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8일, 늦봄 문익환 목사 서거 24주기를 맞는다.

'통일의 선구자' 늦봄 문익환 목사 24주기 추도식 및 묘소참배

일시: 2018년 1월 13일(일) 오전 11시~12시

장소: 마석 모란공원 문익환·박용길 묘역

주최: 통일맞이, 한빛교회, (사)통일의집, 한신대총동문회, 한신대총학생회

후원: 늦봄문익환탄생100주년기념사업위원회 

문익환(1918-1994,북간도 명동)?

문익환 목사는 한국 재야운동의 큰 별이었다. 김구 선생 뒤를 잇는 통일운동가라 할 만하다. 6차례의 옥살이,10년여에 걸친 투옥경력이 말해주듯 문 목사는 한국현대사의 굽이굽이마다에서 저항의 목소리를 낮추지 않았던 재야운동의 산증인이기도 했다.

『꿈을 비는 마음』등 여러권의 시집과 수필집을 냈고 시인으로 불리는걸 좋아했던 문 목사는 일제와 분단, 군사정권의 탄압 등 현대사의 온갖 굴곡 속에서 어린애 같은 순수함과 청년의 열정을 간직한 채 투쟁으로 일관하다 이제 역사 속으로 영원히 잠들게 되었다.

아래는 영화배우 문성근이 밝힌 '아버지 문익환 목사'에 대해서 이혜련 기자가 정리한 내용이다.

[문성근씨는 언론으로부터 아버지에 대해 인터뷰하자는 제의를 수없이 받았지만 한 번도 응한 적이 없었다. “아버지와 나는 차원이 다르다. 격이 다른 인간을 섞지 말라”는 게 그의 거절 사유였다. 그런 그가 아버지의 모습과 아버지에 대한 자신의 심정을 차분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문성근씨는 지난해부터 지금까지와 달리 살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영화 안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최근에 사람들은 문성근씨가 다른 영화배우들과 함께 스크린 쿼터를 지키기 위한 가두시위를 하는 모습을 보았다. 문성근씨는 스크린 쿼터 사수 비상대책위원회 대외협력담당을 맡고 있다.

문성근씨는 아버지를 문목사로 호칭했다. 문익환 목사는 1976년 ‘3·1 민주구국선언’으로 구속되면서 민주화운동과 통일운동에 나섰다. 그때 문목사의 나이 59세였다. 그가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에 민주화투쟁에 앞장선 데는 친한 친구이며 <사상계> 발행인이었던 장준하의 죽음이 큰 영향을 끼쳤다. 당시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장준하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암살되었다는 소문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 역시 친한 친구였던 윤동주가 일본 옥중에서 죽은 후 친구의 몫까지 살겠다며 시를 쓰기 시작했을 정도로 뜨거운 가슴을 가지고 있었던 문목사는 장준하가 비명에 간 후 그가 못다한 일을 하겠다며 민주화투쟁 전면에 나선 것이었다.

그때까지 문목사는 조용히 자신의 일만 하는 사람이었지만 그렇다고 현실과 타협해 편안한 삶을 꾀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일제시대 은진중학교와 숭실중학교 재학 중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퇴학당했고, 동경에 있는 일본 신학교에 다닐 때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학교를 옮겼을 만큼 꼿꼿한 사람이었다.

3·1민주구국선언 이후 문목사는 여섯 번이나 감옥에 갔다왔다. 78년 유신헌법의 비민주성을 비판하다 형집행정지 취소로 재투옥되었고, 80년 5·17때는 내란예비음모죄로, 85년에는 5·3인천항쟁 사건으로, 89년 방북 후에는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그리고 91년 강경대군 장례위원장을 맡아 활동하다가 형집행정지 취소로 다시 감옥에 들어갔다.

여섯 번째 투옥되었을 때 문목사의 나이 73세였다. 젊은 사람들도 견디기 힘든 옥살이를 여섯 번이나 하면서도 그는 감옥가는 것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제일 짧게는 11개월, 길게는 34개월씩 여섯 번이나 있었습니다. 현대사에 문목사처럼 그렇게 옥살이를 한 사람이 또 있는지 모르겠어요. 그런 점에서도 문목사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사람이 아닌가 싶어요.”

문성근씨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옥살이를 해본 경험이 있다. 문목사가 여섯 번째 투옥되었을 재판을 참관하다가 혼잣말로 “그래 너 잘 빠졌다”고 한 것이 판사의 귀에 들어가 법정소란죄로 열흘 감치명령을 받았다. 자신은 열흘도 견디기 힘들었던 감옥생활을 도합 11년이나 했으면서도 한 번도 힘든 내색을 한 적이 없는 아버지를 헤아리는 그의 마음은 존경심이나 안타까움 같은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다.

