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진: 1987년 6월 27일 당시 노무현 변호사(가운데)와 문재인 변호사(왼쪽에서 세 번째)가 시위 도중 고가도로에서 떨어져 숨진 이태춘 열사의 노제를 이끌고 있다. /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지난해 6월 10일, 서울 시청앞 광장에서 ‘6월항쟁 3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고 이태춘씨의 어머니 박영옥씨(87)는 처음으로 서울에서 열리는 기념식에 참석해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참석자들과 인사를 나누던 문재인 대통령이 박씨 앞에 멈춰 손을 잡았다. 박씨가 먼저 입을 뗐다.

“내 태춘이 엄마라요.”

“압니다.”

“우리집에 온 것도 압니까.”

“예. 아이고, 내가 영정도 노무현 대통령하고 나하고 서로 들었다 놨다 했는데요.”

이들의 인연은 31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동아대 졸업생인 이씨는 1987년 6월 18일 부산에서 시위를 하던 중 고가도로에서 떨어져 숨졌다. 1987년 6월, 부산의 인권변호사였던 문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과 함께 이씨의 장례를 치렀다. 이들은 부산에서의 6월항쟁을 이끌었던 부산 국본(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 집행부였다. 문 대통령은 자서전인 <운명>에서 “나는 6월항쟁의 역사를 정리하는 데 있어 부산의 역할이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서울지역 중심으로 서술되는 것이 안타깝다. 서울 중심 사고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며 “87년 초부터 달아오르기 시작한 민주화 열기는 특히 부산에서 더 뜨거웠다”고 썼다.

문 대통령의 회고처럼 1987년 부산은 뜨거웠다. 6월 10일, 부산 중구 대청동에서 ‘박종철 고문살인 은폐 규탄 및 호헌 철폐 부산시민대회’가 열렸다. 경찰은 집회 초반부터 최루가스를 살포했고 최루탄 발사 시 지켜야 할 최소한의 안전수칙도 지키지 않았다. 말 그대로 마구잡이 진압이었다. 이로 인해 시위와 관계없는 사람들이 다치기도 했다. 가령 최초 부상자인 김현숙씨는 어머니 대신 자갈치시장에 수금하러 나왔다가 얼굴, 손, 팔, 가슴에 최루탄 파편 70여개가 박히는 부상을 당했다. 광복로 로얄호텔 앞에서는 5세가량 되는 여자아이가 얼굴에 사과탄 파편을 맞았다.

과잉진압은 구경하던 시민들에게 겁은커녕 분노를 안겼다. 이후 매일 시위가 이어졌다. 12일 저녁, 서대신동 구덕운동장에서는 한국과 미국의 대통령배 축구경기가 한창이었다. 같은 시각, 대학생들은 구덕운동장 앞 광장에서 집회를 열었다. 축구경기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시민들과 합세하기 위해서였다. 400여명의 학생들이 구덕운동장 앞에서 “독재타도, 호헌철폐”를 외치자 경찰은 최루탄과 최루가스를 쏘았다. 경찰이 쏜 최루가스는 시위대뿐 아니라 축구경기장에도 날아들었다. 최루가스가 날아들자 관중의 절반이 운동장을 빠져나갔고 일부는 “요금을 환불하라”고 항의했다. 경기는 30분 동안 중단됐다가 다시 시작됐다.

▲부산시위의 절정을 이룬 1987년 6월 18일 부산 서면에서 시민들이 경찰과 대치하며 ‘독재타도’를 외치고 있다. 이날 시위 참가자는 30만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제공

 문재인 대통령이 책에 쓴 당시의 기억

이튿날에는 야구장에서 해프닝이 일었다. 이날 대학생들은 사직동 쪽으로 가두시위를 벌였는데 사직야구장에서는 해태와 롯데의 경기가 열리고 있었다. 경기를 마칠 무렵, 응원구호는 ‘파이팅’ 대신에 ‘독재타도’로 변했고 시민들은 ‘우리의 소원’ ‘애국가’ 등을 불렀다. 결국 이들은 경찰에 의해 강제해산됐다.

