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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칼럼] 육응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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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산 칼럼] 육응기상
  • 김덕권
  • 승인 2021.11.25 00: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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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생각을 긍정적으로 하는 사람도 있고, 부정적인 사고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저도 젊은 시절에는 부정적인 생각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매사를 부정적으로 또는 하는 일을 순리(順理)로 못하고, 역리(逆理) 뚫으려 했으니 하는 일이 잘 될 일이 없었지요.

그런 제가 불연(佛緣)이 깊었든지 천만 다행으로 일원대도(一圓大道)를 만나 모든 일에 긍정적이고, 적극적이며, 정열적인 면모로 바뀌었습니다. 그 결과가 오늘의 제 모습이지요. 생각을 긍정적으로 하고, 단순하게 하며, 욕심을 비우니 하는 일이 술술 풀리고 원하면 원하는 대로 이룰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꼭 버려야 할 생각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걸 ‘육응기상(六應棄想)’이라고 하지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절대로 마음에 담아서는 안 되는 생각들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6개를 ‘육응기상’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첫째,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자살’입니다.

자살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선물인 자신의 생명인 그 가치를 모른 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둘째, 모든 걸 무언가의 탓으로 돌리는 ‘핑계’입니다.

내가 못사는 것도 부모 탓이요, 사람들이 나를 싫어하는 것도 내 탓이 아닌 그들의 못된 심성 때문이라며 남 탓을 하는 생각입니다.

셋째, 열등의식 때문에 남을 헐뜯는 ‘시기심’입니다.

나보다 돈이 많거나, 나보다 잘 생겼다는 이유 같지 않은 이유로 누군가를 헐뜯거나 모함하는 시기심은 결국 자신을 망치는 생각이지요.

넷째, 자신만 옳다는 ‘독선’입니다.

설사 내 말이 옳고 다른 사람의 말이 틀렸더라도, 공존의 룰을 지키려면 상대방을 비난하지 않고 포용하는 아량이 꼭 필요합니다.

다섯째, 부정적사고입니다.

전류가 흐르기 위해선 플러스와 마이너스 두 전극이 필요합니다. 이 때 마이너스는 양전하(陽電荷)가 상대적으로 적은 전극을 말합니다. 그런데 절대적인 기준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전하량 3을 가진 6전극은 1과 연결하면 플러스극이 되지만, 5와 연결하면 마이너스 극이 됩니다.

이와 같이 내 삶도 실패나 성공, 부족과 과잉의 절대기준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대상을 잘 선택해서, 매사를 긍정의 프레임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삶의 자세를 갖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여섯째, 세상을 만만하게 보는 ‘자만’ 입니다.

비상한 재주를 세상이 칭찬 해주면, 더욱 자신을 낮춰 겸손해야 적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자신의 재주를 믿고 세상을 무시하면 머지잖아 그 재주는 세상의 외면을 받아 아무런 쓸모가 없어지는 것이 예외 없는 세상의 이치입니다.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사람들은 예외 없이 이 여섯 가지를 마음에 담고 있지 않습니다. 자살, 핑게, 시기심, 독선, 부정적 사고, 자만심, 이 여섯 가지 잘못된 생각들을 쓰레기통에 버리다 가는 게 인생 최고의 성공비법이 아닐까요?

이렇게 나쁜 습관을 하나하나 버릴 때마다 우리의 인생이 조금씩, 하지만 분명히 달라집니다. 나쁜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달라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애써 좋은 습관을 하나 더 늘리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나쁜 습관만 줄여도 인생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새 출발을 원하거나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변화 내지는 개선시키고자 할 때 항상 리스트를 작성하지요. 이 리스트의 항목은 새로운 다짐과 좋은 습관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런데 더불어 이러한 결심을 작심삼일로 끝맺는 것이 보통입니다.

원불교의 근본 사상은 중도입니다. 양 극단을 버리고 중도를 취하라는 말입니다. 곧 나고 죽는 것도 버리고, 있고 없는 것도 버리고, 약하고 착한 것도 버리고, 옳고 그른 것도 모두 버려야 합니다. 그렇게 모두 버리면 시(是)도 아니고 비(非)도 아니며, 선(善)도 아니고 악(惡)도 아니고, 유(有)도 아니고 무(無)도 아닌 절대의 세계가 열립니다.

이렇듯 상대의 모순을 모두 버리고 절대의 세계를 성취하는 것이 바로 해탈이며 대 자유이며 성불인 것입니다. 모든 대립 가운데에서도 유와 무가 가장 큰 대립입니다. 그런데 중도는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닙니다. 곧 있음과 없음을 모두 떠난 것이 중도이지요.

괴로움과 즐거움을 완전히 버리고, 옳음과 그름을 버리고, 있음과 없음을 버린다고 해서 아무 것도 없는 허공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구름이 완전히 걷히면 밝은 해가 나오는 것과 같아서 거기에는 광명이 있을 뿐입니다. 유와 무를 완전히 버리면 그와 동시에 유와 무가 서로 통하는 세계, 곧 원융회통(圓融會通)한 세계가 벌어지는 것이지요.

이렇듯 중도의 세계란 유무의 상대를 버리는 동시에 그 상대가 융합하는 세계를 말합니다. 양변을 버리는 동시에 양변을 융합하는 이 중도의 세계가 바로 원불교의 근본 사상입니다. 그런데 어쩌자고 여와 야를 나누고 남과 북을 가르며, 너와 나를 가르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 쓸데없는 생각을 버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생각과 행동에 중도를 취하면 모든 번뇌 망상은 사라지지 않을 까요!

단기 4354년, 불기 2565년, 서기 2021년, 원기 106년 11월 25일

덕 산 김 덕 권(길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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