문성근씨는 그동안 스스로 한계를 짓고 활동을 하지 않으려고 했던 이유 중 하나라며 다음과 같은 고백을 했다. 아버지에 대해 냉정하리만큼 객관적으로 이야기하던 그도 이때만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냈다.

“여섯 번째 구속되셨을 때가 이른바 강경대 정국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장례위원장을 맡으셨어요. 그런데 검찰에서는 ‘형 집행정지로 나온 사람이 그렇게 날뛰면 다시 잡아넣겠다’고 했습니다. 마포에서 노제를 치를 때 아버지가 ‘나 내일이면 또 들어간다’ 그러시는데 정말 속이 상했습니다. ‘벌써 다섯 번이나 감옥에 갔다왔고 이빨도 다 빠진 병들고 늙은 노인에게 장례위원장을 맡겨서 또 감옥에 들어가게 해야 하냐, 정말 이게 운동권에서 할 일이냐, 이번에는 너희들이 들어가면 안되냐’ 하는 생각에 그때 같이 일했던 사람들에게 굉장히 섭섭했고, 그 마음이 상당히 오래 갔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볼 때 문목사는 굉장히 강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문성근씨는 아버지가 원래부터 그런 사람은 아니었다고 말한다.

“문목사는 성격이나 체력이나 지도자로 적합한 분은 아니었습니다. 성격이 굉장히 섬세하고 예민해서 화도 잘 내셨고, 몸도 약하셨습니다. 오죽하면 어머니가 6개월만 같이 살아도 좋다는 각오를 하고 결혼하셨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든 맡으면 몸을 돌보지 않고 하시는 분이셨기에 몸이 더 쇠약해진 면도 있었습니다. 60년대 한국신학대학에 계실 때 교무과장인지 교무처장인지를 맡으셨는데 과로해서 쓰러지신 후 한쪽 귀를 잃으셨습니다.”

하지만 민주화 투쟁과 통일운동에 헌신하면서 문목사는 점점 강해져 갔다.

“70년대 기독교회관에서는 목요기도회니, 금요기도회니 해서 구속자를 위한 기도회가 열렸거든요. 70년대 말이었어요. 건물 밖에는 전경이 포위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1층 복도에서 운동가요를 부르며 말하자면 서로 용기를 북돋아주고 있었어요. 일종의 부흥회 같았다고나 할까요. 그때 한 젊은 목사가 구호를 외치고 운동권 노래를 부르는 것을 무척 쑥스러워하자 아버지는 그 목사의 등짝을 힘있게 때리며 ‘그런 상태로 어떻게 일을 하나’하고 나무라셨습니다. 지금도 그때 기억이 선명합니다.”

문목사와 함께 활동했던 김근태 의원은 문목사에 대해 운동가라기보다 시인이었고, 조직가라기보다 신학자였다며 그러나 그 시대에는 문목사처럼 감성과 열정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문성근씨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흔히 육체와 정신을 나누어서 설명하지만 사실 두가지는 몸이라는 하나에서 같이 움직이는 것처럼 문목사는 시인이며 동시에 운동가였고, 신학자이며 동시에 조직가였다고 말한다.

생전에 문익환 목사는 인사하는 사람들 중 친근감을 표시할 만한 사람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포옹을 했다. 단순히 제스처가 아니라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인사였다. 문성근씨는 늘 웃고 사람들을 포옹하고 함께 춤추는 아버지의 모습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제가 아는 문목사는 그렇게 밝은 분이 아니거든요. 물론 열정은 늘 가지고 계셨지만. 원래 저희 집안 내력이 명랑한 편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변 분들을 그렇게 대한 것 자체가 굉장한 노력이었죠. 그러나 사람이 집에 와서도 노력할 수는 없기 때문에 집안식구들에게는 따뜻한 모습을 보여주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남민전 같은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분들에게는 아주 각별하게 신경을 썼습니다. 농성하고 있다가 누가 다쳤다는 소식을 들으면 새벽 두시고 세시고 안 가리고 뛰어나가 제일 먼저 도착하시곤 했어요. 제가 보기에 그게 엄청난 노력이었기에 더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문성근씨가 볼 때 아버지는 가정적으로 따뜻한 사람은 아니었다. 집에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늘 바빴으며 오랫동안 감옥에 가 있었기 때문에 자식들도 아버지를 만날 수 없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속 깊은 정을 느낀 적이 있다.

