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열사여! 김상진 열사여! 장준하 열사여! (...) 박종철 열사여! 우종원 열사여! 김용권 열사여! 이한열 열사여!"

[뉴스프리존=뉴스이슈팀] 1987년 7월 9일, 연세대학교에서 치른 이한열 열사 장례식. 연단 위에 선 문익환 목사는 '조사' 대신 26명의 열사 이름을 부르며 절규한다. 이름을 외쳤을 뿐이지만, "어떤 연설보다 듣는 이의 폐부를 찔렀다"(KBS 인물현대사 문익환 편)는 평가를 받는 명연설이기도 하다. 지난해 문재인 대통령의 5.18 행사 기념사에 영감을 주기도 했던 이 연설이 최근 다시 주목받고 있다. 영화 <1987>의 마지막 부분 이 연설 영상이 나오며, 또 한 번 시민들을 울리고 있기 때문이다.

문익환 목사는 민주화 운동과 통일 운동의 투사였지만, 아름답고 때로는 가슴 저미는 은유로 민주화를 노래하는 시인이기도 했다.

▲ 고 문익환 목사 ⓒ 늦봄 문익환목사 기념사업회 <통일맞이>

그렇다면 문익환 목사의 '열사여' 연설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즉흥적으로 이뤄졌다는 말도 있었지만, 사전에 열사들의 명단을 준비했다고 한다. 또한 문 목사는 열사 이름을 외치기 전 "70대 노인이 20대 청년의 장례식에 와서 말하려니 가슴 아프고 할 말이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기릴 말을 못 찾을 정도로 슬픈 죽음이라, 열사의 이름들을 외치는 것으로 대신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고 문익환 목사(1918~1994)의 장녀 문영금씨는 "아버지는 열사들이 죽을 때마다 '이 사람들이 못 이룬 꿈을 다 이뤄주기 위해, 이 사람의 삶을 대신 계속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며 "'열사여'도 그런 생각에서 나온 연설이 아닌가 싶다"고 밝혔다.

그리고 문 목사의 '연설문'은 한 번의 수정을 거쳤다. 김학민 이한열기념사업회 이사장(당시 출판사 학민사 대표)은 9일 <오마이뉴스>와의 전화 통화에서 "문 목사가 장례식장에서 '빠진 부분을 이야기해달라'며 자신에게 종이를 건네줬다"고 밝혔다. 종이를 받은 김 이사장이 4~5명의 이름을 더 적어서 문 목사에게 돌려줬다고 한다.

김 이사장은 "그 종이에 있는 이름 그대로 읽을 줄은 몰랐다. 저도 깜짝 놀랐다"며 당시 연설에 충격과 감동을 동시에 느꼈다고 밝혔다. 이어 "시인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할 수 있던 게 아닐까. 어떤 조사보다도 그 울림이 컸다"고 강조했다.

김 이사장은 영화 <1987>에 나오는 연설 장면에 대해선 "영화 전체의 줄거리도 의미가 있지만 마지막에 문 목사님이 열사들 이름을 외치는 것과 노래 '그날이 오면'이 결합하면서 울림이 굉장했다"고 말했다. 다음은 김 이사장과의 일문일답을 정리한 내용이다.

"또 다른 이한열들의 죽음까지 기리는 명연설"

▲ 이한열 열사 장례식에서 연설을 하는 문익환 목사의 모습 ⓒ 유투브 영상 캡처

- 문익환 목사가 '열사여' 연설 전에 이름이 적힌 종이를 줬다고 들었다.
"당시 나는 이한열 장례집행위원으로 일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문 목사님이 당시 열사들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가져와서 나에게 줬다. 열사 중에 빠진 이름들을 적어달라고 하셔서 빠진 인물들을 추가로 적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적은 이름들을 모르시는 게 아니었다. 당시 문 목사님은 6.29 선언 이후 사면이 돼 감옥에서 나온 지 얼마 안 되셨을 때라 정신이 없던 상황이었다. 그곳에서 가나다순으로 생각해서 표정두 열사를 비롯한 4~5명의 이름을 더 적어서 드렸다."

- '광주 2천여 영령'을 제외하고 총 25명이다. 선정하는 데 어떤 기준이 있었나?
"기준은 없다. 민중 생존권이나 민주주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분들을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전부 열사로 부르고 있었고, 나와 문익환 목사가 아는 열사들은 다 쓴 것 같다. 지역 노동 부문의 열사들이나 우리가 파악하지 못한 열사들 중에 빠진 분들이 있을 수도 있다."

- 이름을 외칠 것을 예상하셨나?
"당연히 몰랐다. 처음부터 왜 명단을 적어달라고 하는지도 몰랐다. 일반적인 목사님 추도사 같은 형식으로 진행될 줄 알았는데 깜짝 놀랐다."

- 준비를 많이 한 것처럼 느껴졌나?
"아니다. 사전에 준비를 많이 하셨으면 저한테 와서 빠진 게 없냐고 물어볼 리가 없다. 아마도 장례식날 아침에 갑자기 어떤 영감을 받으신 게 아닌가 싶다. 어떻게 이한열의 죽음에 대한 슬픔과 고통을 나타낼까 고민하다가, '또다른 이한열들의 죽음'까지 기억할 수 있는 방식을 정하신 것 같다."

▲ 영화 <1987> 포스터 ⓒ CJ 엔터테인먼트

- 문익환 목사는 열사들 장례식에 자주 참석하셨나
"감옥에 계시지 않으면 제일 먼저 달려오셨고, 의례 추도사를 하셨다. 궂은일임에도 불구하고 마다하지 않으셨다. 열사들의 장례식 순서를 정하면서 문 목사님 추도사 순서를 넣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명연설의 한 부분을 담당한 셈이다. 자부심이 있나?
"어불성설이다. 목사님이 그 어떤 조사보다도 대단한 울림을 시민들에게 줄 수 있던 것은, 그분의 정체성 중 하나가 시인이기 때문이다. 목사님의 시인으로서의 감수성을 가장 압축적이면서도, 진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형식이었다고 본다. 자신의 개인적인 주장을 드러내는 게 아니라 목숨 바친 이들의 이름을 외치면서 이한열의 죽음까지 기렸다. 보통 사람들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가 시인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 영화 <1987>에도 이 연설이 나온다. 감상한 소감이 어떤지 궁금하다
"영화 전체가 담고 있는 내용도 의미가 크지만, 무엇보다 마지막에 나오는 문 목사님의 연설이 이 영화의 울림을 더 크게 만들었다고 본다. 특히 문 목사님이 열사들의 이름을 외칠 때 노래 '그날의 오면'이 결합하면서 감동을 더 했다. 감독님이 이 영상을 배치한 의미에 많은 이들이 공감했으면 좋겠다."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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