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유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지난 6일 국무회의에서 통과된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건설을 위한 특별법 시행령’(이하 시행령안)이 박근혜 대통령의 재가를 거쳐 11일 공포됐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지 391일만이다.

[서울= 연합통신넷, 고성기, 심종완기자]  시행령 공포로 특조위는 상임위원 5명과 민간인 49명, 파견공무원 36명 등 총 90명으로 출범할 수 있다. 6개월 뒤에는 개정 없이 120명으로 확대가 가능하다.

사태의 책임을 져야 할 박근혜 정부는 오히려 세월호 참사의 철저한 진상 규명을 방해하는 수준의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을 강행 통과시켰다. 급기야 지난 어버이날에는 자식을 잃은 유가족이 끝내 자살을 선택하기도 했다. 참사 1년이 지났건만 여전히 대한민국은 침몰 중이다.

세월호 1년을 지나오면서 나는 두 가지 궁금증이 생겼다. 첫째, '시체 장사' '세금 도둑' 같은 폭언에 일베 소동까지 2차, 3차로 가해지는 사회적 폭력 속에서도 유가족이 흔들림 없이 싸움을 계속해 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둘째, 통치권자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기도 한 박근혜 대통령은 유가족에게 어찌 이렇게 가혹하리만치 냉정한 모습으로 일관할 수 있단 말인가.

트라우마, 죽음에 대한 생생한 리얼리티

 

평행선처럼 접점이 없을 것 같은 이 두 질문을 하나로 연결하는 키워드가 있었다. 나는 정신의학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와 진은영 시인의 대담집 <천사들은 우리 옆집에 산다>를 읽고 그 실마리를 찾았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트라우마, 즉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다.

최악의 조건 속에서도 서로를 보듬으며 트라우마를 치유해나가는 유가족과, 미처 치유하지 못한 트라우마를 안고 인간성을 잃어버린 정치를 펼치고 있는 박근혜 대통령. 이 둘의 극단적인 대비를 통해 트라우마의 치유가 개인은 물론 사회의 건강과 평화를 위해서도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알 수 있다. 또한 트라우마에 대한 무지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이 책에서 얻은 큰 소득이었다.

트라우마는 '뚫다'라는 뜻의 그리스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전쟁터에서 방패를 뚫을 만큼 강력한 외부 자극이 만들어 낸 마음의 상처라는 뜻이다. 그렇듯 트라우마는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할 만큼 슬프고 고통스러운 것이다. (59쪽)

우리는 일상에서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별다른 구별 없이 혼용해 쓰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둘은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정혜신 박사는 "스트레스는 아픈 만큼 성숙해지는 것이지만, 트라우마는 아픈 만큼 파괴되는 것"이라며 "트라우마의 핵심을 이해해야 합니다. 트라우마의 핵심은 죽음 각인이에요. 고부간의 갈등 같은 스트레스와는 달리 성폭행이나 쓰나미, 전쟁 같은 트라우마는 거의 죽음까지 갔다가 살아 돌아온 경험이기 때문에, 죽음이 생애 어느 순간보다 생생한 리얼리티로 각인되는 거예요"(64쪽)라고 설명한다.

또 스트레스는 부분적인 문제이지만 트라우마는 삶이 전면적으로 파괴된다. 공황 장애와 같은 스트레스를 겪으면서도 직장 생활은 가능한 데 반해, 트라우마는 삶 전체가 붕괴되고 모든 사회적 관계가 단절되는 재앙과도 같은 것이다.

이웃과 함께 하는 트라우마 치유의 '좋은 예'

지난 4월 CBS와 안산정신건강트라우마센터가 발행한 '세월호 유족 최초 실태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유가족 152명에 대한 설문 결과 55.3%가 '죽고 싶은 생각'을 한다고 답했다. 세월호 유가족의 자살 충동률은 55%로 일반인보다 10배나 높았다. 비슷한 예로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국가 중에서 1위인데 '광주 5.18 피해자들의 자살률은 우리나라 평균 자살률의 거의 500배가 된다'고(76쪽) 한다.

세월호 유가족의 시간은 2014년 4월 16일에 멈췄다. 삶의 정지 상태다. 진은영 시인은 "트라우마를 겪는 사람은 고통의 러닝머신을 계속 뛰는 셈이네요. 멈출 수도 없고 내려올 수 없고요. 어떻게든 그 자리에서 멀어져 보려고 하는데 아무리 달려도 제자리니까"(66쪽)라고 비유한다.

안산에 마련된 치유 공간 '이웃'에서는 유가족이 모여 자원 봉사자나 지역 주민과 함께 집밥을 해 먹고 뜨개질을 하며 파괴된 일상을 보듬고 있다. 삶을 위한 최소한의 기본적인 것, 인간의 생존과 안정감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지만 심각하게 훼손돼 있는 것을 다시 구현함으로써 건강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치유는 아주 소박한 것입니다. 사람 마음을 어떤 순간에 살짝 만지는 것, 별것 아닌데 사람이 휘청하는 것, 그냥 울컥하는 것, 기우뚱하는 어떤 순간. 그것이 바로 치유의 순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모두 치유자가 될 수 있어요.