“제가 학교 다닐 때 굉장히 술을 많이 마셨어요. 술이 약해서 필름이 끊기곤 했는데, 어느날 집 앞까지 와서 쓰러져서 잔 적이 있어요. 그때 누나 친구가 집에 와 있었는데 다음날 아침에 ‘너 어제 아버지가 업고 들어오셨다’ 하더라고요. 그런데 아버지는 아무 말씀이 없으셨습니다. 원래 아버지는 뭘 하라 하지 마라 하시는 분이 아니셨습니다. 1주일쯤 후에 ‘너 마흔 살이 되었을 때 뭘 할지 생각해봐라’ 하시더라고요. 제가 지금 마흔이 넘었는데, 아마 죽을 때까지 그 말을 잊지 못할 것 같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아버지의 생애를 제 마음 속에 정리해본 적이 없고 앞으로도 못할 것 같다”는 그의 말에는 아버지에 대한 커다란 회한이 느껴졌다.

“방북 후 다섯 번째 수감됐다 나온 후 갑자기 늙으셨어요. 그때 아버지는 굉장히 억울해 하셨어요. 그전까지 정권퇴진운동을 했지만 방북은 전혀 차원이 다른 것이라는 거죠. 북한 허담 위원장과의 합의서를 가지고 왔는데 양자는 각 정부에 논의자료로 사용하도록 건의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저도 그때는 아버지의 생각을 잘 이해하지 못했는데, 언론에서도 뭐라고 하고 운동권 안에서도 의견이 갈라져서 아버지를 변호하기 위해 나름대로 공부를 했습니다.”

북한은 60년대부터 남북한이 별도의 정부를 구성하되 외교와 군사부문만 합치는 고려연방제 통일안을 내놓고 있었고, 남한에서도 그때까지 여러 가지 통일방안을 내놓았지만 요점은 유엔 감시하에 인구비례로 총선거를 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남한이 인구가 더 많은데 북한에서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80년대 이후 이홍구 통일원장관이 판문점에 남북한 동수의 위원회를 두고 통일문제를 협의해 나가자는 체제연방제방안을 만들었다.

"문목사의 주장은 군사부터 합치자고 하면 영원히 통일이 안된다, 각각의 정부에서 우선 외교만 합치자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 갔을 때 김일성 주석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김주석이 ‘좋다’고 하는데 몇 초가 안 걸렸대요. 그것은 북한이 고려연방제에서 처음으로 후퇴한 것이었고, 남한에서 준비중이었던 체제연방제 방안과 거의 유사했습니다. 북한의 양보를 얻어 남한과 유사한 것을 이끌어내고 돌아와서 ‘다 준비됐으니 이제 너희들이 만나라’ 이거였는데,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고 가두었으니 억울하셨던 거죠. 그때 제가 이런 것을 분석해서 신문에 기고했었는데 실어준 데가 몇군데 안돼요.”

문목사는 생전에 아무 준비 없이 8·15해방을 맞았기 때문에 남북이 분단되었다며 무조건 남북한이 합치는 통일이 아니라 준비된 통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생전에 아버지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성경 오역이나 고치고 자서전이나 쓰면서 지내시는 게 어떠냐”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문목사는 1968년부터 76년까지 신구교 공동 구약을 책임맡아 번역했다. 그러나 3·1민주구국선언으로 끌려들어가는 바람에 최종 교정을 못해 오역이 많다며 언젠가 시간이 나면 오역을 고치겠다는 말을 자주 해왔다.

아버지에 대한 그의 회한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임종조차 하지 못한 것 때문에 더 큰 것 같았다. 그는 “이제야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 때쯤 갑자기 돌아가셨다”고 했다.

“점심식사 후 혈압이 높아져서 병원으로 모시고 갔어요. 첫번째 교도소 생활을 하실 때까지만 해도 혈압강하제를 드셨는데 그 뒤 교도소에서 요가와 파스요법을 하시면서 약을 드시지 않게 되었습니다. 요가와 파스요법에서도 경지에 오르셨어요. 그런 능력에 대한 과신이 돌아가시게 한 게 아닌가 싶기도 해요. 그날 세브란스병원 응급실에 갔는데 사람이 너무 많아서 ‘돌아가서 요가 좀 하지’ 하면서 그냥 돌아오셨습니다. 저희는 다 체한 줄 알았어요. 나중에 온 의사도 그랬고요. 아무도 돌아가실 줄 몰랐습니다. 그냥 ‘어어’ 하는데 숨이 멎었답니다. 저는 임종도 못했고…”.