이런 상황에서 15일, 서울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명동성당 농성은 6월항쟁의 ‘상징’이었다. 당시 명동성당 농성대는 △15일 해산이 천주교 측의 확고한 입장 같다는 점과 △국본이 18일에 최루탄 추방대회를 준비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해산을 결정했다.

하지만 부산은 달랐다.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한 이튿날, 부산지역 대학에서 교내 출정식이 열렸고 1만명이 넘는 인원이 남포동을 뒤덮었다. 이들이 당시 시청 옆 MBC 방송국으로 향하자 경찰은 시청 앞을 최후의 저지선으로 삼아 차단했다. 그 중에는 백골단(사복경찰 체포조)도 있었다. “뛰어” 하는 소리와 함께 백골단이 달려 나갔고 전경들은 마구 최루탄을 쏘았다. 시민들은 근처 가톨릭센터 쪽으로 피신했다. 그리고 근처 공사장에서 철근과 벽돌, 시멘트 포대 등을 가져와 ‘바리케이드’를 만들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송도성당 주임신부였던 박승원 신부는 가톨릭센터로부터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박 신부는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주교님이 저한테 큰일났다고 전화가 왔다. 센터에 가보니 학생들이 경찰에 에워싸여서 오갈 데가 없었다”며 “마이크를 들고 학생 대표에게 나오라고 한 다음, 종교는 여러분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니 돌과 화염병을 여기에 두고 가면 보호해주겠다고 했다”고 말했다. 이렇게 가톨릭센터는 부산의 ‘명동성당’과 같은 역할을 맡게 됐다.

가톨릭센터의 농성 소식이 알려지자 부산은 고무되기 시작했다. 가톨릭센터 농성 이틀 뒤인 18일에 열린 ‘최루탄 추방의 날’이 대표적이다. 국본은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의 죽음에 항의해 18일을 최루탄 추방의 날로 정했다. 이날 부산시내는 대학생과 시민들로 가득찼다. 그 인원이 30만명에 이르렀다. 노 전 대통령은 자서전인 <운명이다>에 이날에 대해 “그날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나도 거기에 있었다. 부산 시위는 규모와 격렬함에서 서울을 능가했다. 최루탄이 다 떨어져 경찰은 더는 시위를 진압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며 ”노래를 부르면서 걸어가는 청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함께 걸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고 썼다.

서울 명동성당 역할을 한 가톨릭센터

늦도록 시위가 끝나지 않자 경찰은 마구잡이로 최루탄을 쏘기 시작했다. 당시 시위대는 범일고가도로로 이어지는 좌천동 고가도로를 통과하려던 참이었다. 경찰은 엄청난 양의 최루탄을 난사했다. 시민들은 어떻게든 숨을 쉬기 위해 난간 밖으로 몸을 내밀었다. 어떤 이들은 난간을 뛰어넘어 교각 윗부분의 좁은 공간에 웅크리고 앉아 숨을 몰아쉬었다. 그때 고가도로에서 한 사람이 떨어졌다. 이태춘씨였다. 밤색 바지와 상의는 최루가스로 범벅이 돼 있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김일석 시인은 “전경들이 최루탄 발사기를 들고 앞에 좌악 서 있고 그 뒤에 전경 병력이 몇 줄에 걸쳐 서 있고, 또 그 뒤에 최루탄 자동연발 발사기가 있었다. 경찰은 관공서와 언론사가 모여 있는 수정동으로의 진입을 막기 위해 필사적이었다”며 “시위대는 얼굴에 랩을 말고 마스크를 끼는 등 노력을 했지만 워낙 많의 양의 최루탄을 쏘아대서 호흡을 할 수가 없었다. 숨을 쉬기 위해 뒤로 달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이후 전국적으로 시위는 수그러들기 시작했다. 6월 24일 대통령과 야당 총재의 이른바 ‘여야 영수회담’이 열리기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시민들은 시위에 참가하기보다는 일단 기대를 가지고 관망했다. 가톨릭센터에서의 농성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22일 해산을 결정했다. 하지만 24일 영수회담은 아무 성과 없이 결렬됐다. 그리고 18일 밤, 고가도로에서 떨어졌던 이씨가 결국 숨을 거뒀다. 28살의 나이였다. 영수회담의 결렬과 이씨의 사망 소식에 다시 부산이 들썩였다. 부산 국본 지도부는 26일로 예정된 평화대행진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했다.