더구나 지금과 같은 때는 더 그렇죠. '상처입은 치유자'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상처를 입은 사람이 그 상처를 치유받아본 경험을 통해서 최고의 치유자가 된다는 거예요. (중략) 4월 16일 이후 안산에 계신 분들은 가장 탁월한 치유자가 될 수 있는 운명에 던져지셨다고 할 수 있어요. 저는 이 지역 공동체가 시민들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고 삶에서 가장 고통의 순간에 처한 이웃에게 가장 좋은 치유자들이 되어주는 이웃공동체가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250~251쪽)

정혜신 박사의 설명을 듣다 보니 안산에 '이웃'이라는 치유 공간이 있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세월호 희생자가 304명, 각 희생자별로 유가족을 세 명씩만 헤아려도 무려 1천 명을 육박하는 숫자가 나온다. 여전히 많은 사람은 치유를 받지 못하거나, 혹은 치유 받는 것마저 죄스러워 거부하는 죄책감으로 하루를 보내고 있다. 상처입은 이들이 모두 치유를 받을 수 있도록 국가적 지원과 사회적 배려가 절실하다. 대재난을 탐사하고 연구한 리베카 쏠닛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책에 인용돼 있다.

"재난은 그 자체로는 끔찍하지만 때로는 천국으로 들어가는 뒷문이 될 수 있다. 적어도 우리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우리가 소망하는 일을 하고, 우리가 형제자매를 보살피는 사람이 되는 천국의 문 말이다." (169쪽)

치유되지 못한 트라우마는 번져나간다

트라우마 치유가 중요한 이유는 치유되지 않으면 번져나가기 때문이다. 트라우마 증상을 치유하지 못하면 우울증, 대인 기피증이 만성화되고, 정서적으로나 신체적으로 주변 사람들을 학대하기도 한다. 세상을 혐오하고 인간을 불신하는 정도가 심해져 폭력적 성향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따라서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않으면 주변 사람이 도미노처럼 트라우마를 겪는 구조가 만들어진다.

정혜신 박사는 박근혜 대통령이 끝내 노란리본을 달지 않고 유가족을 차갑게 대한 것도 '의도적인 행동'이라고 분석한다. 그의 설명을 들어보자.

"어린 나이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하루 아침에 잃은 거잖아요. 박근혜 대통령이 아버지를 잃은 뒤로 18년 동안 칩거하면서 쓴 일기들이 있는데, 그걸 보면 자기 아버지를 거의 신처럼 대하던 사람들이 하루 아침에 등 돌리는 거 보고 느낀 배신감에 대한 이야기가 반복적으로 나와요.

그러니까 자신은 하루 아침에 세상에 내팽개쳐져서 온갖 고통을 겪으면서 혼자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이 고통에 공감할 리 없죠. 세월호 유가족들이 엉엉 울어도 가소롭게만 보이는 거예요." (77쪽)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은 트라우마가 치유되지 안았을 때 나타나는 전형적인 후유증이다. 정 박사는 이렇게 강조하기도 했다.

"트라우마를 치유받지 못한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 많아진다는 것은 굉장히 끔찍한 일이에요. 말하자면 냉혈한을 양성하는 거죠. 결국 그 때문에 발생하는 여러 가지 사회적 비용을 우리가 다 치러야 하는 거예요. 상처 입은 개인을 혼자 내버려두면 상처가 계속해서 번져나가니까요. 그러니까 트라우마를 치유하는데 우리 사회 전체가 나서야 한다고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78쪽)

진실 규명이야말로 트라우마 치유의 첫 걸음

정신과에는 수백 가지 질환이 있지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인 트라우마는 유일하게 '외인성 질환'이다. 내적 요인이 아니라 외부 사건이 근본 워인인 병이기 때문에 치유를 위해서는 외부적 요인에 대한 정리가 필요하다.

'진상규명'이 트라우마 치료의 가장 중요하고도 첫 번째 관문인 이유다. 거대한 분노와 억울함의 진원지에 대한 명확한 규명 없이 개인의 내면이 치유된다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때문에 정 박사는 '치유를 한답시고 모든 문제를 개인적인 차원으로 환원하는 것 아니냐'는 비판에 대해 '그렇지 않다'고 딱 잘라 이야기한다. 그러한 오해를 막기 위해 많은 논쟁을 했다고도 한다.

특히 싸워야 할 적이 너무 거대해 감히 접근하기조차 힘들 때는 분노를 주변 사람에게 표출하는 심리 게임이 발생하기도 한다. 서로 보듬어야 할 피해자들이 서로에게 작은 일로 서운해하고 힘들어하는 경우가 종종 벌어진다. 이런 마음의 문제를 잘 정리해나가지 않으면 집단 전체가 동력을 잃을 수도 있다. 따라서 치유와 싸움은 둘이 아니다. 잘 싸우려면 치유가 되어야 하고, 치유가 되면 무조건 잘 싸울 수밖에 없다는 것이 정 박사의 설명이다.

치유라는 말이 진실의 무덤이 되는 방식으로 쓰여서는 안 되겠지요. 무덤이라면 아마 고통의 무덤이 되어야 할 것 같아요. 고통을 제대로 묻어주지 않으면 부패해서 마음을 통 못쓰게 만드니까요. 저는 이웃 치유자들이 결국 그 무거운 고통을 고이 업어다 잘 묻어주고 정성껏 봉분도 만들어주고, 이것이 누구의 고통인지 묘비명도 절절하게 고민해주는 일을 함께 하는 사람들인 것 같습니다. 진실규명이 중요한 것도 결국 그런 마음의 장지로 가는 길을 세상에 내는 일이기 때문이겠지요. (200쪽)

세월호 참사 1년, 상처는 여전히 치유되지 못하고 있다. 진상 규명의 첫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사회적 치유'의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다. 진상규명이 되어야 개인적, 심리적 치유도 비로소 가능해진다. 하루 하루를 지옥에서 살고 있는 유가족과 국가의 침몰을 지켜보며 죄책감과 무기력증에 빠졌던 국민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위해서라도 진상 규명은 '최소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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