문목사는 생의 마지막이 가까워질수록 발바닥이라는 말을 많이 썼다고 한다. 시에도 발바닥으로 살겠다는 표현을 자주 했다.

“배우도 너무 많은 프로에 나오면 신비감이 없어지잖아요. 한 번은 아버지께 대중집회에 너무 많이 나가면 영향력도 떨어지고 하니까 중요한 자리나 가시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시간표를 보면 아침 8시에 광주 무등교회 청년모임, 9시 무슨 교회 무슨 모임, 이런 식으로 빽빽하게 차 있었어요. 어머니에게 슬며시 ‘거기 가면 몇 명이나 있어요’ 하고 여쭤봤더니 대개 열댓명쯤 모인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때는 그런 데까지 뭐하러 가시나 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렇게 작은 모임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셨던 게 발바닥으로 살겠다는 뜻이 아니었나 싶어요.”

그는 아버지는 기독교인으로서 예수의 삶을 쫓아가려고 노력한 것 같다며 문목사가 나고 자란 만주라는 배경도 적지 않게 작용한 것 같다고 한다.

“안중근 선생이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기 위해 총연습을 하던 곳이 문목사 집 뒷산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입증할 순 없지만 할머니가 독립군 연락책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워낙 큰 나무였던 아버지라 그 뜻을 받들어 살겠다는 것은 어차피 불가능하므로 아예 욕심을 안 낸다고 말한다.

“제 직업이 영화와 방송 쪽이므로 그것을 통해 조금이라도 세상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살자고 생각할 뿐입니다. 제가 보기에 세상에는 네가지 부류의 인간이 있는 것 같아요. 첫번째로 다른 사람들에게 저런 사람은 차라리 없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 두 번째는 그 정도는 아니지만 별로 안 좋은 사람, 세 번째는 조금 도움이 되는 사람, 네 번째는 남을 위해 봉사하고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저는 조금 필요한 사람 수준이 되더라도 고맙고, 또 할 만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식으로서 아직 아버지의 평전을 못 내고 있는 게 송구스럽다는 문성근씨. 오래전부터 생각은 했지만 문목사가 신학자, 시인, 통일운동가로 관계한 분야가 워낙 많다보니 충실하게 기록할 자신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금년에는 꼭 시작할 생각이라고 말한다. 평전이 완성되고 나면 아버지에 대한 그의 마음 정리도 되지 않을까 싶다.]

북한에서 김일성을 만나 통일을 논의하고 돌아왔을 때 그를 기다린 것은 감옥이었다.

"서울에서는 구속영장이 기다리고 있을텐데요?" 기자가 물었다.

 "신경 안 씁니다. 거듭 말했지만 나는 실정법을 범하면서 악법을 깨뜨려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나를 구속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 까닭은 내가 감옥을 두려워 해서가 아닙니다. 모처럼 북한의 최고 책임자를 만나 통일의 실마리를 찾았는데, 그 당사자인 나를 오랏줄로 묶으면 통일운동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문 목사의 답변이었다.

끝으로 생전의 문 목사가 어머님께 보낸 편지의 일부을 인용한다.

[동주는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바라며 살다가 한 점 부끄럼 없이 죽었습니다. 준하는 "부끄러운 조상이 되지 않는다"며 살다가 우리 모두의 자랑으로 죽어 갔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동수군의 죽음 앞에서 어떻게 벗어버릴 수 없는 부끄러움을 뒤집어쓰고 말았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이미 뒤집어쓴 부끄러움을 얼마나 빨리 벗어버리느냐는 데 있습니다. '45년이라니'라는 시에서 저는 우리가 얼마나 못났으면 남이 그어 놓은 금을 아직도 못 지우고 그걸 무슨 보물 단지처럼 깨어질세라 2백만 군대를 무장 시켜서 지키느라고 바둥거리느냐는 걸, 그 민족적인 부끄러움을 읊어 보았습 니다. 젊은이들의 죽음은 그 치욕을 우리에게 일깨워 주는 종소리였습니다. 생각해 보면 그 부끄러움이란 우리들에게 민족사 앞에서 느끼는 부끄러움만이 아니라는 걸 전 요새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

SNS 기사보내기
뉴스프리존을 응원해주세요.

이념과 진영에서 벗어나 우리의 문제들에 대해 사실에 입각한 해법을 찾겠습니다.
더 나은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요.

정기후원 하기
기사제보
저작권자 © 뉴스프리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