6월 26일 부산에서는 종교인들이 평화대행진 투쟁의 서막을 열었다. 천주교 신부들과 신도 2500여명은 중앙성당에서 ‘민주화와 인권회복을 위한 특별미사’를 연 다음 행진을 시작했다. 서면에서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등이 시국기도회를 마치고 대형십자가를 앞세우고 행진을 시작했다. 운수노동자들도 적극 가세했다. 시내버스, 택시, 트레일러까지 시위대의 ‘바리케이드’ 역할을 한 것이다. 문현동에서는 시내버스 7대가 시위에 동원됐다. 시위대는 시내버스를 앞세우고 문현로터리까지 시위행진을 벌였다.

이런 흐름 속에서 27일 이씨의 장례식이 열렸다. 국본 부산본부장으로 치러진 장례행렬의 제일 앞 줄에는 노 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이 섰다. 당시 상임집행위원장이던 노 전 대통령이 이씨의 영정을 들었다. 보도통제로 이날 장례식은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노 전 대통령이 이씨의 영정을 든 사진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있다.

결국 6월 29일 군부독재는 항복을 선언했다. 노태우 민정당 대표가 민주화와 직선제 개헌 요구를 수용하는 6·29 선언을 한 것이다. 여기에는 부산지역의 꾸준한 ‘투쟁’도 한몫 했다. 하지만 부산 투쟁은 잘 알려지지 않았다. 문 대통령의 말처럼 “서울 중심으로 역사가 쓰였기 때문”이다. 고호석 정치개혁부산행동 상임대표는 “가톨릭회관과 그 이후 부산 시위가 없었으면 (6월항쟁이) 사그러졌을 가능성도 상당히 많았다. 당시 시위가 크게 전개됐던 도시에서도 17~18일에는 시위의 열기가 떨어졌다는 이야기가 있었다”며 “그런데 부산에서는 30만명이 모여 다시 전국적으로 불을 붙였다”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2017년 6월10일 오전 서울광장에서 열린 제30주년 6.10 민주항쟁 기념식을 마친 뒤 이태춘 열사의 모친 박영옥씨의 손을 잡고 위로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부산 30만 인파가 전국 열기 확산시켜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도 <6월항쟁과 국본>이라는 백서를 통해 부산에서의 일련의 흐름에 대해 “6월 16일의 부산 시위가 가톨릭센터 농성으로 이어져 ‘부산판 명동사건’이라 불리면서 전두환 정권의 폭력성과 그에 맞서는 부산 시민들의 저항정신과 용기를 온 국민들에게 보여준 점 등은 군사독재정권의 종말이 머지않았다는 희망을 안겨주었다”고 높이 평가했다.

부산의 열기가 이토록 달아오른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조직된 투쟁본부다. 이를 두고 이명곤 노무현재단 부산지역위원회 운영위원장은 “지도부가 세팅이 잘 되어 있었다. 모양만 갖춰진 지도부가 아니라 80년대 내내 투쟁을 이끌었던, 실제로 항쟁을 주도할 수 있는 실질적인 지도부”라고 평가했다. 대표적인 인물이 노 전 대통령이다. 그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은 것을 두고 문 대통령은 2002년 6월 월간 <말>과의 인터뷰에서 “나도 집행위원이었지만 가두연설을 한다든지, 경찰과 직접 몸을 맞대고 투쟁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노변’은 흔쾌히 거리를 돌고 행동하고 투쟁했다”고 말했다.

1979년 부마항쟁의 경험 역시 영향을 미쳤다. 소설가 김하기씨는 <6월항쟁>에서 “부산과 광주의 집회 열기가 서울을 압도한 것은 김영삼과 김대중, 양 김의 지역연고 때문이라는 답이 나오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며 “부산과 광주는 그리 멀지 않은 기간 전에 군사독재 정권과 전면전을 벌인 경험이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박 신부 역시 “당시 부산지역에서 광주항쟁 사진전이 개최되고 있었고 이를 보려는 시민들의 줄이 1㎞를 넘어가기도 했다”며 “이런 경험이 당시 부산 항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했다. 1987년의 부산은 서울보다 뜨거웠다.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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