불미스러운 관계를 씻어내야 마음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습니다. 남과의 다툼이 있었다면 그 다툼에서 비롯된 원한을 씻어내는 일이 멸원(滅怨)입니다.

셋째, 멸채(滅債)입니다.

남에게 진 빚을 갚는 일입니다. 빚이란 꼭 돈을 꾸어 쓴 것뿐 아니라 정신적으로 큰 도움을 받았다면 그것도 빚입니다. 살아있을 때 남에게 받았던 도움을 깔끔하게 갚는 일이 멸채(滅債)입니다.

넷째, 멸정(滅情)입니다.

정든 사람, 정든 물건과의 작별하는 일입니다. 아무리 정 들어도 함께 갈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애지중지하는 물건이라도 가지고 갈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정든 사람, 정든 물건과 작별하는 일이 멸정(滅情)입니다.

다섯째, 멸망(滅亡)입니다.

죽는 것이 끝이 아니라 죽음 너머에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신념이 멸망(滅亡)입니다. 그야말로 아름다운 죽음을 맞이하는 계획이지요. 즉 마지막으로 사람은 죽음 이후에 대하여 분명하고 바른 계획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생의 도를 알지 못하면 능히 생의 가치를 발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죽을 때에 사의 도를 알지 못하면 악도를 면하기 어렵지요. 세상에서는 살아 있는 세상을 이승이라 하고 죽어 가는 세상을 저승이라 합니다. 그래서 이승과 저승을 다른 세계 같이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그 몸과 위치를 바꿀 따름이요 다른 세상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서 소태산(少太山)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평생에 비록 많은 전곡을 벌어 놓았다 하더라도 죽을 때에는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나니, 하나도 가져가지 못하는 것을 어찌 영원한 내 것이라 하리요. 영원히 나의 소유를 만들기로 하면, 생전에 어느 방면으로든지 남을 위하여 노력과 보시를 많이 하되

상(相)에 주함이 없는 보시로써 무루(無漏)의 복덕을 쌓아야 할 것이요, 참으로 영원한 나의 소유는 정법(正法)에 대한 서원과 그것을 수행한 마음의 힘이니, 서원과 마음공부에 끊임없는 공을 쌓아야 한없는 세상에 혜복(慧福)의 주인공이 되느니라.」 하셨습니다.

어떻습니까? 이제 우리는 산 너머 저쪽으로 넘어가기 전에 충분히 준비를 끝내셨는가요? 생사문제야말로 무엇보다 앞선 궁극적인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몸을 담고 살아가는 동안 기필코 해결해야할 가장 중요하고 중심적인 문제입니다. 어리석은 중생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천년만년 살려고 합니다.

하지만 불보살은 굳이 오래 살려하지 않습니다. 생사의 이치를 알기 때문에 죽는 것을 헌옷 벗는 것쯤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굳이 때 묻은 옷을 오래 입으려고 하지 않지요. 저는 이미 <의료거부의정서>를 작성해 놓고 당국에 신청한지 오랩니다. 병원에도 정기진료 이외에는 일체의 건강진단도 하지 않습니다.

해탈한 사람은 산 너머 저쪽으로 넘어가기로 들면, 향하나 피워 놓고 그 향이 다 타기 전에 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불보살들은 죽음을 죽으나 사나 똑같은 자리, 이 몸을 벗으나 안 벗으나 똑같은 자리. 우주 생기기 전의 시공이 끊어진 자리, 생사가 붙지 않는 자리로 알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아무리 생사가 일여(生死一如)라 한들, 이생이 확연하기 때문에 우리는 산 너머 저쪽으로 떠나기 전에 이생을 깔끔하게 정리하고 거연(巨然)히 열반의 길로 떠나야 하지 않을 까요!

단기 4354년, 불기 2565년, 서기 2021년, 원기 106년 9월 16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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